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대탈출(중). (5)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Ⅴ
“자꾸 보면 정겨워져야 하는데... 날마다 새로운 얼굴이니 그렇지를 않네. 좀 고정시켜 나오면 안 되나?”
또다시 서로 만난 전장. 고개를 꼰 황제에게, 이번에는 재규어의 얼굴로 코샤프가 맞장구쳤다.
“정 떨어지긴 피차일반이죠.”
코샤프는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그래도 어제는 그저께보다 상당히 더 버텼습니다.”
“아무래도 이만큼 죽다보면 요령이 생기는 걸까? 그런데, 아무리 죽어도 바보만큼은 낫질 않는군 그래.”
“왜 제가 바보입니까?”
“최소한 전법은 바꿔서 와라. 이제껏 너는 고양이과 짐승으로만 나타났잖아. 그럼 엄폐에 이은 기습이 주력일 텐데, 왜 승산도 없는 정면대결만 고집하는 거냐?”
“기습을 한다 한들 그게 먹힐 상대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정면대결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이번엔 또 어떤 기술로 절 죽일지, 나름 공부도 기대도 된다고요..”
“함부로 기술을 보였다간 다음에는 나를 향하겠군. 이제부터는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 독학이나 하라고. 수업료 한 푼 내지도 않는 주제에 염치를 알아야지.”
못마땅한 혀를 찬 황제. 코샤프도 마찬가지로,
“하시는 김에 좀 더 쓰시지. 인심 참 고약하군요. 인간들에게는 펑펑 쓰시면서?”
“하루 놀면 하루 굶는 야생에서 살았던 주제에 공짜를 좋아하지는 말라고. 그리고 적과 아군은 구분해라.”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아쉬운 입맛을 다시던 코샤프가 문득 화색으로,
“그럼 오늘 제가 얼마나 견딜지, 내기 한번 할까요?”
“내기는 판돈이 있어야지? 내가 이기면 뭘 줄 거냐.”
“제 넘치는 사랑을 가득 담아, 한번 콱 깨물어드리는 건 어떨까요? 제가 지면 반대로 절 깨물어 주시고요. 아,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주셔도 됩니다.”
“...그냥 죽어라.”
황제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손을 뻗었다.
“...나, 나 죽는다아...!”
전장에서나 지를 비명. 하지만 그것은 침대에 갓 쓰러진 처녀에게서 터졌다.
체면불구 엎어진 황태녀에게 급히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며 당번병이 말했다.
“난리긴 난리인가 봐요.”
“남 일처럼 말하지 마. 너도 충분히 겪고 있잖아.”
딱 한 번 얼굴을 닦았을 뿐, 눈도 뜨지 못하고 다시 엎어진 채인 라피스가 배게 밑에서 웅얼댔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말이야, 밥은 먹고 잠은 자야, 뭘 하더라도 할 것 아냐? 그런데, 당최 저놈들이 놔주질 않잖아...!”
그녀는 짜증스럽게 물수건을 팽개쳤다.
“괴물이 힘을 다 쓰고 원래대로 돌아가는데 평균 3시간. 이제까지는 그것만 버티면 하루는 괜찮았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숫자는 확연히 줄어든 대신, 24시간이 모자라도록 계속 나타나잖아? 무슨 두더지야?”
다 자란 그녀는 아이처럼 몸부림쳤다.
“딱 다섯 시간, 아니 네 시간. 아냐. 세 시간 만이라도 좋아. 잠 잘 시간만 만들어 준다면 그 누구라도 좋아. 내 처녀라도 기꺼이 주겠어...!”
“아휴, 전하...!”
상관 따라 줄곧 졸린 눈을 참아왔던 동갑내기 당번병도, 이 말엔 기겁해 절로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여자끼리라도, 그리고 농담이셔도 그건 너무... 좀... 그렇잖아요?”
“...농담으로 들려?”
“...그럼 진짜에요...?!”
