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변혁(變革)의 시대> 에필로그 : 변혁의 시대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전 세계의 갖은 카메라가 허공을 주시하는 가운데, 생방송이지만 침을 삼키는 소리가 취재진 속에서도 연발했다.
하늘을 가리고 태양마저 덮어버린 거대한 검은 물체가 하강한다.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초겨울 싸락눈이 떨어지듯 거대 도시는 차분히 내려앉았다.
개성의 절반 이상이 밀리고 그것도 모자라 서쪽으로 인접한 연안군까지 침범한 거대 기단부. 그 위에 직경 35㎞에 100조 톤, 강화도의 4배 면적의 거대한 물체를 영구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띄우는 이 광경에 입을 벌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2051년 7월 19일. 아샤르의 수도 도시인 베라 아샤르는 지난 6개월간의 공사를 마친 기단부에 착륙했다.
기단부 약 30cm 정도 위에 부유하는 중력제어기술로 인해, 베라 아샤르는 지진 등의 지각 변동에서 자유로우며 그 하중 역시 지반에 거의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수의 도개교가 놓아진 이제부터, 그 동안 비행정에 의존했던 통교도 활발해질 것이다.
강하는 베라만이 아니다. 조만간 동일본에서는 도쿄를 피한 동쪽, 지바 시와 아사히 시 사이의 산지를 전부 공지로 밀어버린 지역에 공중도시 에이츠가, 서일본에서는 교토와 오사카를 피해 북서쪽, 후나이 군의 산지를 파서 만든 기단부에 공중도시 라므가 강하한다.
이에 비하면 다른 도시들은 비교적 평지라 공사가 수월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총면적 수천㎢의 기반공사를 몇 군데나 동시에 진행하는 저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존 시가지를 부수고, 유적지를 옮기고, 아샤르 영토 전역에서 벌어질 국토 개발 사업, 그 목적은 뚜렷했다.
자연은 자연의 품으로 돌려준다. 인간은 완벽한 순환시스템을 가진 인공 환경에 모여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 자연은 집약농업을 바탕으로 한 보존에 나선다.
지구에 이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지만, 신영토만이라도 그동안 난개발에 시달린 각지의 자연을 정화시키고, 인간에게는 가장 편리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개발 계획의 골자다.
북한 기존 도시들은 재개발을 하나 새로 갈아엎으나 그게 그거인 수준. 때문에 보유하고 있는 건설 로봇 및 리파이너리의 절반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지난 6개월간 강행군의 공사를 해 왔다.
지금은 4개째의 신도시가 건설 중으로, 7개에 이르면 전 주민이 수용 가능할 정도가 될 것이다.
“잘못하면 로사가 힘들다고 파업하겠네요.”
비서승의 일인인 엔티오르 라이샤가 땀을 훔쳤다.
몇 개나 되는 화면에 둘러싸인 그녀는, 어제는 집에도 못 들어갔는지 화장이 그대로다.
“그 전에 제가 파업하고 싶습니다. ...죽겠네요...”
역시 눈알이 돌아가는 화면에 파묻혀 아비에르 리비가 말했다. 그녀 역시 이 몇 달, 계속해서 내무성과 협력해 로사와 기존 행정의 연계작업의 정리에 매달렸다.
엔티오르가 웃었다.
“아비에르 비서승도 죽는 소리를 하실 때가 있나요.”
“그래도 엔티오르 비서승께서는 말이나 통하는 기계들 상대지... 저는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 상대입니다.”
“어라. 그거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혹까지 달고 있으니...”
구석에 박혀 있던 이영은 뜨끔했다.
그 혹이란 건 설마... 가 아니라 나 맞겠지.
“숙제는 다 했나?”
물어오는 그녀는 이영의 개인교사나 진배없다.
“조금 남았어요.”
“후딱 해치우도록. ...그게 끝나면 저녁 공부다.”
“네. 네.”
“대답은 한번만...!”
좋은 스승이지만 잔소리가 심하다.
