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괴물(怪物)의 낙원 後 > 에필로그 : 진정 강해지는 법 (+ 작말후기)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증오하던 괴물이 아니었나.”
어째선지 찾아온 카프랑의 물음에도 스텔라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황족의, 상사의 접대용으로는 너무 초라한 보급 커피만 하릴없이 휘저었다.
역시 말없이 그녀의 손을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설령 그런 모습이었대도, 돌보고 따른 아이였대도... 원수가 아니었나. ...왜 슬퍼하는 거지?”
항상 명쾌했던 그녀의 대답은 아주 굼떴다.
“...슬퍼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난 그리 느꼈다. 자네는 다른가?”
“모르겠어요... 다만... 일시적인 패닉이겠죠.”
어쩐지 불만스런 상사의 표정에 그녀는 급히 말했다.
“그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잖아요?”
여전한 불만으로 쏘아보며 카프랑이 말했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자네에게 제대 권고를 내기 위해서다.”
그저 놀란 숨을 삼킨 그녀를 두고 그는 일어섰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뒷짐을 진 그는 굳어버린 그녀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그리 다짐했는데도, 또 정 따윌 줘버렸다. 나는 그리 들었다. 무슨 뜻일까, 지난 사흘, 줄곧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게 무엇일까? 무슨 뜻일까?”
대답은 없다. 그녀의 침묵은 그의 확신이 된다.
“생각해버렸다. ...평소의 자네가 주변을 대하던 태도는, 결국 의도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많은 것이 풀리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 차갑고 타인의 접근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데, 그런 주제에 자네 주변에 불행한 이가 없는데다, 스스로를 위험에 던지는 일을 마다않던... 그런 지난 모습이 말이다.”
느리지만 확고한 발걸음이 그녀 주변에 이어졌다.
“정 따윌 주면 전쟁은 못하겠지. 동료의, 부하의 죽음도 참기 힘들겠지. 때문에 가장 깊은 곳만은 다치지 않도록, 자신과 타인을 매번 잘라놓는다. 그게 자네의, 자네가 결정한 삶의 방식인 거야.”
순간 멈춘 발걸음 끝에 카프랑은 낮게 웃었다.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자넨 내 어머니를 닮았어. 그리고 그 이유도 이제는 알았다. 그게 무엇일까?”
여전히 대답은 없다. 카프랑은 독백하듯,
“부모를 잃고, 혈육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울고 있는 한 소녀가... 내 어머니 안에는 아직도 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자라면서 깨달았다. ...자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말했던, 부모를 잃고 그저 발버둥 치며 울고 있는... 아주 어린 스텔라가 그 안에 있음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그 아이가 더는 다치지 않고자 작은 손으로 열심히 쌓아온, 얼음의 벽도 말이다...”
카프랑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까지 껍질을 벗겼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칼질이다. 그야말로 회를 치고 토막을 내는 것...
하지만 할 것이다. 해야 한다.
“자네는 매사 차갑고 냉정하려 한다. 그래야 덜 다치고 덜 괴로우니까. 그 얼음장벽이 조금은 걸러줄 테니까. 나는 원래부터 저 사람에게 정이 없었다. 그러니 괜찮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거짓말하기 위해서...”
악물린 이 사이에서 흐르는 아주 약간의 신음.
칼질하는 이도, 당하는 이도 괴로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허나... 심장과 머리 사이에서 차츰 깊어지는 이 고랑은, 언젠가 자네는 물론 주변도 망가뜨릴 거다. 아무리 장벽으로 막아도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 장벽을 칠만큼 오히려 내성이 없는 자네는, 그 냉철함도 지혜도 언젠가는 빛이 바랠 거다. ...그러니 그리 되기 전에 내보내려는 것이다. 부디 내 뜻을 따라주겠나?”
“...그래서... 제가 틀렸다는 건가요.”
분노와 비참함에, 어느덧 잔뜩 상기된 뺨으로 스텔라가 격하게 항의했다.
“전하께서, 아니... 당신이 뭘 알아요? 업어주었던 아버지, 안아주었던 어머니. 행복하고 실컷 어리광부릴 수 있는 가정... 그 모두가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경험 해 봤어요? 재건의 때,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함부로 정 주면 이용할 생각만 다들 넘치는... 그런 세상 살아봤어요? ...왜 제가 틀렸다는 거에요?”
갈라진 목소리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유일한 혈육, 지미 그 애를 지키는 것도 제겐 벅차요. ...언젠가, 언젠가 놈들에게 복수하려면, 그 때까지 버티려면 아무리 쌓고 막아도 모자란다고요...!”
“날 웃기는 재주까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래.”
카프랑은 가시 돋친 웃음으로 답했다.
“모자란다고? 그런 주제에 아이를 돌보겠다 잘도 자청했네? 울루루에서 홀로 잘도 싸웠네? 언제 죽을지 모를 부하를 잘도 거느리고 그 녀석들을 변호했지? ...그래놓고 남 따윈 알게 뭐야? 이게 앞뒤가 맞다고 생각하나?”