라피스는 한참 침묵하다,
“...아냐, 농담이라고 생각해줘. 어머니가 듣기라도 하시면, 분명히 내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을 거야.”
순간 흐른 식은땀을 아직 따뜻한 수건으로 닦던 당번병. 그녀를 보는 둥 마는 둥 라피스가 투덜댔다.
“...그나저나, 대체 저놈들은 종류가 얼마나 되는 거야? 이번에는 들소와 곰이 튀어나왔으니 다음에는 또 뭐가 나올까? 설마 온 세상 짐승들이 다 한 번씩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악몽이야...!”
나타났던 특이체는 모두가 과거 북미에 서식했던 짐승들이다. 전투력은 그 악어 및 돼지와 엇비슷했으나 특성은 각자 달랐다.
들소의 특이체는 기동력은 떨어졌지만 힘이 몹시 강했으며, 곰의 특이체는 그보다 힘은 다소 떨어졌지만 방어력이 높았다. 역시 근본이 되는 녀석들의 특성을 상당히 이어받는 모양이었다.
들소와 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그녀는 결국 새로 받은 무기까지 꺼내야 했다. 물론 이 정도 위급으로는 이제 아버지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마르욜라를 준 것이다.
처음 써보았지만 영아의 위력은 강력했다. 기본 기능은 힘의 증폭으로, 마르욜라가 추가해주는 영자력은 2천만 오드에 육박했다.
이것으로, 원래라면 패배했을 싸움이지만 도리어 압살해버렸다. 과연 그 세월 봉인까지 해 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막상 그걸 휘둘러야 할 사람이 지쳐버리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식사는 준비되었는데... 하셔야죠.”
“몰라. 지금은 그저 자고 싶을 뿐이야. 물론 배고파 죽겠지만... 그저 잠 좀...”
아마 이번에도 그리 길게 잘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황태녀는 다시금 애달프게 몸부림 쳤다.
“...안 먹어도 배부른, 그런 방법 좀 없을까. 누가 가르쳐준다면, 앞으로 1년은 그 망할 콩만 먹어도 된다고.”
부질없는 한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역시 잠들 수가 없겠지.”
역시 살짝 눈이 붉어진 아버지의 통신이었다.
급히 일어난 딸이 물었다.
“안 주무세요?”
“서로 빤한 대답이나 할 것 같구나. 그럼 이야기나 나누는 게 낫겠지. 그리고 말할 것도 있고.”
당번병을 내보내고 둘만 남았다. 황제는 콧잔등을 어루만지며 난처한 듯 웃었다.
“이건 아무래도 한 방 먹은 것 같아.”
“네? 무슨 뜻이죠?”
“코샤프가 죽기 직전 말했던, 놈들의 앞으로의 전술 말이다. 힘이 강한 특이체, 그 하나의 힘은 너와 비등한 정도야. 이것으로는 나나 네 어머니, 네 고모네 일가를 칠 수는 없어. 네가 다소 문제였지만, 이젠 마르욜라를 갖고 있으니 2대 1 싸움까진 큰 무리는 없을 거다. 그러니, 설령 밀리는 곳이 있더라도 우리들이 가는 전장은 보통 승리한다. 그렇지?”
“...그렇겠죠.”
“하지만, 원래는 상당한 터울을 두고 일어나던 괴물의 일제봉기가, 그 때 이후부터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고 있어. 만약 석 달 내내 계속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우리들은 식사는커녕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을 거다. 이건 확실히 무서운 전술이야. 우리도 사람이니까...”
황제조차 이번엔 어깨를 조금 떨었다.
“잠시 겪었을 뿐이지만 코샤프 그 놈은 나름 유능하다. 충분히 생각할 만 해.”
“그럼 아쉬운 대로 함대와 교대를 하면...”
“특이체 상대로는 함대라도 큰 의미가 없지. 오히려 희생만 커질 걸...?”
“그럼 어떻게 하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정말 최후에나 써야 할 거야. 그러니 당분간은 너와 내가... 우리 모두가 고생할 수밖에 없겠구나.”
