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괴물의 낙원 (7)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Ⅶ
“...결국은...”
모두를 내보낸 자리. 의자에 몸을 묻은 황제가 나지막이 신음했다.
“이런 것이었나. 녀석의 정체는...”
“네.”
로사도 착잡히 답했다.
“모든 부품은 지구제로 추정됩니다만, 형식만은 틀림없이 지령포집형(地靈捕集形) 인공 광체입니다. 즉, 지구 영자력인 지령을 흡수하여 축적하는... 그런 점에서는 앙킬리아와도 본질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별로 크지 않음에도 존재감을 발하는 검푸른 원기둥. 황제의 눈앞의 그것은 극히 단순하면서도 몹시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지난 4일 동안, 아마데우스 호수 인근을 전부 뒤져서 결국은 찾아낸 것이다.
“주(主) 광체 1기. 은폐 및 보조용의 작은 것이 3기. 이 대륙에 존재했던 네 마리 특이체의 정체일 테죠. 그리고 이들이 흡수한 이 땅의 영자력은 이 인공광체 안에서 뭉쳐, 끝내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겁니다.”
이는 곧, 사실상의 인공생명이다.
황제는 끄덕이며,
“그래서 본체는 움직일 수 없었구나. 아무도 모르게 지령을 꾸준히 흡수하려면 땅 속 깊이 있어야 했고, 대신 수족처럼 움직일 특이체와 변이체를 만든 거야.”
“맞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살아갈 진짜 육체를 갈구하게 되겠죠. ...마치 저 영아들처럼요.”
하나하나가 능력자지만 또한 잃어버린 육신을 갈구하는 망자들. 그러니 자신의 주인의 지배력이 약해지거나 지나치게 힘을 잃으면 결국 그 몸을 노린다.
궤멸전쟁의 모든 능력자는 서로 싸우던 적. 하지만 동족이자 형제이기도 했다.
그 광기와 슬픔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는, 거듭 찌푸린 로사에게 황제가 물었다.
“짐승에서 괴물로의 변이과정... 그걸 알아내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있겠나?”
“짧은 분석이지만, 지령을 사용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보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스스로의 한계 덕에 거리의 제약이 걸리긴 합니다만, 대신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이 지령을 통해 다양한 생물군에 힘을 불어넣어 괴물로 만들고 또한 조종한 것이죠.”
“그게... 가능한가?”
“이론상으로는요. 능력자가 영자집합체와 접속, 동화되어 현세에서 영자력을 이용하는 것처럼... 지령을 흡수하고 동화된 녀석은 마침내 지령에 간섭하는 능력이 생겼을 겁니다. 그리고 거꾸로 지령의 그물을 통해 자신의 힘이 닿는 지역의 생명체를 정신계 영자력으로 조종, 자신의 인형과 군단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영혼, 존엄 그 자체인 인간을 조종하는 것만은 불가능하겠지만, 훨씬 허약한 영혼인 짐승이라면 어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말할수록 난색을 보이던 로사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지령은 비록 아주 강력하지만 또한 지구 내엔 너무 흔하고...”
“그게 뿜어내는 영파 역시 너무 광범위하지.”
“맞습니다. 때문에 모든 영파탐지기는, 그냥은 잡음이나 다름없는 지령의 영파를 일부러 제외하도록 설계됩니다. 능력자의 탐지도 그리 훈련받고 고정됩니다. 즉, 숲 속에 숲이 숨었던 탓에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다.”
“...앞으로도 대처할 방법은 많지 않겠군.”
“네. 잡음에 불과한 지령까지 고려한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을 수신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 탐지의 정밀도는 포기하며 이는 능력자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선 역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 더. 녀석들은 짐승의 자아를 갖고 있었어. 이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인공광체의 제작에는 생명체의 광체가 그 기초로 필요합니다. 역시 아직은 추측이지만, 만약 능력자를 자체 보유하지 못한 누군가나 어떤 집단이 만들었다면, 인간 대신 짐승의 것을 사용했을 수 있겠죠.”
