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보다 강인한.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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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유키나와 이영이 느낀 겨울의 베라는 도시 바깥처럼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떠나올 때와는 다르게 무거운 공기가 채워져 있다 느껴지는 것은, 완벽한 환경시스템의 쓸데없는 오지랖인 잿빛하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우선 황궁으로 향했다.
풍습에 따라 신혼부부는 각자의 본가에서 고루 며칠씩 머무른다. 그 순서는 신분이나 다른 것에 상관없이 부모의 나이가 많은 쪽, 즉 어르신이 있는 곳이 우선이다. 만약 황제가 외견처럼 실제로 젊었다면 유키나는 시댁부터 갔을 것이다.
“조금은 가라앉았을까...?”
자동운전 택시의 뒷좌석. 이영이 창밖을 주시했다.
무릎 위 한가득인 쇼핑백을 점검하던 유키나가 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세상의 여론? 아니면 황녀 전하? 어느 쪽?”
“둘 다. ...아냐... 아직은 이를까...”
지상 비행체의 공항을 겸하는 베라 제 2 우주항. 거기서 스쳤던 표정들이 아직도 어쩐지 스산했음은, 그 근무자는 아무래도 순혈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키나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우리끼리만 고민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오라버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아예 생각을 하지 말까? 그건 아니잖아.”
“너는 이제 관료도 무엇도 아냐. 명색이 황족인데 정부의 일에 나서 봐. 꼴만 우습지 않겠어?”
“하기야, 너는 군부의 일이라도 있지만 나는 그야말로 백수. 그럼 이대로 계속 무위도식... 아니, 아닐까.”
문득 짓궂은 웃음을 지은 그는 앉은 엉덩이를 앞뒤로 들썩이며,
“아하, 그럼 이제 이게 본업이 되는 건가...”
재빨리 구두를 벗은 유키나의 오른발이 그 옆구리를 걷어찼다. 차 안에 비명이 쩌렁 울렸다.
“아야야! ...이제 막 나간다?!”
“역시 구렁이 새끼를 키웠지!”
빨개진 가운데서도 씩씩거리는 그녀.
이영은 아픈 허리를 매만지며,
“농담이야, 농담. 하지만 처지가 붕 뜬 건 사실이잖아. 사직서도 네가 쓰라고 했으니 썼지만, 이제 와서 비서성에 돌아갈 수도 없는 거고. 다들 불편해할 테니까.”
아내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걱정 마. 놀고먹는 꼴을 봐줄 만큼 난 너그럽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가 갈 자리는 비서성은 아냐.”
“뭐야, 벌써 이야기가 끝난 건가? 그것도 나 몰래?”
“...어느 정도는...”
“뭔데? 가르쳐주지 않을래?”
낙하산도 달갑지 않지만 명예직은 하나마나다. 그 역시 부른 배나 두들기며 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조만간 오라버니가 부를 테니, 그때 직접 들어.”
“매정하네. 아직 비밀이란 게 있다니.”
그는 그녀 쪽으로 조금 당겨 앉으며 속삭였다.
“한 달 동안 화끈하게, 아니... 탄탄하게 쌓은 신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으휴, 이 바보...!”
옆구리를 꼬집어 거리를 벌린 그녀는 애써 반대편 창밖을 보며,
“일단 말이야, 그건 나 따위가 말할 게 아냐.”
“뭐야, 너 따위라니...”
이영은 몹시 의아했다.
로이엘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그녀는, 정계와 군부는 물론 여자라는 점에서도 모두 아샤르 넘버 투였다.
그런데 새삼 무슨 겸양일까.
“조만간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옅게 웃었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황궁의 공기도 아직은 다소 무거웠지만, 그들이 만난 황제는 생각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자식이... 얼굴이 그게 뭐냐?”
북궁에 찾아든 부부에게 인사를 받자마자 대뜸 돌아온 질문에, 의아한 이영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왕 네놈의 얼굴빛이 너무 좋아. 한 달이나 신혼여행이었는데도 말이야.”
