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차원 코인전쟁-033
모든 것이 연결될 때
-여사님. 유성에서는 제안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게. 전에 내가 자네에게 준 걸 가지고 협상하면 되니 말이야.”
-여사님! 그걸 협상 카드로 내보이면 유성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염려하지 말게. 따로 정보를 흘릴 생각이니 말이야. 자네가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소각해 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면 될 걸세. 그 정보면 유성 일가의 반 이상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그놈들도 유성 투자증권의 지분을 포기할 걸세.”
-으음. 정말 손을 쓰실 생각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여사님. 꼬리를 잘라야 하니 한 달 정도만 시간을 주십시오.
“알았네. 수고해 주게.”
-예! 여사님.
통화를 끝낸 유정은 전화기를 놓았다.
요즘 재계나 금융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유정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성 그룹은 부채로 문어발식 차입경영을 하고 있었다.
외연을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된 유성 그룹은 부채가 800%가 넘어 추가 대출이 어려워지자 이번 일도 꾸민 것이었다.
“그놈들이야 원래 그렇다고는 해도 다들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유성 그룹만이 아니었다.
부채가 500%를 넘어간 기업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기업들은 1,000%을 넘어간 곳도 있었다.
급격히 발전하고 있어도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고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터라 대한민국의 경제는 취약했다.
대한민국은 정경유착을 통해 권력이라는 든든한 방패를 꿰차고 차입경영으로 부를 쌓은 기업들이 많았다.
재벌들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기업을 운영했다.
부실이 심각해 위기가 닥친다면 회복하지 못하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부는 방관하고 있었다.
재벌들도 대마불사라는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자신들은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무책임한 경영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정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로 놔두어도 좋을지 모르겠구나.”
대한민국 경제가 무너져가는 상황이라 고민이 됐다.
“내가 개입한다고 해도 바뀌지는 않을 거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져 봐야 경계심이 생길 테니······.”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이 세상이 이치였다.
자신이 만든 인맥이라면 미쳐 돌아가는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려움을 겪고 위기를 극복해 봐야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으며 유정은 개입할 생각을 접었다.
“그 녀석이나 만나보자. 폭풍이 지나가면 정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위기가 닥칠 것 같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경각심을 심어 주는 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의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정은 전화기를 다시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한 이와 약속을 정한 유정은 사무실을 나선 후 청와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청와대가 보이는 조용한 찻집이었다.
단정한 양장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대추차를 마시는 유정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찻집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찻집을 둘러보더니 유정이 앉은 자리로 와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네. 앉게.”
“예! 여사님.”
방민욱은 유정의 앞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종업원이 대추차 한 잔을 가지고 왔다.
“들게.”
“잘 마시겠습니다.”
민욱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놨다.
“요즘은 어떤가?”
“여전합니다.”
“막을 수는 없는 것인가?”
“천둥벌거숭이라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사님.”
“그 작자도 아들놈 때문에 말년에 편하지는 않겠군.”
“누가 뭐래도 일등 공신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막후에서 그런 짓거리 하는 것은 막아야 하거늘. 쯔! 쯧!”
“믿을 게 가족밖에 없으니 그랬겠지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 작자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테니 자네도 조심하시게.”
“알겠습니다. 여사님.”
“그나저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니 잘 준비해 주시게. 거기에 자금은 상관하지 말고.”
“예! 여사님.”
“나는 이만 가보겠네. 고생하시게.”
“살펴 가십시오.”
“알겠네.”
유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찻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방민욱은 차를 마저 마신 후 찻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청와대였다.
방민욱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에서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방민욱과 헤어진 유정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한쪽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비녀를 꽂은 후 거울을 보며 복장을 확인한 유정은 사무실을 나왔다.
도로로 나온 유정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북한산으로 갑시다. 기사 양반.”
“안전하게 모스겠습니다.”
유정을 태운 택시는 곧장 북한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간 안에 끝낼 수 있겠구나.’
혼천의 징조가 나타난 후 시간이 없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직 두 번째 징조가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번째 징조가 나타난다면 쟁투가 시작되기에 손자에게 유산을 전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산을 다 전하기 전까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돌이 되지 않을 무렵 첫 번째 유산을 손자에게 전했다.
정기를 회복시키려고 북한산에 묻어둔 유산을 다시 찾아와 나머지 유산을 전하면 시아버지의 유언은 지켜진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징조가 나타난다면 자칫 묻어둔 찾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북한산에 도착한 유정은 택시에서 내린 후 산을 올랐다.
한복을 입고 머리에 비녀를 꽂은 터라 등산객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묵묵히 목적지로 향했다.
산 중턱에 오르자 유정은 등산로를 벗어났다.
잡목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보이는 곳이었다.
유정이 잡목을 헤치고 한 참 들어가자 바위가 나타났다.