“...노력할게요.”
미안하다. 그 말이 자칫 불신이 될까 황제는 꿀꺽 삼켰다.
비밀 통신이지만 끼어드는 인물이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다.
“여어. 카프랑.”
역시 피곤에 절어 어두워진 얼굴의 소년이 인사했다.
“담소 중이신데 방해해서 매우 송구합니다.”
“괜찮다. 혹시 보고할 것이 있느냐.”
“네. 그런데 잠시만 기다리셔야겠습니다만...”
“음? 어째서?”
“통신을 걸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방금 어머니가 좀 바빠지셨습니다. ...보시렵니까?”
카프랑이 팔찌를 슬쩍 돌려 비춘 화면. 그것은 전투의 여파로 황량해진 말레이시아의 밀림 끝자락.
이어 비춰진 모습은 황제를 꽤나 놀라게 했다.
“뭐하냐...?! 혹시 프로레슬링?”
아들의 팔찌, 그 화면 너머 우현왕이 웃었다.
“아, 보시다시피, 겁도 없이 제게 기습을 걸어온 이 녀석을 제압하는 중이죠.”
그녀를 공격한 것은 아마도 곰의 변이체인 듯, 맹수의 머리에 인간을 닮은 몸. 하지만 이미 제압당해 쓰러진 녀석을 장렬히 깔고 앉은 그녀였다.
올라탄 여왕에게 허리가 역으로 꺾인 녀석이 포효 섞인 비명을 미친 듯 내질렀지만, 여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적은 고통스럽고 아군도 보기 괴로운, 그런 꼴사나운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와드득...! 인간의 신경을 크게도 긁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절명한 곰. 그 죽음을 확인한 유키나는 만족스레 웃으며 드디어 일어났다.
“음?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뭔가 문제라도?”
황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취미가 바뀐 거냐. 아니면 직업이 바뀐 거냐. 이 기회에 아예 그 쪽으로 나서보련?”
“설마요. 빨리 끝내려고 붙어서 싸우다 보니 어쩌다 이리 된 건데. 그런데, 생각보다는 꺾는 맛이 제법 있네요? 다음에 또 해봐야지.”
여전한 만족감의 여왕에게 황제가 빈정댔다.
“꺾는 맛은 있을지 몰라도 보기가 많이 추하다...?”
“무슨 말씀을. 이래봬도 나름 선심을 쓴 건데.”
“음? 무슨 뜻이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렇게 과부된 처지라도, 제 엉덩이에 깔려 죽고 싶은 녀석들이 아직 적지는 않다고 알고 있거든요?”
훨씬 어린 라피스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그녀는 여전히 미모와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다음 상대를 찾을 수 있을 터. 비록 음지에서긴 하지만 이런 저런 혼담이 몇 번 들어온 적도 있었다고, 황제도 그리 듣고 있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이 무려 유언으로 당부했음에도, 그녀는 전혀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렇듯 뭇 인간들이 탐하는 이 엉덩이에 깔려 죽었으니, 이건 굉장한 호사지요. 안 그래요?”
“아하하...”
절로 실소한 황제는 또한 조금 안도했다.
세월 따라, 그리고 슬픔 따라 좀 바뀌었나 싶더니 여전하다. 아직 그녀에겐 서로 웃던 밝음이 남아 있다.
이제는 원래의 말레이 곰으로 돌아간 사체를 괜히 툭툭 차보며 여왕이 말했다.
“참. 보고를 드릴 것은, 아마도 눈치는 채셨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릴까요?”
“적이 물량전, 소모전을 펼치고 있단 말이지. 우리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도록.”
“물론 대처법은 생각해 두셨겠죠?”
“하나 정도는. 하지만 효과를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는데다, 무엇보다 부작용이 좀 걱정이라...”
“오라버니의 처방전이 어디 평범한 적이나 있었나요. 대부분 극약 아니면 그놈의 장난 한 움큼은, 무조건 양념으로 털어 넣었잖아요?”
