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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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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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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53,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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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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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DUMMY

길지 않은, 어둠에 싸여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굴을 지나들어가자, 사람 백여 명쯤이 충분히 누워, 잠을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오라는 분의 거처인가요?”


동굴을 돌아보며 아리시아는 잠시 센틀러의 얼음 동굴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중앙에 놓인 기다란 선반과 멀리 떨어진 벽 쪽에 덩그러니 떨어져있는 침대, 그리고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까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선 반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는 가지각색의 물감들과 붓. 그리고 금색, 은색의 고급스러운 액자에 담긴 수많은 그림들이 온 벽면을 빼곡하게 덮고 있다는 점이었다. 벽 한 쪽에 그리다가 그만 둔, 초상화 하나가 이젤 위에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이곳 주인의 취미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크기도 제각각인 액자에 담긴 그림들은, 핏빛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겨울산의 풍경이나, 허리가 잘려나간 채 울부짖고 있는 여인의 초상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마물들과 인간의 모습이 서로 뒤엉켜 절규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등, 하나같이 어딘가 암울한 기운을 내 품고 있는 것들뿐이어서 동굴 안의 분위기는 어딘가 음산하고, 괴기스러웠다.


벽에 붙은 촛대에 불을 붙이고서 밝아진 동공 안을 휘둘러보던 미리의 시선이 한쪽 바닥에 그려진 둥근 마법진 위에 멈추었다. 마법진 위에는 색색의 물감으로 더럽혀진 채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옷자락과, 붉은 색의 팔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런……."


얼굴을 구기며 마법진 위로 다가 간 미리가 팔찌를 들어올렸다.


“리오님의 것이에요.”


미리가 차고 있던 것과 같은 붉은 색의 팔찌. 가만히 그 팔찌를 바라보고 있던 미리가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이 마법진이 왜 여기에 있는지?"


8클레스의 마법책마저도 모두 독파한 아리시아도 처음 보는 마법진. 대체 무슨 마법진이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마계의 문을 여는, 금기의 마법진이예요."


아리시아는 순간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의 문양을 아슈타 속에 담았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지는 미리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지키는 검은, 모두 마계의 문을 여는 열쇠예요. 700년 전, 마왕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검과 그 검을 본떠서 무수히 많은 검들이 만들어졌지요.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전쟁> 때, 소멸되어 버렸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검은 총 일곱 자루. 모두 우리가 회수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러님의 검을 빼앗긴 건가요?"


짐시 생각에 잠겼던 미리의 입에서 조금은, 기운 없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법진으로 마계를 드나들 수도 있나요?"


"아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계에 있는 마족을 불러오는 정도예요. 소환의식은 반마족이 직접 행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반마족에게 혼을 준 마계의 마족이 소환되어 오죠."


아리사아는 다시 한 번 마법진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마법사들의 소환마법과의 차이는 뭐죠?"


"마법사의 소환은 서로의 계약에 의한 관계. 즉, 마법사가 죽으면 마족도 마계로 제소환되죠. 또한 그 힘도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적게는 십분의 일. 많아야 반의 힘도 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소환되어 온 마족들은 어떤 자들은 인간 마스터들의 손에 몸을 잃고 마계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지요."


아리시아가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미 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마족을 소환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건 알 수 없어요. 다만 제가 의심스러운 건. 이 마법진이 왜 여기에 그려져 있는가, 하는 점이예요. 누군가 리오님을 소멸시키고서 검을 빼앗아 갔다면 굳이 이곳에서 소환마법을 펼칠 이유가 없어요. 그게 아니면……."


미리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법진이 왜 여기에 있을까? 소환의식은 반마족 자신이 직접 행해야만함으로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어딘가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행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검을 빼앗은 곳에서 겁도 없이 소환 의식을 치렀다? 왜 그랬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미리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서있는 아리시아를 발견하고는 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 왕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세리안님의 명을 기다려봐야지요. 밤이 깊었으니 일단 이곳에서 하루 밤 지내도록 해요.”