“...누군가라... 집단이라...”
황제는 분노 섞인 탄식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잡아야죠.”
로사는 불길한 원기둥을 눈짓했다.
“이제 괴물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한편, 전 지구를 탐색하며 이 인공광체들을 찾고 모조리 없애버립니다. 그것으로 괴물의 발생을 종식시키며, 더 나아가 그 배후를 찾는 겁니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네. 이것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자, 혹은 조직이 분명히 인류 안에 있습니다. 어설프지만 이 정도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어설퍼서 더욱 위험합니다. ...영아는 그렇다 쳐도, 영투함과 영기들도 원래는 인공광체. 때문에 일부러 사람으로 조종해 그 의지가 발현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 정도 대비가 아니라면 영자력 병기를 이리 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렇게 위험하고 무지한 짓을 하다뇨.”
그녀는 분노했고 또한 슬퍼했다.
동료를 앗아가고 괴로운 추억만 남기고, 무엇보다 고향을 파괴한 궤멸전쟁의 모든 것이, 그녀에겐 여전히 혐오와 아픔일 뿐이다.
그래서 퇴보시켰다. 이런 칼은 다시 쥐어선 안 된다. 사소한 욕심조차 거대한 파멸에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 가디언즈와 비교하면 이들은 분명 어설픕니다. 아마 머리도 조심성도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탐욕스럽고, 또 눈앞의 이익에 눈멀고, ...보다 악독할 겁니다. 그리고 지난 15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평범한 이들 속에 섞여 선량한 얼굴로 살아가고, 때로는 욕심과 이기심과 그릇된 증오를 포섭하고, 때로는 우리의 등을 노릴 지혜를 짜내왔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지난 세월, 피난처를 넘어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된 화성에서... 모르는 사이 우리는 진짜 괴물을 키워왔을지도 모르겠구나. ”
황제는 아주 아프게 웃었다.
“진짜 괴물의 낙원은 이 지구가 아니라, 일견 평화로웠던 저 화성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괴물을 상대해야 하겠죠. 그것도 우리 앞이 아닌 뒤에서 이빨을 감춘 이들을...”
“그렇다면 찾고, 싸운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황제가 선언했다.
“다시금 세상에 인간의 땅을 세운다. ...세울 것이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로사가 물러간 후, 밝은 방이지만 어두운 적막이 남았다.
황제는 한동안 뚫어져라, 적으로는 허무하지만 또한 의미 깊은...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산물을 바라보았다.
“...그랬던 것이냐...‘
깊이 숙인 그 등에 비탄이 흘렀다.
“...그랬던 것이냐. ...나의... 나의...”
차마 나오지 못하고 곱씹힌 이름이었다.
4일 전의 전투에서 도살부대의 희생자는 총 7명, 민간인 사망자도 20여 인에 달했다.
그나마 전투가 벌어진 시간은 최대 10분 남짓으로, 덕분에 도살자 및 대부분의 장비가 무사했음은 다행이다.
게다가 비록 부대 외적 존재이지만, 아샤르에서 황족이 무려 셋이나 내려왔다. 세리사오르조차 주저앉히기 충분할, 그 이름값은 분명 크디큰 플러스 요인이다.
하지만 분명 승리했음에도, 도살부대는 예전만큼 들뜨진 못했다.
영투함과 영기로 무장해 그동안 때려잡기만 했던 괴물들. 그래서 얕보았고 의기양양했었다.
하지만 이번의 그들은 머리를 쓰고 상황을 이용했으며 기회를 노렸다. 황제 일가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역시 세상은, 실전은 상상이나 영화, 소설 같지 않았다. 절대무적과 끝없는 행운과 용기는 없다. 언제든지 나부터 당하고 죽을 수 있는 전장일 뿐이다.
아무리 강한 힘이 생겼어도 그들은, 그동안 철없이 꿈꾸던 영웅과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저 나약한 엑스트라이자 잡졸일 뿐이다.