“죄도 안 되는 장난이 대부분이야. 그리고 독약도 쓰기 따라서는 나름 약도 되는 거고...”
“당하는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일단 됐어요. 그 방법이란 게 뭐죠? 들어나 볼까요?”
“통신으로 말할 거리는 아니다. 조만간 써야 할지도 모르니 이 건은 그 때...”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분명 또 엉뚱한 짓일 테지. 지겨워 죽겠어, 아주.”
“흥.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매번 나보다 더 앞장서는 주제에. 부디 이번만은 날뛰지나 마라.”
불의의 사건으로 잠시 끊기긴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마음을 맞춰왔던 역사는 어디 가지 않는다.
그를 증명하듯 과거처럼, 무거운 주제와 훈훈한 상호비방이 일사천리로 교환된다. 이 역시 황제를 내심 안도하게 만들었다.
잠시 깨졌던 결속은 어려움을 만나 다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사랑하는 가치이다. 그러니 비록 힘들지만, 그는 10년 만에 비로소 약간의 기쁨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 소모전에 대비한 방법, 그것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큰 벽이 있었다.
바로 로사다.
괴물의 공세가 이어진지 3일째. 피곤한 것은 황제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피난을 위해 도시로 모인 사람들은 절망이란 무게까지 더 껴안고 있었다.
피난 초기, 집결지로 정해진 도시로 오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시신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지구인 대부분은 팔찌를 차고 있어 생존 여부 정도는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대도시와 그 외각에는 난민 캠프가 차려졌지만, 몰려드는 사람 탓에 발 디딜 틈도 부족했다.
난민용 임시 텐트가 지급되었지만 그것으로는 태부족. 그나마 북반구는 여름이라 조금 나았지만 남반구는 한겨울의 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남의 집 마당은 물론 안채까지 무단으로 넘보거나, 텐트와 연료를 힘으로 강탈하거나, 배급되는 식량을 대놓고 빼돌리는 것은 이제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애교로 보이는 일도 넘쳐났다.
다수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하릴없이 불안과 절망, 분노로 가득찬 시간만 보내고 있다. 덕분에, 밝은 곳에서는 주정뱅이와 춤꾼. 으슥한 골목이면 마약과 싸움꾼이 몰려든다. 더 으슥한 곳이면 남녀의 겹쳐진 그림자와 쾌락의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합의된 사랑이 아닌 경우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구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드러난 것으로도 말세에 가까운 광경.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범죄와 그로 인한 혼란은 더욱 많았다. 인간이 모일수록, 그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도 모였다.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아샤르의 자동화 병기는 모조리 수비에 투입되어 어쩔 수 없이 인력으로 때워야 한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대에도 버거웠던 치안이니 지금은 오죽할까. 공백은 수없이 많았고 또한 커져만 갔다.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낸 짙은 어둠의 도시들. 그래도 그 곳을 향하는 행렬은 많았다. 화성으로 가는 수송선을 타기 위해 집결지로 모여드는 인간의 무리이다.
대도시라면 수송선 쪽이 모여든다. 하지만 중규모 도시라면, 비록 아샤르의 방어선 안에 있어도 수송선이 가기에는 애매한 지역이 많았다.
수송선의 수용인원은 척당 30만 명. 10만 규모의 도시가 3군데가 있다면 1척이 3번을 내려앉아야 하니 굉장한 시간 낭비다.
때문에 캠프가 차려진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보다 더 큰 도시로 다시 모여야 했다. 그것도 이 문명 시대에 거의 도보로 말이다.
문명이 멈춘 마당이니 대부분의 민간용 차량은 무용지물이다. 살아가기 위한 전력조차 빠듯한 마당에 연료용의 전기가 넉넉할 리 만무하다. 아샤르제도 수출용은 지구 인프라에 맞추어 역시 전기차이니, 이번에는 외계 문명의 기술조차 의미가 없다.