하지만 이 여자... 가짜 황제 짓을 하는 동안 내게 고개를 숙인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지금 내 주변 상황... 특히 여자 문제를 알게 되면 아주 기절초풍하려나.
아냐, 기절초풍은 우리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하겠군.
...그러니 당분간은 비밀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편 황제의 집무실에선 황제와 우현왕이 토론에 한창이었다.
선포 이후 근 한 달 도발은 없다. 오히려 별 쓸모도 없는 고변이 늘어났다.
과거 9.11 테러 직후, 평소 같으면 자신들이 했다고 주장했을 테러단체들이 오히려 서로 다른 이를 지목하며 발뺌하기 바빴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은밀한 외교 채널을 통해 별별 정보가 다 들어오고 있다.
대부분은 정크 정보였지만 걸러낼 필요는 있다. 이것 역시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우현왕이 물었다.
“행정이나 첩보는 구체제의 첩보기관을 유용한다 치고, 실제 전투 방면의 전력은 어찌 하실 건지... 친위기사 수를 늘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무리야. 단시간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가디언즈를 상대하기에는 힘보다도 숫자야.”
“그렇다고 새삼 능력자 부대를 만들 수는 없잖아요.”
“조금 생각하자. 별도 기관은 만들겠지만, 적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에는 과소도 문제지만 과대도 문제야. 아마 가디언즈도 이것을 노린 것이겠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정도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세계 각국도 깨달은 이상, 아마 쓸데없이 공포에 휩싸이게 되겠지.”
핵공격도 견뎌내는 만화 같은 인간이 실존한다. 그들은 졸지에 괴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제이낙은 물론, 우리가 직접 나서는 싸움은 최종적인 결정이 필요해. 일단은 그 정도로 하고...”
황제는 웃으며 물었다.
“너, 최근에는 얼굴이 조금 밝다. 이유가 뭐냐?”
“당연하죠. 신나게 두들겨줄 상대가 생긴 셈이데.”
그녀는 새침이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디언즈는 찝찝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적이잖아요.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아, 그래.”
...과연 그런가. 그런데 조금 미묘한데...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고 반대로 그녀는 움찔했다.
...안 들켰겠지?
틈을 주면 이 눈치 좋은 인간은 반드시 알아낼 거야.
돌아와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찼고 베개를 집어던졌다.
그래도 그동안 조금, 아니 열심히 생각한 후 얼마 전 녀석을 끌어내서 결론은 내어주었다.
...헤픈 인상은 안 주었겠지...?
밖으로 나가는 짧은 복도를 걷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뜨거운 뺨을 쓰다듬으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보자고 한 이유는 말이지...”
그 어디든 자칫하면 눈에 띈다. 결국 그녀가 그를 끌어낸 곳은 한밤중, 베라에서도 아주 외곽의 공원이었다. 서로 변장은 필수였다.
이영이 다짐했다.
“에... 저도 그러니까... 그냥 없었던 일로 용서해주시면, 저도 완전히 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눌러쓴 모자 아래, 그녀의 눈빛이 쏘아왔다.
“...그럴 거야?”
“그럴게요, 아니... 당연히 그래야죠.”
“이걸 믿어야 하나...”
못 미더운 시선에 그는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믿음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딱 한 명이 들어갈 공간을 애매하게 남겨두고,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다시 되새기니 이영은 무척 창피했다.
그녀는 훨씬 더하겠지.
그 때, 그녀는 오랫동안 서럽게도 눈물을 흘렸었고...
“...이제 됐어...”
자신의 가슴팍에 엎드린 그녀. 하지만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조금은 진정되었음에도 일어날 기미도 없다.
하기야 이해는 한다. 여전히 개나 닭일 터인 자기 앞에서 이렇게 울고불고...
아마 무지하게 쪽팔릴 테지.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이 수치를 달래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가슴팍의 머리가 물어왔다.
“...나, 많이 울었었나...”.