자존심이 다친 그 덕일 것이다. 수용한, 사실은 구속한 민간인들에게 가장 심한 비난을 쏟은 이들이, 바로 그들을 잡은 도살부대였다.
“...저런 놈들을 구하느라 이 고생을 했단 말이지?”
그동안 두더지라 은근히 멸시했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죄인 취급이다.
처음에는 불편한 표정으로 반발하던 원주민들도, 몇 배에 달하는 군인들의 적대감에 공포와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주민들을 모으라는 사령관의 지시가 떨어진 것은 4월 17일의 일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면담과 조사가 이어졌고 곧 대대적인 이송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끝이 엄중한 재판정, 그리고 차디찬 감옥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그를 풀 대상을 찾느라 잔뜩 예민한 이들이 넓은 대지에 모여 앉았다.
멀리서 그들을 태울 수송선이 한 척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타난 이. 그 모습을 본 주민들은 물론 군인들도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지금부터 그대들을 화성으로 이송한다.”
허공에 부유한, 모두가 볼 수 있는 황제가 선언했다.
“다만 그대들 모두에게 아샤르 시민권을 발동, 향후 5년간 별도의 도시에 수용한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든 남든, 그대들 마음대로 하라. ...또한.”
이어진 말은 공기를 경악으로 물들였다.
“이 사건에 대한 모든 기록은 말소한다. 그대들의 행적도, 행위도 남지 않을 것이다. 도살부대에도 인류연합군 총사령부의 이름으로 함구령을 내린다. 그 누구도 이후의 언급을 금지하며, 어길 경우 엄벌할 것이다.”
군인들, 그리고 죄인들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본다.
누군가는 탄식하고, 누군가는 훌쩍인다.
“...이게 말이 되나...?”
군인의 무리. 누군가의 아주 작은 내뱉음이 이내 웅성임으로 바뀐다.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할 말 있으면 크게 해라. 군인답지 못하다.”
그래도 감히 말하는 이는 없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들, 그 중 하나를 지목하며 황제가 말했다.
“거기. 답해봐라. 짐의 조치가 불만인가...?”
나는 아니라고 서로 옆구리를 찔렀지만, 결국 자신이 지목받음을 안 청년이 주춤하며 대답했다.
“...죄인들인데요. 그런데도...”
“...어떤 이유가 있어도 용서받기 힘든 자들을,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용서한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묻겠는데, 짐에게도 책임을 물어보겠나?”
깊은 의혹. 하지만 차마 되묻지 못하는 수많은 시선에게 황제가 물었다.
“지난 전쟁, 아무리 사정이 있었대도 인간을 버리고 도망친 이가... 바로 여기 있다네. 수없이 살렸지만, 또한 수없이 버린 이가 바로 짐이라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킨 그 죄는... 짐에게도 있다네. ...다시금 묻겠다. 짐에게도 죄를 물어주겠는가?”
아주 나지막한, 당혹한 웅성임은 아직 있지만, 결국 누구도 답은 없다.
“왜 묻지 않는가. 설마...”
찬웃음이 서리처럼 뭇 사람의 머리 위에 내린다.
“높으신 분에 강자라서? ...그래. 그렇게 피해간 이가 세상에 한 둘은 아니지. 그런데, 정의를 이리 입에 올리는 그대들이, 짐 앞이라고 달라질 셈인가.”
뻗어진 손가락이, 닿진 않아도 여러 사람을 찔러댔다.
“스스로는 다치지 않는, 그런 속편한 비난만큼 얄팍한 것도 또 없는 법. 자신만은 다른 듯 타인의 죄를 비난하는 너희들은... 과연 이번에 제대로 된 싸움을 했느냐? 제 목숨 살리고자 동료를 외면하고, 남을 방패삼아 도망치던 이가 과연 없었느냐? 어디 한 번 파볼까...?”