황제는 쿡쿡 웃으며,
“신부는 몰라도 신랑은, 볼이 쑥 들어가고 얼굴에 검은 기가 좀 돌아야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시끄러운 정국인데, 싸구려긴 해도 눈 돌릴 이야깃거리 하나쯤은 만들어줄 생각이 없었냐.”
이어 황제는 우현왕을 바라보며,
“힘쓰는 건 그만둬. 황궁을 부술 셈이냐.”
“...이 멍청이가...!”
귓가가 새빨개진 그녀는 손에 쥔 영자력탄을 접어 감추었다. 순간 진심이 되었었다.
“놀릴 여유씩이나? 그동안 괜히 걱정했네요...!”
“반대로 생각해라. 이번에는 나도 맨 정신으로 버티기에는 나름 힘들다고. 너희는 좋았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황제에게 이영이 말했다.
“그동안 상황은 틈틈이 보았습니다만... 나라가 정말 시끄러웠더군요.”
황제는 허탈하고도 못마땅하게 웃으며,
“...제 버릇 개 못 준 격이긴 해도, 이번에는 일단 도움은 되니까... 고맙게 생각해야 하나?”
황제가 못마땅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이번 사태에서 황제의 지지파들이, 그 반대파들을 그야말로 악랄할 정도로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걱정했던 승부는 생각보다 쉽게 났다. 대신 그 앙금은 오래 갈 것이라, 이는 통합을 추구하는 황제에게는 불편하다.
그렇게 된 것은 지상의 특수성이 주된 원인이었다. 일단 황제의 지지파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상인들, 그 중 구 일본 및 남한 인구에 해당하는 2억 명 정도는, ‘일단은’ 소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경험자들이다.
‘나는 네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너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비록 출처는 불명이래도, 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정수를 설명하는 뛰어난 명언이다. 설령 비주류에 체제적으로 위험한 사상이라도, 생각만으로 그친다면 개인의 주의사상으로 인정함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각자의 사정은 그동안 이 소중한 원칙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잔혹한 동족전쟁과 분단대치로 인한 좌우파, 그리고 20세기 말의 경제 위기와 실패한 재분배 탓에 보수진보로 나뉘어 동족끼리 줄곧 싸워온 한국인들. 또한 태평양 전쟁 이후 패배적 열등감에 찌든 극우 민족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강력한 개인주의가 대립했던 일본인들.
그 덕인지 그동안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았음에도, 세상에는 자신과 다른 사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가볍게는 부모의 안부를 섞은 욕에, 최종적으로는 논리와는 상관없이 상대를 완전히 침묵시키지 않으면 쉬이 성에 차지 않아한다. 비록 입으로는 정의를 관철시킨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의 우월적 쾌감을 쉬이 얻고 싶은, 그런 소모적 문화가 판을 쳤었다.
물론 이제는 제법 달라져서, 로사의 관리를 받는 지드팃에 함부로 막말을 쓰는 것은, 아샤르에서 경제계급과 더불어 중대 기준인 인성척도(Personality measure)에 악영향을 준다.
이것은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공직 진출 및 재판에서 양형기준과 정상참작으로 인한 감형까지 관여되는 중요한 것이라, 덕분에 소위 악성 댓글이나 인격적 비난은 거의 없었다.
대신, 과거 행해왔던 주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을 잃어버렸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자신들이 그동안 문화적 계층적 인종적 열등감을 옅게나마 느낄 수밖에 없었던 순혈 아샤르인들이다.
그런데 황제를 옹호한다는 아주 단순한 수단만으로 모처럼 우위에 서서 이들을 비난하고, 그렇게 오랜 열등감을 잠시나마 해소할 이 좋은 찬스를 놓칠 이는 별로 없었다.
물론 순수하게 황제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조용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반면 목소리 큰 이들은 자기 몫 이상의 고성을 질러대어, 결국 지상인 세력은 순혈들을 쉼 없이 냉혈한으로 몰아붙이게 된 것이다.