“별로... 그 긴 세월동안 참으신 것 치고는... 조금 더 하실래요?”
“...아니...”
간신히 고개를 든 그 얼굴은 눈물범벅에 벌겋다.
“덕분에 조금 편해졌어. ...감사를...”
“제가... 처음으로... 도움을 드린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난 빚은 싫다. 그러니 돌아가면 적당히 포상해주지.”
“상이라... 그럼 이번에 진 목숨 빚 탕감은 해주세요. ...안 될까요?”
어이없는 낮은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지어졌다.
“뻔뻔한 건 여전하구나. ...장사 한 번 잘하네.”
“갚을 기회가 있다면 확실히 갚아야죠. 이번처럼 큰 건수는 다시는 없을 테니까. 아니면 저는 전하께 빚쟁이로만 남을 판이니까...”
“...다시는?”
묘하게 말투에 섭섭함이 묻음에 의아한 그가 물었다.
“왜요...? 뭔가 문제라도...”
“내가... 다시 두려울 때는... 이제 어떻게 해...?”
무척 풀이 죽은 이 표정은, 역시 그냥 내버려두기 힘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그럼... 두려움이 심할 때는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미력한 위로나마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진짜?”
확인하는 그 표정은 묘한 희열이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요? 고작 말 몇 마디인데...”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거야.”
하기야, 그 자존심 안 건드리려면 부탁도 힘드려나.
“그리고 부탁이라... 그것도 빚이고, 공짜로 부려먹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럼 월급이나 팍팍 올려주실 겁니까?”
“...그건 너무 싸겠지. ...그러니.”
갑자기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에 그는 기겁했다.
“읍...!”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팔이 어깨를 꽉 누르고 있다. 몇 초 지난 후 그녀는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앞으로 네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제 괜찮다고 말해줄 것... ...이건 선금이야.”
“내 참...! 기껏 채무를 청산했더니...!”
기가 찼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 그럼 평생입니까?”
“...설마, 이것도 너무 싸다고 생각해...?”
울어서만은 아닌, 분명 수치를 참느라 붉어진 얼굴이 물어온다. 마찬가지인 그도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당연하죠...! 저는 오래 살 생각이니까요! 평생 값어치가 이거라면... 너무... 손해...잖아요...”
아직 남은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는 매우 당황했다.
“그럼 값을... 더 치러야 해?”
왠지 모를 억울함에 뱉어버리긴 했지만, 아무리 장난이라도 여기서 뭘 더 시킨다면, 오히려 못된 계산에 사람이 할 수 없는 무례다.
그러니, 이제 되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알았어... ...그럼 한 번 더 해줄게.”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다시금 덮어오는 감촉.
말도 못할 정도로 당혹한, 하지만 혼란한 머리와 엄청나게 뛰는 심장과 함께 그의 이성은 금방 날아갔다.
에라, 모르겠다...! 너도 원한 거다, 분명히...!
아니라도 이젠 할 수 없어...!
정신을 조금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자세는 역전에 없던 힘도 돌아왔다. 바닷물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은은한 체취와, 여름날 가벼운 옷감 아래로 느껴지는 생각 이상 탱탱한 체감이 이미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녀도 정신은 같이 없는 건지... 그리 적극적이진 않아도 마주 껴안아 오는 감촉과 고막을 뒤흔드는 낮은 신음, 그리고... 어느덧 파고든 입술과 정신없이 더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굉장히 부드럽고도 따뜻한 감촉에 다시 정신을 잃고...
열대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그들은 몇 번이고 모래에 뒹굴었다.
하지만,
짝! 하는 소리와 뺨에 느껴지는, 아주 따끔한 충격에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랍쇼...?
“너무해...!”
방금 뺨을 후려친, 아래에 깔린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낮게 외쳤다. 뭐가 너무하다는 걸까 싶었지만, 잠시 상황을 점검한 그는 대경실색했다.