아리시아와 미리가, 석상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동굴 앞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공은, 용병대 전원이 편히 누워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원래 잠을 자지 않은 아리시아와 오늘 따라, 복잡해지는 상념에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던 미리는 결국 이렇게 밖으로 나와 번을 설 겸, 마주 앉아 별구경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둠이 들어 찬 절벽 너머 숲속에서는 여전히 거대한 마물들의 싸움을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그 것들이 질러대는 괴성과 함께 수많은 날짐승들이 날아올랐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담소를 나눈다고 했지만, 아리시아도, 미리도 모두 그저 가만히 않아 마물들의 싸움을 구경을 하거나, 간혹 절벽 위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겁도 없이 달려드는 마물들에게 얼음의 창을 날려주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리아나가 걸어 나와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리에게 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고마웠어."


"뭘 고작……."


중간에 말을 끊은 미리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세어 나왔다. 무어라고 대답을 해주려고 했지만 그대로 말을 쏟아내면 그녀에게 상처만 안겨 주리라. 이 낯간지러움을 참고 내뱉을 만한 말이, 예전에는 곧잘 떠올랐을 텐데도 지금은 영, 생각나질 않았다. 오히려 고작 그 정도의 일에 무슨 감사인사냐고, 자꾸만 핀잔을 주게 될 것만 같아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변한 건 자신일 터, 주머니 속으로 파고든 미리의 손이, 자꾸만 리오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누구에게 어떻게 소멸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리오는 봉인의 팔찌도 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듯 했다. 그래서 팔찌는 멀쩡했다.

‘팔찌를…….’

이 팔찌를 끼워 마기를 봉인하기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다른 인간들과 같은 감성을 지니게 될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마물의 산. 지금까지는 아리시아가 혼자서 충분히 감당을 하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녀에게 벅찬 일이 닥쳤을 때는 자신이 아리시아를 도와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봉인의 팔찌는 다시 부서져 버릴테고, 그 후에는 더 끔찍한 고통이 찾아들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미리는 산맥을 넘는 동안만이라도 참고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리아나를 마주대하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용기를 내 찾아온 리아나를 인간들처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리, 그리고 스승님, 저 검술을 다시 시작하겠어요."


뜻밖의 이야기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미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미리의 눈을 오랜만에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리아나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나, 다시 시작해 보려고, 훌륭한 기사가 되어서 아버지에게도, 아니 세상의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볼 거야."


미리와 아리시아는 그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리아나는 마음이 후련해져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 때,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변한 미리가 리아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리아나를 덮친 미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 손으로 무언가를 낚아채며 리아나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너무나 놀란 마음에 아픔도 잊고, 멍한 얼굴이 되어 올려다보는 리아나의 눈에 미리의 손에 잡힌 녹색의 검이 들어왔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녹색독사카니> 가 어디에선가 날아와 자신을 공격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서 돌아보니, 돌계단 위에서 검은 복면을 한 인영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었군요."


미리가 가늘게 뜬 눈으로 복면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역시 알아 본건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미리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줄줄이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이 다시 하얗게 탈색 되듯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의 편에선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거네."


미리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 그분이 계신데, 그분이 누군지 그새 잊어버리기라도 한 겁니까. 리오르토님?"


잠시, 고요 속에 파묻힌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짧은 한숨이 내쉰 복면인이 손을 들어 자신의 복면을 벗었다.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움푹 들어간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핏기하나 없이 파리한 얼굴의 남자는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미리를 내려다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밀리아양. 안됐지만 이제 그분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소리치는 미리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담겨있었다.


"듣지 못했는가? 페르가피아님이…… 그가 죽었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는 세리안님과는 달라."


"그렇지. 그러나 그 분은 세리안님만큼의 혼을, 마왕 카른드키아님으로 부터 받으셨지. 그리고 세리안님보다 백여 년이나 늦게 태어난 반마족이고, 그런 그가 소멸했다는 말이네. 그것도 처참 할 정도로 끔찍한 모습으로 말이야."