그동안 다소 얕보았던 지상인 출신들이. 이번처럼 뭉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동안 깨닫지 못했지만, 이 지상인들이 실제로는 놀랄 정도로 큰 세력이 될 수 있음을 목도한 순혈들은 불쾌해 하면서도 움츠렸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지지파 덕에 황제가 승리한 셈이다. 하지만 결국 논리가 아닌 목소리로 승리한 셈이라, 황제는 이겨놓고도 뒷맛이 썼다.
또한 순혈들의 불만도 문제다. 뭣도 모르는 지상인 놈들이 그저 미소녀에 혹해서, 자신들이 겪어보지도 못했고 때문에 관여할 이유도 없는 문제에 주제도 모르고 쓸데없이 끼어든다.
아직까지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순혈들의 몫이 매우 크니, 지상인을 등에 업었던 황제 및 그를 지지한 황족들의 지배력에는 상당한 흠이 질 것이다.
“결국 이번 일로 나는, 그동안 깔아뒀던 지지파의 규모를 비로소 확인했지만, 대신 그동안 그렇게나 애써왔던 국민통합은 금이 제법 크게 가버렸어... 이거 참 기쁘고도 슬프도다...”
황제의 떪은 표정에 유키나도 쓴 입맛을 다시며,
“힘내세요.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그래. 그래도 악재만 있는 것이 아니지. 이제 너희들도 돌아왔고... 무엇보다 루이코의 출산이 코앞이니, 새 황족의 탄생으로 상당히 무마될 거라고 보고 있다. 그 까짓 거. 한 번 한 건데 두 번은 못하겠나...”
말은 그래도 또다시 고생을 예견한 듯 살짝 짜푸린 황제에게 이영이 물었다.
“황녀 전하는 어떻게 지내시는가요? 결코 기분 좋은 나날은 아니었을 텐데...”
잠시 우울했던 팔불출 아버지는 얼굴이 확 폈다.
“그런 것치고는 요즘 잘 먹고 잘 자. 얼마 전부터는 태사부 파견 교사와 공부중이야. 조만간 존호수여를 할 텐데, 감사 정도는 자기가 직접 아샤르어로 해야겠지.”
“그거 쉽지 않을 텐데요...”
이영은 아찔했다.
자기가 배울 때는 어순은 비슷한 반면 발음이 꽤 어려웠다. 영어가 모어인 로이엘에겐 더 힘들 것이다.
“다소 자랑이 되겠지만 머리는 좋은 편이야. 벌써 황궁 길은 다 외웠고 사람들 얼굴과 예절 습득도 빨라.”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다만 세리사에게는 아직 불편해. 일단 아직 어마마마... 그런 말은 제대로 못 해. 이해는 하지만...”
“...저희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유키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처럼 사온 선물이 팽개쳐지는 것은 아니겠죠?”
“뭘 그렇게까지... 설레발로 괜히 긁지 마라.”
얽힌 관계상 경계할 만하지만 다소 지나치다.
쓴 입맛을 다신 황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선물이라... 내 것은 뭐니?”
유키나는 슬쩍 코웃음을 쳤다.
“뭘 기대하는 거에요. 다 큰 어른이...”
이어 여장을 푼 후 저녁까지 휴식. 그리고 북궁에는 가족의 만찬이 차려져, 배가 잔뜩 부른 루이코까지 이동차를 타고 나왔다.
사실 이영은 꽤나 긴장했지만, 이미 서궁에 한 번 다녀온 유키나의 말로는 로이엘은 인사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그러니 당분간은 호의도 적의도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그저 세월이 흐르게 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부왕 전하. 잘 다녀오셨나요...?”
한 달밖에 안 되었음에도 황녀는 나름 적응한 듯, 표정도 동작도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그 여유에 이영도 내심 안도하며,
“네. 덕분에... 건강해보이셔서 기쁩니다. 황녀전하...”