수많은 행렬들은 모두 크게 지쳐 있었다. 그 일부분인 이 행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8월로 접어드는 한여름. 미국 서부의 태양은 몹시 뜨겁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지만 덕분에 더위는 더 심하다.
수만에 이르는 행렬이 열을 이어 거대한 뱀과 같이 움직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낙오자가 늘어났고 빈사의 뱀은 토막이 났다.
그 낙오자 중 하나. 뜨거운 도로와 황량한 벌판을 살짝 벗어나 겨우 그늘을 찾은 가족.
가장이자 남편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아내에게 물었다.
“로라. 괜찮아요?”
“...괜찮아요. 엘리엇.”
땀을 뻘뻘 흘리던 아내는 조금 웃었다.
양산을 들고 앞으로는 이제 한 살이 간신히 된 아이를 아기띠에 묶어 멘 그녀는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버지의 무릎에 주저앉은 여자아이는 5세 정도. 스스로 걸을 수는 있지만 그뿐. 철지난 아기 띠에 묶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체온과 이동의 흔들림으로 상당히 지친 딸에게 소중한 자신의 물을 기꺼이 내준 아버지는 대신 팔찌를 열었다.
“4일 동안 대충 40마일... 이제 겨우 절반 왔네요.”
아이까지 달고 있어 오래 걸렸고 분명 앞으로는 더 느려진다.
늦는 것 이전에 무사히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인 남편에게 아내는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야 해요. 로스엔젤레스까지 가기만 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든...”
“그래야겠죠. ...하지만 식량이든 물이든 얼마나 버틸지... 그 때 배낭만 도둑맞지 않았어도...”
잃어버린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까지의 안정과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평소에는 차로 달리던 도로를 이번에는 걸어왔다. 속도가 느려진 만큼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어쩌다 차라도 지나가면 걸어가던 이들은 이를 막고 창문을 두들기고 태워달라며 사정했고, 개중에는 차창을 망치로 내려치는 이도 있었다. 그 꼴을 당하기 싫어 막는 사람을 그냥 치고 가는 자동차도 한 번은 보았다.
이 가족에겐 다행하게도, 다른 곳에서는 훨씬 심한 일도 많았다.
약탈을 당했는지 길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이 확정된 그를 돕는 이들은 없었다. 남자가 죽어가는 바로 옆에서, 사람들은 간신히 붙잡은 운전자를 마체테로 찍어 죽이고 차를 강탈했다.
물론 빼앗은 이도 언젠가는 똑같은 운명이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을 가졌음은 기존 세계에선 유리했지만, 지금 세상에는 그저 명을 재촉했다.
지옥도란 건 그저 상상만이 아닌, 이미 이 세상에 그려져 버렸다. 몇 병이나 마시고도 새로운 술병을 입에 댄 채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자도 있었고, 그들이 던진 병은 파편이 되어 이미 버려진 수많은 쓰레기의 일부가 되었다.
그 뿐이랴. 유독 큰 쓰레기 더미 옆 도랑에는 거꾸로 박힌 아이의 시신이 있었고, 또 어느 거리에선 자기 집 앞에서 더럽게 얼룩진 잠옷을 입은 채 앉아있는 미치광이 할머니가 피켓을 들고 있었다.
잉크가 아닌, 아마 자신의 피로 적은 듯 갈변된 글씨는 엉뚱하게도 신에게 간절히 구원을 비는 것이었다.
정부가 나태해지고 군대가 떠난 단지 그것만으로도, 평온과 풍요와 신용이 넘쳐나 보였던 인간 사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히 무너졌다.
물론 서로를 향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설령 역경이 깊더라도 사회 체제, 그리고 그것이 담보하는 상호신뢰가 모양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그 노력들도 아직은 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은 달라 무려 전쟁이며, 게다가 일반적인 전쟁도 아니다. 이를 악물고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나,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각오라도 있으면 신뢰는 몰라도 단결이라도 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그런 게 없다.
승리? 이미 아샤르가 포기한 길이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오직 피난, 도망일 뿐이다.