가시는 뻗어서 이제는 칼로 변했다.
“그렇듯 숨겨둔 마음도 줄줄 새는, 그 따위 어설픈 장벽만 쌓아놓고 그 안에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결국 너는 그 작은 스텔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어. 내 부대엔 허약한 꼬맹이는 필요 없다. 당장 나가버려...!”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순간 커피 잔이 날아온다. 가뿐히 피한 카프랑은 옅게 웃었다.
뜻밖의 욕에 어이가 없는지, 아니면 예상한 반응이 돌아온 것에 대한 자찬인지.
그 웃음에 분노한 듯 스텔라는 더욱 소리 높였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사내새끼가 그저 순하기만 하고, 매번 속 깊은 척 웃기만 하고...! 그런 주제에... 주제에...”
“숨겨둔 네 마음을 감히 들여다보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너는 내 재능을, 나는 네 지위와 배경을.
그래서 때로는 대담하게, 때로는 솔직하게. 그렇게 모든 것을 계산해서 그의 바로 옆에 파고들었다.
그런 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지고, 그 주도권 역시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잠시 틈을 보인 사이, 그동안 내심 우습게 봐온 이 녀석에게 이리 아프게 찔렸다...!
난생 처음인 패배감과 부끄러움이 가슴 속 깊이 요동치고, 질끈 감은 눈 따라 그동안 잊었던 눈물이 어느덧 흐른다.
그렇게 신음하던 그녀를 파고들듯 다가온 발걸음 소리. 다시 뜬 눈에는 바로 코앞의 그가 들어온다.
“제발요...”
그녀는 아이가 매달리듯 그 가슴팍에 따라붙었다.
“아무리 아파도... 저는 복수를 해야 해요... 전하께서 걱정하시더라도 저는 다 참아내고,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러니...”
“여기 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그 웃음에서 희망을 찾은 스텔라. 어느덧 그 뺨의 눈물을 손을 들어 조금 닦은 남자가 말했다.
“지금에 와서 살가운 모습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랬다간 다들 널 의사에게 보내려고 야단일 테니. 허나 마음으로는, 그 깊은 족쇄는 좀 풀어버리는 거다. 정을 주고, 아끼고, 우애를 나누면 되는 거야. ...어떠냐...?”
무슨 상관이냐. 눈빛 속 반문에 그는 낮게 웃으며,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틀렸어. 강한 척 하면서 또한 차츰 무너지겠지. 그러니 그 괴리를, 널 무너뜨릴 원인을 해결하려면, 네 스스로 세상을 잘라내는 것만은 그만둬야 한다는 뜻이야.”
카프랑은 자신의 가슴팍을 조금 두들겼다.
“나는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러니 어머니가 사랑했던 아버지. 그 동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내 백부께서는 단연 최강자. 하지만 어릴 때부터 다짐해 오신, 모든 것을 걸어 지킬 것이 없었다면 그리 강해지진 못하셨을 터. ...그러니 너 역시 소중히 여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해. 끊기보다 이어야 해. 그게 불가능하다 답한다면, 네가 애걸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해도 쫓아낼 거다. ...어떠냐...?”
스텔라는 급히 소리쳤다.
“...제겐 지미가 있어요.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네 눈은 너무 밝고, 귀는 열렸으며 네 생각 이상으로 심장은 뜨겁다. 진정 동생만으로 족했다면 너는 요위를 돌보지 않았을 거다. 홀로 싸우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넌 했어. ...그러니 아직은 늦지 않았어.”
“...이 혹독한 전쟁에서 누군가에게 정을 주라니요... 그로써 앞으로도 수없이 울릴 마음 속 비명을 참고, 낫지도 않을 피멍 자국을 덮고... 싸우기까지 하라고요?”
마치 투정 같은 반문에 카프랑은 힘주어 답했다.
“얻었을 때는 애정으로, 잃었을 때는 추억으로. 내 백부의 말씀이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장차 수많은 이들을 잃어버릴 이 전쟁을 대할 내 지표이기도 하다. 어쩌면 네게도 지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떠냐?”
그녀는 오래 생각했다.
부대에 남는 것.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
숨겨 두었던 여린 소녀가 이 거친 세상을 살아나가는 법을... 그는 찾으라고 말한다.
...돕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해볼게요... 어렵겠지만요...”
비로소 얼굴을 든 그녀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
카프랑은 두 손을 뻗어 그 어깨를 격려하듯 두들겼다.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 사실은 누구나 하는 일이잖나. 서로 웃고 손을 내밀고... 말없이도 서로 아끼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나.”
그녀의 뇌리에 순간 떠오른 것.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듯, 네게도 손을 내밀어야지...”
그렇게 보드카를 권하던, 그 곰 같은 녀석의 얼굴.
스텔라는 다시금 고개를 떨어뜨렸다.
“...추태를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오히려 좋은 구경을 했다. 이렇게 눈물 콧물 흘리는 모습은, 남에게 말 못해도 내 오래 기억하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재빨리 눈물을 훔친 스텔라의 물음에, 비로소 등을 돌려 자리에 앉은 카프랑이 반문했다.