“...감사합니다...”
정중은 해도 매우 가라앉은 목소리.
하지만 아빠와 나는 이렇게 고생중인데 너희들은 팔자 참 좋다... 라고, 듣기에 따라서는 또 묘하다.
물론 내 착각이길 바란다.
“자, 식기 전에 들자고.”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느끼는, 옅게나마 드리운 무거운 공기를 흩으려는 듯 황제가 재빨리 자리를 권했다.
전채 요리가 한 바퀴 돌았다.
“이제야 모든 가족이 모였다. 각자의 길을 가지만 때때로 모이는 것, ...이게 참 오랫동안 힘들었지.”
황제의 말에 몇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우리 사회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음은 가족이 제일이다. 오늘 이 자리는 그 확인이 되길 바란다.”
잠시 감회에 젖었던 그가 물었다.
“유키나는 앞으로의 일정이 어찌 되더라?”
“3일은 여기서 쉬고, 시댁으로 가서 역시 3일요.”
“알았다. 식사 후 다른 이들은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부왕은 나중에 부를 테니 북궁 후원으로 오라.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되도록 편한 차림으로.”
대답하는 이영은 내심 숨을 삼켰고, 그런 그를 로이엘이 흘낏 바라보았지만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약간 수다는 떨었지만 임부가 힘들어해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리사를 따라 서궁에 간 유키나를 배웅하고, 주어진 거처에서 목욕까지 모두 마친 후 시녀의 안내를 받아 이영이 도착한 곳은 작은 정자였다.
북극이라는 고립된 지역에, 또한 면적이 제한된 공중도시문명인 아샤르는 드넓은 자연 대신 알차게 즐길 수 있는 인공 환경이 발달했다. 그 일환인 정자의 용도는 티타임 혹은 소수 인원의 편한 대화다.
그에 걸맞게 황제도 이영처럼 파자마를 간신히 벗어난 실내복. 그야말로 예의를 잃지 않는 수준의 편함이다.
그가 기대어 있던 의자는 누워도 앉아도 되는 것으로, 작은 탁자를 사이에 놓은 건너편은 이영의 자리였다.
권하는 대로 이영이 몸을 기대자 황제는 쓰게 웃으며,
“편히 있어. 그리고... 이거 참 멋진 선물이군.”
식사 후의 재촉에 유키나가 마지못해 내놓은 선물은, 오키나와의 명물인 이리오모테 삵이 양각된 싸구려 열쇠고리였다.
정말 최소한의 성의로, 그 고리에 손가락을 넣어 돌리는 황제를 보며 이영은 쿡쿡 웃었다.
“혹시 불만이 있으셔도, 그건 자업자득이십니다.”
“어째서 자업자득이라는 거지?”
“사실은... 원래는 아주 훌륭한 다른 선물도 있었습니다만, 유키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걸 사더라구요. ...그 장난꾸러기... 그동안의 울화를 푼답시고 아마 뭔가로 우릴 놀릴 테니, 그 때는 이것으로 족해... 라고요.”
한 방 맞았다. 입맛을 다신 황제는 은근히,
“...네 아내는 뒤끝이 있다. 앞으로 조심해라.”
“항상 조심하고 있어요.”
“하지만 말이야... 명색이 아내인데 약간의 장난조차 칠 수 없다니, 그거 참 불행한 인생이로고...”
“약간 정도는 칠 수 있습니다. 그러는 폐하는요?”
그 황후가 상대라면 아무래도 상상하기 힘들다.
“임신 전에는 루이코가 두 배로 받았지. 음하하.”
지금 누구보다 행복할 그녀가 문득 가련해졌다.
“자, 일단 한 잔 받으라.”
건네는 술잔을 이영이 공손히 받자, 이윽고 황제는 언어를 한국어로 갑자기 바꾸었다. 이건 배려일 것이다.
“너도 이제 내 가족이자 형제다. 그러니 둘만 있을 경우에는 편하게 이야기하자. 알겠나?”