아래에 깔린 그녀의 여름 티셔츠 안으로 파고든,
이 오른손에 쥐어진,.. 폭신폭신 말랑하고도 따뜻한 감촉의 정체는...
“우겍...!”
위험했다... 정도가 아니라 진짜 위험하다...! 허겁지겁 일어나 주저앉은 그는 멍한 머리를 두들겼다.
선금까진 좋았다 쳐도, 이건 중도금 넘어서서 아예 잔금 직전까지 간 셈이다.
“본의... 아니라면...”
“퍽이나...!”
약간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도 일어나 돌아앉았다. 아까보다 훨씬 뺨이 붉어졌다.
“...위험했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재빨리 바로잡은 그녀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과 얼굴을 정리하기 바빴다.
그는 재빨리 모래밭에 이마를 박았다.
잘못하면 손모가지, 아니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겠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러나 이내 의아함을 느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위험...?”
힘의 격차를 생각하면 위험은 개뿔.
그리고, 보통은 뭐하는 짓이냐, 네 이놈!
...그런 질책이 정상 아닌가...?
홱 돌아앉은 등에 대고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그럼... 옥체에 손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끄러워...!”
그 표정은 꼭 보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돌아가자. 르샤르를 부를게...”
한참 침묵하던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고 그는 어이없이 실소했다.
...악몽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달콤했고, 좋은 추억으로 남기에는 미래가 무척 걱정이다.
서늘한 등골과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을 달래며 그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이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한 것은 난생 처음이다.. 아무리 그 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대도 그렇지...”
그녀는 탄식했고 이영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저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어요.”
“책임이라. ...아레아지...?”
사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그녀도 눈치는 빤하다.
“네... 역시 책임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자칫 황제 폐하 옆으로 갈 수도 있고...”
“그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째서 단정하시죠?”
“너야말로 무슨 자신감이지?”
“...무슨 뜻이죠?”
“아레아가 너 싫다면 어찌 할 셈이었어...?”
“여전히 빚은 지는 셈이지만 대신 누이처럼 잘해주면 되는... 하지만 물어는 봐야 할 겁니다.”
“그만둬...”
“네? 어째서요?”
어쩐지 한심한 눈초리가 돌아온다.
“너, 아레아의 주변 신상은 알고 있니?”
“...그거야, 모친 생존에 언니 둘, 그 정도? 그런데요?”
“...진짜, 진짜로 너 바보네.”
“네?”
“그러니까 너, 아레아가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니?”
잠깐, 그러고 보니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여섯 소녀가 벌써... 가 아니고 여기서는 어른이잖아.
“설마... 있는 겁니까? 누군데요?”
“다섯 살 위다. 재무성의 견습이라고 하더군. ...봉인 전에도 있었으니 아직 안 헤어졌다면... 그대로겠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우리는 친척 자매야. 그러니 안 거고, 너도 임자 있는 사람에게 책임 운운해 봤자...”
“그래도... 저는 전혀 못 느꼈는데요...? ...그리고, 왜 말을 하지 않았죠?”
지금껏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난 번 연회 때, 아무래도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 그 느낌은 또 뭐냐.
“그 속은 모르지.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일단... 네가 끙끙대는 속셈을 아마 그 애도 모를 리는 없지만, 나중에 적절히 뒤통수를 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뒤통수요? 무슨 뒤통수?”
“생각해봐라. 네가 ‘가능하면 내가 너 책임질게’ 하는 그 때에, ‘죄송하지만 저는 사귀는 사람 있는데요.’ 라고 말해줄 그 순간은... 나름 재미있지 않겠어?”
“...이런 제길...!”
그게 진짜라면, 순진한 아기 고양이과인줄 알았더니, 아레아도 이 여자와 같은 여우과였냐!
일그러진 그 표정에 유키나는 낮게 웃었다.
“다른 경우도 있어. 네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는 바람에 말할 기회를 놓쳤겠지. 아마 아레아의 상대는 그 일을 모를 텐데... 네가 주변에서 알짱거리면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겠어? 그렇다고 속속들이 다 본 남자에게, 먼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는 아니잖아.”