"거짓말."


그를 바라보던 미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쩐 일인지 미리의 하얗던 피부색이 조금, 인간의 것으로 돌아온 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누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네. 집어치우지 못해?"


"뭐, 사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네. 그 전에 이곳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네. 그게 우리의 사명이었는데, 그가 모든 걸 바꿔놓지 않았나……. 헛된 꿈으로……. 그대도 알고 있지? 이 땅은 태초부터 그들의 땅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마족을 소환했나?"


리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이제 되돌릴 수는 없다."


"신은 허락하지 않았어."


"그대는 신을 만난 적이 있나? 신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마족이 이 세상에 발을 들일 가능성을 애초에 만들어 두지도 않으셨을 거야."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구름이 한 순간에 몰려와 밤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구름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사람의 형체로 변하더니 조금씩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쥐의 것 같은 회색빛 날개를 휘날리며, 특이 하게도 길게 뻗어 나온 세 개의 목 위에서 세 개의 머리를 마구 흔들며 서 있는 마족은, 크기만 서 너 배쯤 커졌을 뿐, 그 얼굴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리오와 닮아있었다.

검은 구름이 완전히 사람의 형체를 갖추자 하늘을 휘젓던 세 개의 머리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 여섯 개의 눈동자가 제각기 움직이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자들인가?"


제일 왼쪽에 있던 머리가 리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리오가 고개를 반쯤 숙이고서 대답했다.


"마……족!"


미리의 입에서, 차라리 신음소리라고 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미리를 향했던 아리시아의 시선이 마족에게로 돌아갔다. 마침 가운데 얼굴이 아시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 눈빛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무언가가 그녀의 전신을 압박하며 옥죄어 왔다. 아리시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줌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위압감은 확실히 여타의 반마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도, 잠시나마 불에 데인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가 그 설원의 마검사인가?"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수십 개의 스피커가 들어 찬 방 가운데 서서, 그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주위의 공간을 울리며 들려왔다.


"먼저 자신을 밝히……?"


이미 새하얗게 변한 미리가 리아나를 등 뒤로 숨기며 입을 열었지만 마족으로부터 전해지는 짙은 마기에 끝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미 그녀가 대항 할 수 있는 마기의 수준을 넘어선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떨리고 있었다. 뒤에 선 리아나가 아니었다면 무릎을 꿇었어도 몇 번은 꿇었을 상황이었다.


"호! 제법 버티는 구나? 인간의 편에선 반마족, 너는……, 그렇구나, 그의 혼이로구나."


마족은 미리의 마기를 통해 그녀가 지닌 혼의 주인을 알아냈다.


"검은…… 필요 없으신가 보군요?"


"내 것이 아니다. 너에게 전해두면, 혹시 아느냐? 네가 너의 혼의 주인을 부를지."


“당신을 베어버릴 수도 있지요.”


뭐가 우스운지, 곧 죽을 듯 삐쩍 마른 그의 얼굴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웅장한 웃음소리가 한참을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동안 호탕한 웃음을 내뱉은 그의 신영이 미리의 앞으로 날아왔다.


"나는 마계 남쪽, 앙가르데아의 땅에서 앙가르데아님을 모시고 있는 서열 52위 마족 '펠츠르토'라고 한다."


그녀의 몸보다도 큰 얼굴이 미리의 코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마기에 결국 미리가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에 선 리아나도 덩달아, 금방 실신이라도 할 것처럼 덜덜 떨며 쓰러졌다. 그런 둘의 앞을 막아서며 아리시아가 상황과는 맞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정말이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리안은 어찌 되는 겁니까?"


마족 펠츠르토의 세 얼굴이 동시 갸웃거리며 조금 멀어져 갔다.


"너는 그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군? 반마가 아닌가?"