“감사합니다.”
“신혼여행은 재미있었냐.”
“네. ...여행은 아니었지만요.”
역시 환경 탓에, 아샤르에서는 외국으로의 신혼여행이란 개념은 없었다, 외국으로 가려고 해도 유키나의 의전 지위는 국가원수니 명백히 민폐며, 우주가 있다 해도 그녀의 남모르는 공포증이 있다.
별 수 없이 그들은 남부관광특구의 황실 별궁을 택해야 했다. 물론 신혼부부가 못 놀리는 없었다.
“아까는 네 얼굴만 이야기했지만, 실은 유키나의 얼굴도 같이 보았었다. ...그 아이를 웃게 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평생을 들여 노력하겠습니다.”
흡족히 웃은 황제는 잠깐 기지개를 켠 후,
“자, 밤은 길지만 이야기도 길 테니 슬슬 시작할까. 오늘 널 부른 이유를 알고 있느냐?”
“...유키나가 폐하께 요청했다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비에르 경처럼 측근밖에 알지 못했다는, 세계변혁과 그를 위한 세계정부로의 길 등... 앞으로 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을 가르쳐주실 거라고요..”
“맞아. 지금이야 죽고 못 살아도 그땐 언제 깨질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이제는 걱정 없고.... 그동안 지켜본 네 용기, 충성심과 헌신, 그리고 개인 욕심이 없다는 점에서, 자격 요건은 그럭저럭 갖추었다 본다.”
황제는 이영 쪽으로 몸을 조금 숙이며,
“다만 이건 기밀 중의 기밀이니, 누설되지 않도록 반드시 주의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황제는 서로의 비운 술잔에 손수 잔을 채우며,
“그럼 내가 그동안 세상에서 한 일... 뭐가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지, 말해보겠나?”
“그럼... 일단 물질적 지원이죠. 식량과 의약품, 선진적인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같은 거죠.”
비록 지구 수준에 맞춘 다운그레이드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손쉽게 오염수를 정화하고 식량과 전기를 생산하니 생활에 큰 보탬이다.
“그리고... 유엔 가입국 사이의 교전을 우주를 미끼로 막으셨고, 또한 이번에 약간이지만 우주함대도 양도... 이것만으로 본다면 폐하께서는, 명백히 지구에 호의를 가지시고 그 삶을 개선시키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가디언즈는 물론, 아직 상당수의 사람들이 나와 아샤르를 의심한다. 이 모든 것은 점진적인 잠식, 그를 위한 포석이라고.”
“그래도 세계의 안정은 아샤르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수니, 딱히 의심할 거리는 아니잖아요.”
익히 알려진 대의명분이고 이걸 의심하는 자가 나쁘다, 이영은 그리 생각했다. 허나 황제는 검지를 들어,
“그 의심이 사실 일리가 있어. 전쟁에 이긴 주제에, 또 세상이 요청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것저것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칼스 저 자식이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런 의문은 누구나 가질 텐데...”
황제는 몹시 음흉하게 웃으며,
“그럼 지구 여러분의 수긍을 살 수 있게 행동해 드리면 어떨까.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상을 지원하지. 그리고 한 줌 기술이나 자원을 얻겠다고 내게 앞 다투어 고개를 숙이거나,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면 어떨까. ...그거 참 기분 째지겠다, 그치?”
갑자기 바뀐 말투에 조금 멍한 이영을 향해, 황제는 동의를 구하듯 어깨를 으쓱대며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이냐. 자고로 구경이라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최고고, 또 싸움이라면 역시 쪼렙에 조빱들 싸움 구경 아니냐. 그렇지 않아?”