“끄응...”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제 힘들다. 신음하는 그에게 여왕은 거듭 빈정거렸다.
“이 정도는 생각해야지, 이 바보야.”
“...황족 피는 한 쪽으로만 가는 것 맞죠?”
“그런데...?”
그는 문득 코웃음을 쳤다.
“만약 전자라면 반대 의견을 내놓는 논문이라도 써야 할 판입니다. 황족들은 모두 그 쪽이 외가죠? 아코르 공작가에 혹시 여우의 피가 흐르고 그게 황족 피에 영향을 줬다는... 잠깐, 그럼 황후마마는...”
“예외 없는 법칙은 있을 수 없다지만, 언니도 과거에는 나름... 아니다. 아무튼 꿈 깨. 괜히 더 다가갔다가 아레아의 상대에게 들키면 좋은 소리는 못 들어. 오라버니도 거부할 것이 빤하니 걱정할 이유도 없고...“
“...그럼 어떻게 할까요?”
“모르지. 그걸 내가 왜 생각해 줘?”
“...자칫 웃음거리 바보가 될 위기에서 건져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만... 아아, 이건 절망이네요.”
“...아레아에게 마음 있었니?”
여왕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는 힘없이 웃었다.
“뭐, 과분하게 좋은 아가씨였고... 하지만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언니 둘을 상대하는 것은 각오했습니다만 막상 본인이 그러면... 이제 지나간 이야기겠죠.”
“...난관이라...”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아무튼 오늘 한 이야기... 아레아에게도 실례니 덮어두도록... 그리고... 지난번 일도 탓하진 않겠어. ...딱히 네 책임만도 아니고...”
“별 일이시네요.”
솔직히 용서받기 힘들다 생각했다. 신분차이는 비교할 수도 없고, 그녀의 가치를 생각하면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공정하게 보는 거야. 하지만... 넌 그렇게 아무렇게나 손을 휘두르니? 사내놈들이란 정말... 건전 좋아하네.”
새침한 힐난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저만 탓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저 아닌 다른 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뭐...?”
“그 때의 전하는 실컷 울고 웃고... 아무튼 빈틈이 너무 많았어요... 여왕이 아닌 보통 여자였다고요...”
만인이 인정하는 미녀가 펑펑 울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걸 무감정으로 넘길 이는 극히 적겠지. 아니, 없을 거야!
그는 열심히 스스로를 변호했다.
“덕분에 졸지에 불량아가 되어버렸군요.”
“결국 틈을 보인 내 탓이다? ...뭔가 비겁하다...?”
“틈이라기보다 매력인 거죠. 좋은 변화인 겁니다.”
“...음? ...변화라고?”
“...이제부터의 세상은 꾸준히 변하겠죠. ...조금은 맞춰 변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더 이상은 우주함대의 싸움은 없을 것 같으니... 전하께서도 더는 우주로 나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바뀔 기회라면 기회니 활용해 보세요. 말씀드렸듯이 조금 더 웃는다면... 또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바보... 우주함대 훈련은? 그 때도 나가야 한다.”
“그러면 그 때는... 가시기 전에 미리, 가서도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좀 덜할 테니까... 받은 선금 값은 확실히 할 테니까요.”
“또 되새기게 하네, 바보...”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느 새 두 검지 끝이 꼬아졌다.
“...이왕 값을 치른 거니 확실히 해.”
이어진 다음 말은 무척 뜻밖이었다.
“...그리고, 혹시 더 이상을 노린다면... 좀 더 노력해야 할 거야. 최소한 바보는 좀 벗어나면 좋겠어...”
“...네?”
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숙여진 고개는 표정을 읽기 힘들다.
“모르겠다. 네가 스쳐지나가는 그런 이로 남을지... 아니면 네 이름에 존호가 붙을지는 또 모르지만...”