거의 집 정도 크기의 검은색 바위였는데 주변에 습기가 많은 듯 군데군데 이끼가 붙어있었다.
유정은 바위의 뾰족한 끝부분이 지면에 맞닿은 곳으로 가더니 합장을 하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홉 번 고개를 숙인 유정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바위 끝이 가리키는 땅을 손을 파헤쳤다.
부엽토라 그런지 땅은 쉽게 팔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땅을 헤치는 손길을 따라 30cm 정도 파고 들어가자 하얀 물체가 나타났다.
지난날 유정이 손자인 민준에게 전한 가문의 유산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는 법기(法器)였다.
손에 묻은 흙 털어내 유정은 품에서 일곱 가지 색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복주머니를 꺼내 법기를 담았다.
‘말씀대로라면 문제가 없을 테니 한시름 놓겠구나.’
복주머니는 시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법륜의 힘이 담긴 것이라 징조가 나타나더라도 법기에서 흘러나오는 영험한 기운을 차단될 것이라면 준 것이었다.
복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은 유정은 파헤쳐진 땅을 돋운 후 길을 따라 북한산에서 내려왔다.
유정은 지하철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이제 법기에 담긴 유산을 전하기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나는구나. 특출한 녀석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시아버지가 전한 것만으로는 불안했던 터라 그동안 나름대로 준비해 온 유정이었다.
특별한 손자인 만큼 자신이 준비해 둔 것을 잘 활용하리라 믿었기에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모처럼 만에 휴일을 맞았지만 외출한 유정 때문에 집에서 홀로 보낸 민준은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동안 틈틈이 사두었던 부품들로 여러 가지 장비들을 만들어 둔 데다가 새로운 컴퓨터도 들여놓은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쓸 만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확인해야 하니 이제 프로그램을 구동해 볼까?”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을 만들어 두었고 이번에 새로운 시스템에 설치한 터라 기대가 되었다.
위이이잉!
전원 버튼을 누르자 쿨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새로운 운영체제를 상징하는 로고가 나타났다.
그냥 멋으로 넣은 로고가 아니라 이전의 삶에서 민준이 운영하던 회사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로고가 지나가고 아이콘으로 구성된 화면이 보였다.
“제대로 된 것 같구나.”
민준은 세계를 최고라는 미라클 시스템의 운영체제를 월등히 뛰어넘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스러웠다.
이전의 삶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사용하던 운영체제와 맞먹는 성능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신속도만 해결하면 딱 좋은데 말이야.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 조금 나아지겠지.”
한국통신에서 코넷 서비스가 시작되어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진 상황이지만 통신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속도는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전용선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환기를 손봐 두었던 터라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대로 쓰다가 나중에 다시 만져 주면 될 거다.”
광통신과 광대역 통신망이 구축되면 모를까 머지않아 상용화될 초고속 인터넷도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손을 본다고 하더라도 성능이 향상되지 않기에 민준은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면 손을 쓰기로 했다.
“정보대로라면 환란이 끝나고 난 뒤 정부 주도 아래 IT 광풍이 불기 시작한다. 세 분의 죽음을 막고 미래를 위해서라면 닷컴 1세대가 출현하기 전에 준비를 잘해놔야 한다.”
민준은 지금까지 만들어 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 뿌리기 시작했는데 미리 손을 봤음에도 많이 늦었다.
더딘 작업에 속이 탔지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프로그램 배포 작업이 모두 끝난 후 정착하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정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점심은?”
“제가 알아서 챙겨 먹었어요.”
“저녁은 할미가 해주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라.”
“수제비 해 먹어요. 반죽은 제가 할게요.”
“알았다.”
“씻고 나오세요.”
유정이 씻으러 간 사이 민준은 밀가루를 꺼내 반죽을 한 후 숙성시키기 위해 냉장고에 넣었다.
유정은 간단하게 밑반찬과 겉절이를 만든 후 밴댕이와 멸치로 국물을 우려서 수제비를 끓였다.
그렇게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증권사에 다녀왔다.”
“확인하셨나 보네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죠?”
“대표이사라는 자가 우리를 따라서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서 우리가 전해준 투자정보를 빼내려고 했다는구나.”
“대표이사가 그러니 그냥 두기는 힘들 것 같네요. 할머니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전에 네가 말한 대로 할 생각이다.”
“정말 지분 전쟁으로 쫓아내시겠다고요?”
“그런 작자는 회사가 성장하는데 암적인 존재다. 준기라면 믿을 수 있어서 경영권을 확보한 후 맡겨보려고 한다.”
“하지만 유성 그룹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이번에는 연기금 쪽에서 유성 그룹 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게다.”
‘여러 방면으로 인맥을 구축해 놓았다는 것은 알지만 연기금까지 손을 쓰실 줄이야.’
민준은 재계 1위라는 유성 그룹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연기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새로운 세상이 찾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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