아리시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면서 그를 계속해서 탐색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아슈타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그가 서 있는 곳을 그저 빈 공간으로만 인식했다. 끊이지 않고 압박해오는 마기도, 조금도 탐지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시아는 분명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마기를 몸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아슈타는 이런 그녀의 반응에 계속해서 오류메세지만을 보내 올뿐이었다. 아리시아는, 이제 더 이상 아슈타에 의존해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아슈타는 보내오던 오류메세지를 끊고 마치 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족 펠츠르토가 그런 아리시아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너……. 정령사로군. 아니 정령인가? 뭐지? 정말 희한한 아이군."


그리고는 피식 미소를 지어보인 세 개의 고개가 리오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세 얼굴에서 같은 미소가 더욱 짙게 흐르고 난 후, 그가 팔을 뻗어, 공간의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곧,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 썼다는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모양의 도가 그의 손에 들려 빠져 나왔다. 병약해 보이는 그의 손에 들린, 온통 검은 빛을 띠고 있는 도는, 마치 불꽃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며 검은색의 마기를 이리저리 뿌려대고 있었다. 마족 펠츠르토의 세 얼굴이 무언가 생각에 잠기듯, 인상을 구기더니, 왼쪽의 머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너 같은 정령은……."


그 말을 오른쪽 머리가 받았다.


“<정령왕들의 잘못 된 유희> 때……”


그리고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들고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아는데, 말이야.”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그의 거대한 도가 아리시아를 향해 그어졌다. 그리고 아리시아의 신영이 동굴 앞에 미술품처럼 서 있던 각양각색의 석상들 수십 개를 단 번에 깨부수며 날아가 처박혔다. 그리고서도 남은 검기가 동굴 앞, 오십 평 남짓 되던 평평한 공간의 반쯤을 잘라내 버렸다. 아리시아의 곁에 서 있던 미리는 급히 리아나를 끌어안고서 동굴 안으로 굴러 들어갔고, 동시에 마치 무가 썰리 듯, 잘라진 바위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동굴로 굴러들어 간신히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조금 늦은 탓에 미리의 한쪽 다리에도 긴 상처가 생겨났고, 그곳에서 검은 물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 벌벌 떨고 있는 리아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안심을 시킨 미리가 작게 마법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 턱이 부딪칠 만큼 덜덜 떨고만 있던 리아나는, 그 급박한 순간 지어보인 미리의 미소를 바라보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미리…… 하지마!"


고개를 저으며 미리의 품으로 달려든 리아나가 그녀의 입을 억지로 막으며 소리쳤다. 주문을 외우던 미리가 입을 닫고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거 외우면 난 다시 잠이 들어 버리잖아. 거추장스럽겠지만, 나 미리와 함께 지켜보고 싶어."


어느새 떨림을 멈추고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리아나가 옷자락을 찢어 자신의 다리에 난 상처에 감기 시작했다. 얼굴 가득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천을 감고 있는 리아나를 바라보던 미리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그 사이 부서진 석상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아리시아가 터벅터벅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 나와 다시 제자리에 섰다. 당당히 서서 하늘 위에 떠 있는 펠츠르토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몸에는 투명한, 얼음의 갑옷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한 손에는,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날카로운 칼날이 수십 개쯤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검이 들려있었다.


"역시 생각대로 잘 버티는군."


펠츠르토가 재미있다는 듯이 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반마족 리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말대로 대단하기는 하다만. 글쎄……?"


리오의 병약한 얼굴이 펠츠르토에서 아리시아에게로 옮겨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펠츠르토의 이어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켜 보거라. 아이야. 죽음을 맞이할 너에게 너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여주마."


그리고는 아리시아를 향해 세 개의 얼굴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모든 힘을 개방해 상대해 줄테니 마족의 힘을 마음껏 느껴보도록 해라."


그 사이 용병들과 마리엔이 동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한동안 입을 헤, 하고 벌린 채로 굳어진 듯 서있었다.

긴 목에 달린 세 개의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며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마족을 바라보며 라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건 또 뭐야?"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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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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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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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8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41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3) 15.04.18 534 15 20쪽
40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2) +3 15.04.17 511 14 17쪽
39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1) 15.04.16 399 10 19쪽
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5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7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4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1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3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3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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