지켜야 할 것? 지켜왔던 영토와 재산은 곧 무로 돌아간다. 덕분에 전부 제 목숨 살리기 바쁘고 또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이런 저런 영웅이 민중 속에서도 나타났었다. 하지만 모처럼 인간성을 발휘한 수백 수천의 미담이 사람들의 마음에 잠시 온기를 더하더라도, 사실 그건 자신의 생존 확률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미담이래도 처음 들을 때나 좋을 뿐이지, 나중에는 왜 내겐 그런 영웅이나 행운이 없을까, 그런 자괴감이나 들 뿐이다.
게다가 그 본질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 중 상당수는 애써 헌신한 이에겐 나쁜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다. 남은 살리고 자신은 큰 손해를 보거나 최악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행, 미담, 희생은 점차 가치를 잃어갔다.
반면, 단 한 번의 흉악 범죄는 그 몇 배의 미담을 간단히 상쇄한다. 결정적으로, 이런 전시에는 철저한 이기심만이 자신의 생존 확률을 결정할 뿐이다.
그렇게 된 결과, 불과 몇 달 사이에 선행은 오히려 바보짓이 되어버렸다.
한번 황폐해진 들판은 이미 쓰레기와 잡초뿐. 그것이 지금 세상, 인간이 사는 현실이었다. 가족이 향하는 지금의 이 길도, 어쩌면 이미 바로 그 인간의 악의와 악행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이제껏 세금 잘 냈는데, 정부는 도움이 안 되네...”
더위와 피로에 칭얼대던 큰 딸을 달래던 남편도 이번엔 잠시 투덜댔다.
“언제 괴물이 나올지 모르는데 걸어가라니... 아무리 아샤르의 수비지역 안이라지만... 우리 군대도 파견되어 있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보이지도 않고...”
아샤르를 고생시키기 위해 일부러 상당 전력을 빼놓은, 자기들 지도자의 속셈을 그들이 알리는 없었다.
“...미안해요. 엘리엇.”
역시 지친 듯 심하게 칭얼대는 어린 아들에게, 젖병에 담긴 물을 먹이던 아내가 문득 말했다.
“그저 나 때문에... 다들 이런 고생을...”
그 침울함에도 웃음이 주어졌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로라. 뭘 새삼스럽게...”
“그래도...”
“뭐, 만약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기대야 하겠지만, 그럴 날이 오지는 않기를 부디 빌겠어요. ...당신은 가고 싶지 않고, 갈 수도 없는 길일 테니까...”
아내는 짙은 감사와 여전한 미안함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해요.”
“괜찮다니깐... 그나저나...”
남편은 다시 팔찌를 열었다. 뉴스는 귀중하다.
“역시 안 좋은 소식만 가득하네요. 풍문이라서 다 믿을 건 못되지만, 역시 일행이 너무 적어도 많아도, 그 어느 쪽이든 피하는 게 좋겠어요.”
지나치게 적다면 더 큰 집단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반대로 너무 많다면 그 집단 안의 누군가에게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이미 수많은 선례가 팔찌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부디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기를...
“슬슬 따라잡지 않으면... 그래도 우리가 있던 일행은 나름 괜찮았으니까, 가능한 한 묻어가는 편이 좋아요.”
“그래요. 가요.”
아버지는 딸을 안고 어머니는 아들을 업었다.
서로를 위로하고 지키려는 듯, 그들은 바싹 붙었다.
“...힘내요. 엘리엇.”
아내는 다시 조금 웃어보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쩍 힘을 얻은 남편이 앞선 걸음을 재촉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은 같았다.
밀어주고 당겨주고... 그렇게 살아온 우리들.
앞으로도 부디 이렇게만...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프로레슬러 전직도 괜찮은... (퍽)
그리고 이 가족은... 뭐, 긴말 안해도...
슬슬 400만자가 다가오네요.
나중에 다 쓰고 압축 겸 리마스터는 할 테지만...
아무튼 스스로 생각해도 길게도 쓴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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