섞여서 듣던 가이버 형제는 식은땀을 애써 참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악과 죄를 혐오하는 것. ...다 좋다. 죄인에의 비난 역시 인지상정이다. 허나 왜 그래야만 했는가. 내가, 세상이 짊어질 부분은 과연 없는가. ...그것이 빠진다면, 다들 자신의 싸구려 정의감을 죄인에게만 돌려 공짜로 해소하고 곧 잊어버리겠지.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 또 같은 일이 벌어질 테지만, 다음 번 죄의 주체가 너희들이 아닐 거라고 부디 생각하지 마라. ...이번 추태를 보면 누구도 그리 장담할 순 없을 테니...!”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아직은 태풍이 매몰찼다.
“개인의 증오로 괴물과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인류의 재기, 그 주역이라는 영웅심리도 필요 없다. 너희들의 본분은 군인. 약자를 지키고, 구하고, 희생하는 거다. 그게 싫다면 당장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손쉬운 승리, 거저 얻는 명예, 그게 네놈들이 생각하는 보상이라면, 그런 편리한 건 짐의 주머니엔 없다.”
“...용서하소서.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어느덧 다가온 카프랑이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사령관이 꿇으니 다른 이들도 별 수 없었다.
자각 있는 자는 창피를 느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지금은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어찌 너만의 잘못이겠느냐.”
황제는 탄식했다.
“다들 이 함구령을 명심하라. 버려진 이들의 죄를 묻기 위해 버렸던 이들의 책임을 망각하는 자. 자신의 오만한 정의감을 채우기 위해 최소한의 인권조차 짓밟는 그런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원주민 무리의 이곳저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그것은 살았다는 안도감만은 아니다.
지난 세월, 그들은 서로 입을 다물고 살아왔다. 캐어내서 좋을 것 없다. 나도 나쁘지만 저놈도 나쁘다.
...그저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눌러온, 하지만 결코 지울 수 없던 마음의 무게가 바로 지금, 자신을 이렇게나 아프게 짓눌러 오는 것이다.
그 무게를, 세상은 양심이라 부른다.
지능도 지식도 아닌, 지성체의 진정한 자산이다.
“마냥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 세상이 묻지 않은 죄를, 질문을... 앞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물으면서 오래도록 살아봐라. 과연 오늘보다 덜 아플지, 덜 괴로울지. 짐은 절대로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그대들의 처분이며, 어쩌면 그 무엇보다 가장 혹독한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듭 엄히 말한 황제는 문득 반파된 동굴을 바라보며,
“죄를 숨긴, 서로를 불신하고 감시하고 또한 알게 모르게 서로 경멸한, 저런 음침한 동굴은 결코 그대들의 낙원이 될 수 없겠지.”
힘 있고도 부드러운 손길이 수송선을 향했다.
“...안주할 낙원이 필요하다면 이제부터 만들어라. 짐승이 살던 세상을 다시금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그대들의 과제다. ...부디 순탄한 여정이 되길 바란다.”
“...그 때는 고마웠습니다.”
“...쉿.”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입에 대었고, 카프랑은 옅게 웃으며 한 쪽을 눈짓했다.
가건물 사이로 숨은 그들. 카프랑이 다시 한 번 인사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들을 일은 아니오. ...데니스도 죽어버렸고...”
“...동굴 속에 매몰되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자는 괴물에게도 역겨웠을까. 하지만 남자는 조금 끄덕이며,
“그래도 시신이라도 건졌으니... 참 다행이오.”
“다행이라...? 뭔가 친분이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내 친구였소. 고향친구였고, 오래 사귀었죠.”
옅은 웃음에는 진한 추억과 후회가 묻어났다.
“술도 같이 먹고 돈도 같이 날리고.., 여자 하나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똑같이 차인 후 어이없이 웃고...”
“...그러셨군요.”
“녀석은 사명감에 불탔었소,”
뜬금없이 남자가 말했다.