아무리 편하게 이야기한다지만 무척 천박함에, 순간 이영은 참지 못하고 푸하 웃고 말았다. 하지만 문득 보인 황제의 정색에, 서로의 웃음은 빠르게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빠른 사과에 황제는 손을 흔들며,
“괜찮아. 하지만 봐라. 우리가 당연한 듯 살아온 현실이란, 또한 이리도 비웃음의 여지를 남겨주는 허술한 것이 아니냐. 또한, 설령 앞으로 아샤르가 절대적 패권의 길을 걷는다 해도, 지구권 국가들과 사람들이 그걸 비난할 자격은 없어. 왜냐, 지금껏 그들도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게 당연했으니까.”
이영은 열심히 반론할 거리를 찾았지만 쉬이 찾지 못했다. 다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던 황제는,
“하고 싶은 말은 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겠지? 적자생존, 승자독식.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원시를 탈출했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그늘에 가려 있으니까.”
죽기 전에 쳐라, 가지고 있을 때 더 가져라.
그건 만물의 영장이자 최고의 지성체인 인간조차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연의 생존법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어렵사리 문명이란 기적을 이뤄낸 지성체가 만든,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웃긴 현실이다... 그렇게 느낀 것이 현재의 내 계획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첫 동기는 내 개인적인 것이었지. 혹시 내가 소년 시절, 지상에 내려갔던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
“며칠 전에 유키나가 말해주었어요.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녀가 말해준 것들은 아마도 이 때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싶다.
“그래. 그 때 나는 짧은 기간 지상을 맛보고 그 아픔도 느낀 후, 엄연히 우리의 형제이자 인간이지만, 또한 짐승처럼 사는 이들의 구제책을 고민했다. 하지만 정치적 실권이 제한된 현왕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름 고민도 하고 공부회에 의제로 내놓긴 했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어. 불간섭원칙은 그만큼 강력한 금제였거든.”
하지만 의욕만은 꺾이지 않은 그는, 대신 지상인에 대한 새롭고도 편견이 덜한 정의를 내리고, 또한 은밀하게나마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법안 정도는 일생을 걸고 통과시킬 생각이었다.
“여기까진 일단은 동정심이었다. ...그런데 제국 내전이 터졌고, 나 역시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지. 만약 봉인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나는 국가의 수습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그 대신 마음먹었던 일은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인령은 비극인 동시에 귀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상처 입은 나라는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으나, 선황이 판단하기에는 칼스와 세리사 모두 개인적으로 지쳐 있어 흔들리는 나라와 같이 무너질 공산도 있었다.
때문에 선황은 딸에게는 기회를, 칼스에게도 휴식으로 안정을 찾을 시간을 준 것이다.
“생각 이상 세월이 흘러버림은 무척 아쉽고 후회가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지. 그렇게 되어...”
황제가 팔찌를 조정하자 이영의 팔찌도 연동하여, 반짝이는 화면을 똑같이 송출했다.
아마 지구를 형상화한 듯한 그 표지 도안을 바라보는 이영을 향해, 묘한 자부심과 허탈함을 섞은 쓴웃음으로 황제가 다시 말했다.
“내가 세운 기본 뼈대 위에, 지구 귀환 이후 내 측근들이 살을 붙여 만들어낸 것. 젊은 시절의 마냥 동정심이 아닌,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 나와 아샤르는 무엇을 노려야 하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것을 정리한 이것이 바로...”
황제는 잠시 숨을 삼켰다 이어 길게 뱉으며,
“이른바 리어스(Re Earth) 플랜이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한 때 일개 장의 제목이었던 것이, 이 글의 제목으로 승격된 셈이죠.
다음 장에 나오지만 리어스 플랜의 정식 이름은
Request for Evolution : Education, Aid, Responsibility, Table, Healing.
즉 진화를 위한 요소 : 교육, 지원, 책무, 자리, 치유의 머릿글의 조합입니다.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과정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의는 무엇인지, 이것을 황제와 이영의 대담을 통해 선보이는 것이 2장의 주 내용입니다.
읽기에 어렵고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잘 전달되길 바랍니다. ...뭐, 기꺼이 그러실 수 있는 독자만 지금 남아 있다고 생각하렵니다.
다음 파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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