“뭔가?”
“정말... 해고하실 생각이셨어요?”
“글쎄...”
던져진 잔 대신 손수 새 커피를 타며 그가 말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빠르게 내 일상에 끼어들었다. 그러니...”
휘젓는 손이 아주 짧게,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설령 해고했더라도 많이 아쉬웠을 거다. 홀로 술 한 잔 마실 때는 가끔 떠올리기도 했겠지. 허나... 차츰 무너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 것보다는, 그저 어디선가 잘 살겠거니... 그리 생각하고 사는 게 차라리 낫지.”
“...제가, 전하께 그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까? 이리 걱정하시고... 지침을 던져주실 정도로...”
“조금은... 아니, 아니지...”
잔은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은 카프랑. 잠시의 망설임 끝에 그가 천천히 말했다.
“사실은 떠나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한 번 네 마음을 들여다본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더라고. 그러니 가능하다면 네가 받아들이고... 그렇게 당최 필 줄을 몰랐던 네가, 마침내 활짝 개화하는 것은 보고 싶었다.”
더욱 깊은 망설임 끝에 그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남게 된 지금, 장차 피어날 꽃이... 내 마음을 흔들 수 있을지도... 이젠 알고 싶어졌어.”
“...전하의... 마음...을요...?”
멍하니 생각하던 그녀가 순간 흠칫 물었다.
“지금 제가 이래저래 혼란스럽습니다만... 그래서 판단력이 엉망이지만 감히 묻는 것인데... ...설마...”
스스로도 어이없는, 또한 감히 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 같다.
카프랑이 탄식하듯 답했다.
“누님의 말이 맞았어. 나 역시 어딘가 나쁜 구석, 손댈 여지가 있어야... 비로소 누군가에 마음이 가나봐.”
그래도 나보다는 오래 살았다 이거지.
하지만 말하지는 않으련다. 그 누님은 분명 폭소로 의기양양할 테니.
스텔라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카프랑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다시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꽤나 떨린다.
“...제가, 지금... 대답을 드려야... 하나요?”
“아니. 하지 마라.”
살짝 더 들린 고개, 조금 더 놀란 스텔라에게 카프랑이 빙긋 웃어보였다.
“나에 대해서든 너 자신에 대해서든, 지금의 너는 제대로 된 평가 따윈 어렵겠지. 그러니 대답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닐 터, 그러니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어떤 대답이든 지금은 소용이 없다.”
이어질 질문에 답하듯 카프랑이 바로 말했다.
“나는... 내가 짊어진 무게를 잘 알고 있고, 이 짐을 지는 것만으로도 그다지 여유가 없다. 그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내 어머니와 같은 처지를... 그런 슬픈 운명을 내가 마음 준 이가 겪는 것은 싫다. ...그러니 인연은 가벼이 만들 수 없다, 그리 생각하며 이 전쟁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변화는 없어. ...알겠나?”
스텔라는 그저 끄덕였다.
그것이 수줍음일지, 실망일지, 아니면 답답함일지.
서로가 아직은 모를 것이다.
잠시의 침묵. 비로소 카프랑은 들었던 커피를 음미했다.
달고도 쓴... 이 마음을 그대로 닮았다.
“허나 염치없지만, 부디 하나만 부탁하고 싶다.”
말해도 될까.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기만과 거짓은 괴물의 몫으로 족하다.
“언젠가 한 사람쯤 더 얹어도 될 만큼 내 짐이 가벼워지고, 네가 모든 굴레를 끊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을 그 때. ...네가 내게 들려줄 그 대답은...”
그녀가 결코 잊지 못할 웃음으로, 그는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아무 미련도 없게, 지금껏 없었던 웃음으로, 부디 활짝 피어나 답해주길 바란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후기
괴물의 낙원... 이라고 두 권의 제목을 지었을 때, 처음 구상한 이야기는 이것과는 꽤 달랐어요.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제가 만든 아이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고, 저는 쓴웃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 못 이깁니다. 항상.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능, 도구, 아니면...?
그것을 잃어버린 자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그저 영원한 낙원인줄 알았던 세상은, 시련을 맞고 무너지며 갖은 괴물을 낳아냅니다. 이기적인 범죄자, 속 좁은 지도자, 그리고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증오하는 관계를요. 진짜 괴물의 낙원은 각자의 마음 속 어둠. 그 뜻으로 지은 제목입니다.
아이들은 제게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옮겨 적고 나니 저도 만족했습니다. 비록 듣느라 지쳤지만요.
하지만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리는... 게으르고 못된 아비는 다시금...(에라)
남은 권수는 예상으론 3권.
너무 오래 끌고 복잡한 이야기인데다 공백기도 잦았던, 조회수는 망하고 독자는 다 떠나가고 저는 아프고 그래서 힘도 속도도 그리 낼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만큼 온 이상 끝은 보아야겠죠.
다음 권 완성까진 한동안 못 뵙겠네요. 그래도 틈틈이 쓰겠습니다.
많진 않아도 이 긴 이야기를 따라오는 모든 분.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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