“정말 열심이었지요. 공동체의 많은 부분이 그 손을 거쳤었고, 그동안 굶어죽지 않고 사람 사는 흉내라도 낼 수 있던 것은 그 덕이 아주 컸소. ...그렇게 살아남는 그것만이, 우리들을 버린 이들을 조소하는 유일한 길이라... 그는 그리 믿는 것 같았소.”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약하고 아픈 남자의 한숨이 찬바람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사명감이 녀석을 망가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도 하오.”
“망가뜨렸다고요...?”
“그렇소. 아무리 괴물의 협박이 있었다 해도, 살아남아야 한대도 아이를 판다는 것에 반발한 이는 처음부터 적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들을 그리 찍어 누른 것도, 결국은 다 같이 공범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도 한 것도... 어쩌면 그 철저한 사명감 아니었을까. 오명이든 뭐든, 지도자가 된 이상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 녀석은 그리 생각하고...”
“하지만 그 죄가 용납받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때때로 생각하오. 데니스는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았소. 남보다 한 입 더 먹지도 않았지요.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그리 나무랄 곳이 없었소. 허나 그런 이조차 권력을 잡고 명분을 얻고 책임이 씌워지면... 결과는 이렇소. ...그리고 그가 했던 일은, 어쩌면 보다 부유하고 남 위에 선 이가 항상 해오던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고...”
이상한 일이지만 카프랑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일생의 지표이며, 지금도 감히 우러르기도 힘든 이다.
남자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변호는 이 정도로만 하겠소. 녀석도 아마 내가 변명한다, 그리 생각해 싫어할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저들과 같이 가야지요.”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저희 폐하의 말씀에도 앙심을 품거나 그릇된 생각을 하는 이가 없다고는 자신할 수 없겠죠. 난 억울하다. 부당히 비난받는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배신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겠죠. 혹시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그래도 가야 하오.”
상처가 두드러진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우리 공동체는 아직 불안하오. 당신 말대로 그릇된 이는 분명히 있겠죠. 그러니 우리가 엇나가지 않도록... 비록 떳떳이 나설 수는 없어도 데니스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이번엔 내가 지켜보려 합니다. ...그게 살아남은, 그리고 녀석의 친구 된 몫이겠죠. 또한...”
남자는 그윽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끝에는 조금은 불안한 표정과 몸짓으로, 하지만 꿋꿋이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마리아도 언제나 함께 할 거요. ...충분하오.”
카프랑도 미소지었다.
사랑하는 사이였구나. 나이는 꽤 차이 나지만 그녀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이름 정도는 물어도 될까요?”
아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 하지만 묻고 싶다.
눈을 껌뻑이면서도 남자가 답했다.
“조셉... 조셉 바튼이오.”
살짝 생각한 카프랑이 이내 꽤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리아? ...장차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이름을 지저스로 짓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난 무교이오만 그것도 괜찮겠죠.”
다소 무례한 농담에도 남자는 경쾌히 웃었다.
“어쩌면 인류를 또다시 구원할, 그런 성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니.”
“어쩐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잘 가세요.”
굳은 악수를 나눈 서로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그렇게 각자의 전장으로 돌아갔다.
강하로부터 50여 일. 인류는 기대이상 큰 성과를 거두었다.
교두보를 확보했고 거듭 승리했으며, 회심의 역공을 분쇄하여 아울러 적의 정체도 밝혔다.
하지만 길은 아직 멀다. 500일을 더 싸우고, 5천일을 더 헤매어야 할지 모른다.
아직은 그 끝도 모른다.
그래도 나아간다. 나아가야 한다.
이 땅,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을,
어둠 속에 웅크려 지금도 고통과 슬픔의 알을 품을,
또 다른 괴물의 낙원을 찾기 위해.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4부 시작을 괴물의 낙원... 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괴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무서울수도 있겠죠. 피난 과정에서의 여러 추태, 계산 뿐만 아니라, 재건 속에서 같이 자라나는 탐욕과 증오 같은 것들 말이죠. 또한...
인간이 지성체임을 자부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이유.
제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에필로그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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