진정 바보처럼 입을 벌린 그를 두고 그녀는 거듭 탄식했다.
“아무튼 겪어보니 그리 나쁜 놈은 아니... 뭐, 일단 그럭저럭 쓸 만하니까. 물론 엄청 바보이긴 해도, 지금까지의 네 의지와 용기는 내 마음에 들 정도로는... 괜찮은 거라... 생...각해.”
“...저기... 혹시 그동안 남자에 굶주린 건 아니죠?”
옆으로 뻗어진 그녀의 발에 정강이가 차인다. 아픈 비명의 그에게 엄청난 쌍심지가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아니거든? ...무슨 생각인거야...! ...대체...”
“사실이 그렇잖아요. 저 따위... 전하께는 개나 닭이나 소잖아요?! 하지만 지금 발언은... 이건 가능성을 열어주신 겁니다...?!”
“변화가 필요하다며...? 그리 손해는 아니라 판단한 이상... 그리고 다른 이에게 기대하긴 당분간 불가능한 이상, ...해보려고는 한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쏘아보는 눈동자에 몸이 타버릴 것 같지만, 이건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뭐, 불만은 아니지만... 전 이제부터라도 오래,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엄청 가시밭길일 수도 있는데도... 걸으라 하시는군요...”
하지만 이미 그는 묘하게 들떠버렸다.
그래, 가시밭길 정도는 아닐 거다.
그렇지만 미친 척 걷다보면 그 끝에는, 비록 가시는 잔뜩 돋아 있어도 장미 정원이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에 잠겨 있자니, 묘하게 초조하면서도 또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물어온다.
“...싫으냐?”
“...싫진 않지만... 이건 자랑해야 할까요?”
“어디 가서 떠벌리면 죽일 거야...!”
“...안 합니다. ...뭐... 이러다가 다른 여자 만나면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안 죽여. 그건 네 마음이지. ...그리고 그 반대가 되어도 원망하긴 없기다. ...나도 일단은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녀는 다시 낮게 탄식했다.
“아직 눈에 안 차는 부분이 많지만, 기회는 한번 주는 거야. 대신, 눈에 안 차면 언제든지 걷어차 버릴 거야. 단지 그것뿐이라고...”
이영은 심장이 거듭 쿵쾅거렸다.
확실히 너무 과분한 기회. 하지만 이걸 걷어찬다면, 아마 그냥 바보에서 대폭 진화하여 역대최강바보의 타이틀을 거머쥘 것 같으니 그건 사양하고 싶고...
또한 이렇게 진지하게 물어오는 것을 거절했다가는, 모처럼 좋은 소리를 해준 그녀가 무척 난처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순간 그는 자책했다.
이런 바보 자식 같으니. 또 뭘 재고 있는 건가.
...그 동안 봐 왔잖아. 집요한 만큼 올곧고, 황제와 더불어 자기 목숨을 떼어 나를 수렁에서 건져준 사람이다. 개인의 고통을 그렇게 억눌러가며 살아왔을 정도로 그녀는 바른 사람이다.
못돼먹은 바보 그 자체인 네놈에게는 어쩌면 꼭 필요한... 그런 사람일 거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밝게 웃었다.
“당신의 변화에 어울리도록...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눈에 안 차는 점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세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호칭을 바꿔버렸다. 하지만 그녀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이 예전처럼... 스스로를 해치는 그런 가시를 세우면... 그건 그냥 두지 않을 거에요. 그건 참을 수 없으니까... 정말 참기 힘드니까...”
“참기 힘들다... 내가... 조금은 의미가 있는 걸까? 네게도...?”
“증거가 필요하시다면... 예전에 해주셨던 거, 돌려드릴까요?”
그가 심술궂게 입술을 조금 내밀자,
“바보... 그건 내가 손해라고 몇 번이나...!”
쥐어 비틀린 입술에서 아픔은 없었다.
“그럼 뭐, 잘 부탁해요. ...앞으로 노력해서, 어제보다 오늘을, 오늘보다 내일을 웃게 해 드릴 테니까, 부디...”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또한 웃었다.
“...그래... 언제든지...”
베라 상공, 머리 위에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그 이름의 뜻은 밤하늘, 그 존호는 혜성이다.
하지만 이름을 가져온 그 공간은 이미 크나큰 아픔.
그러니 언제쯤 소녀시절의 기대처럼, 나는 저 검은 공간을 혜성처럼 다시금 가로지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아파왔던 이 두려움을, 나와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이를 악물고 눌러왔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지만, 한편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은 욕망을 눌러오며, 그렇게 나 자신을 계속 속여 왔지.
하지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이 괴로움은... 설령 오라버니라도 해결해주지 못했겠지.
그러나 이상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하지만... 이 생각 없고 막무가내인, 첫 만남을 생각하면 후려갈겨도 모자랄 이 녀석의 몇 마디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어.
어쩌면 도둑질을 당했을 때부터 묘하게 의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내 부하를 살려준 그 땐 표현한 이상으로 녀석에게 감사했고, 또 비록 허접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이 놈은 앞뒤 가리지 않고 대신 죽어주려고 했다.
...조금은 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또한 나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하고, 힘들고 무서웠냐고 물어주는 것을 그동안 몹시도 기다렸을 거야.
그래서 그땐 그렇게 눈물을 참지 못했을 거야.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그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과 평화 역시... 어쩌면 그가 줄 수 있을지도...
어느덧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떨어졌던 거리는 꽤 가까워졌다.
그는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어디의 빌어먹을 복 받은 놈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아직은 조금 두렵다.
하지만 이미 증오를 벗어던지고 과거를 반성한 나는 조금은 달라졌다. 아마 그녀가 더는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 자부해도 좋을까.
이 변혁의 시대에 나는 어떤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될까. 아무리 먹고 사는 걱정이 줄어들어도 인간의 근심은 좀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이동될 뿐, 결코 줄어든다 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이미 결심했다. 나라 팔아먹은 놈이 되어버리겠지만, 아마 그 루이코... 차비도 그런 마음이겠지.
좀 덜 울고, 좀 더 웃는 세상, 직접 만들 수는 없어도 꾸준히 그 옆에서 보고 싶다고.
나는 네게, 오랜 세월 쌓아온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줄 거다. 그리고 너는 내게, 지금껏 없었던 안정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괜찮을 거야.
...고생길은 빤하겠지만, 원래는 언강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여자가 큰마음 먹고 기회를 주는데...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굉장한 미녀인 것과는 상관없이, 우는 모습에는 마음이 아팠고 붉어진 얼굴은... 꽤나 귀여우니까.
아니, 무척 예뻐.
하지만 아마 이 여자의 약점을 본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묘한 자부심과 호승심은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지난 번, 남태평양에서 꽤 짧은 반바지를 입고도 보이지 않았던, 허벅지 안쪽에 있다는 그 상처도 언젠가는 반드시 구경해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비로소 발견한... 비록 다른 반지와 함께이긴 하지만, 자신이 사준 싸구려 반지가 아직 끼워져 있는 그녀의 오른손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이미 마음 깊이 뚜렷하게 번지는 이 따뜻함을,
그는 오래도록 만끽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모 드라마(국산 아님)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죠.
“좋아하기로 마음먹는다고 해도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싫어한다고 작정한다고 해도 싫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대사를 생각하며 이번 장을 썼습니다. 엄청난 선물을 준 셈이지만, 그걸 공짜로 받도록 작가가 놔둘 것 같지는 또 않고... (훗;)
...그리고 아레아 지지파님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또 저 질문... 저 아이는 일단 성인이에요. 애인 정도는 있을 가능성은 아.무.도... 제시하지 않으심(ㅋㅋ)
조만간 (매우 긴) 2권 후기 및 간단 설문 올라갑니다. 이 권도 같이 달려오느라 고생하신 분들께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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