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돌이킬 수 없는 일.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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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5월 16일, 국정회의에 등청한 대역 황제는, 우선 여왕이 지시대로 먼저 전수를 첬다.
“...간밤의 소식은 무척 참담한 일이지만... 명백한 악의로 이따위 음해를 벌인, 그 불충한 놈들부터 찾아내야 할 거다.”
“하지만 증거가...”
언짢을 황제에게 처음으로 진언하는, 누구나 꺼려하는 총대를 멘 자는 하원의장 엔세프였다.
하지만 이영이 재빨리 말했다.
“장난질을 치고 싶은 어떤 놈이 내궁과 내통, 조각만 잘라가서 장난쳤을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차비궁에 누군가 들어갔을 확률이 높을까? 이건 당장 답이 나오지 않나?”
지금은 줄곧 밀어붙여, 초반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끌고 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엔세프가 다시 말했다.
“말씀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난질에 대한 경위를 밝혀애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 유전자정보의 주인을 밝혀야죠. 아직 지상인 출신의 유전자 등록은 완료 전이지만, 작업을 서두른다면 대조는 금방일 터. 그럼 불경 불충한 자들을 색출할 수 있을 겁니다.”
범죄수사와 미아판별, 여러 용도를 위해 국민 등록에 이어 유전자 등록이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자신 역시 비서성 관료이므로 당연히 등록했었다. 조사하는 순간 스스로가 나락에 빠지게 된다.
엔세프의 간곡함에 이영은 내심 아찔했다. 다행인 것은, 로사에 저장된 유전자정보는 악용의 우려를 막기 위해 열람에는 황제 재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가 쥐고 있는 아주 단단한 자물쇠이다.
“지금 내궁에서 조사가 진행중이니, 그걸 기다려야 옳지 않을까? 조사가 완료되면 큰 윤곽이 잡힐 것을...”
“그렇긴 합니다만, 부디 용서하시길. ...하원 전체가 난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의회는, 예전부터 황후마마의 편이 절대적으로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차비마마가 먼저 회임한 것에 대해 불안이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서 구설수에 오른 것만으로도...”
이영은 내심 거듭 탄식했다. 여왕이 예상한 그대로다.
그나저나 다른 하원의원들과 자문위원회, 즉 지상인들까지 합세하지 않으면 이리 시끄러울 리가 없다. 역시 좋은 건수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엔세프가 다시 말했다.
“물론 확률 자체는 한없이 0에 수렴함은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또한 아무리 차비마마가 회임 중이시라 해도, 국모이신 황후마마는 그 가치가 감히 비할 분이 아닙니다. 의혹이 생긴 그 자체만으로도 황후마마께는 엄청난 누가 됩니다.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경도 그러한가?”
“...아니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시길...”
“그렇다고 하원에서 나설 일은 아니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감히 황실의 일에 손을 대려 한다면...”
“그렇다면, 그저 내궁에만 맡겨 두시지 마시고 조사를 명하십시오. 저도 그 찢어죽일 자가 어디의 누구인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야 당신 바로 눈앞에 있지.
“...아무튼 일단은 내궁에 맡기겠다.”
지금 칩거한 제케르를 대행한 궁내승, 그 중 수석인 바레트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오나 조사조차 내궁에만 일임하심은, 자칫 의혹을 살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무례한 진언을 용서하소서. 감히 음해를 할 작정이었다면 조사하면 장차 드러날, 그리고 자신과의 연관성을 증명할 유전자 정보를 보낼 이유가 없잖습니까?”
“...경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 믿는 건가?”
“아니옵니다. 하지만 이리 엄중한 사안인 만큼 이대로 내궁에만 맡긴다면, 자칫 폐하께서 차비마마를 총애하심이 지나쳐 과실을 덮으시려 한다는 의혹을 살 수도 있습니다. 즉... 차비마마가 진짜 부정이 있다는 이야기만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빠르게 의혹을 풀지 않은 채, 여기서 공론화가 더 진행될 경우...”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건가? 감히 황제를 상대로?”
옥좌의 손잡이가 화난 듯 가볍게 내리쳐졌다.
연기력은 바로 지금 필요하다.
“확률을 따져서 어느 쪽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는가?”
“하지만 아무리 작은 의혹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그 때 정무궁의 벨이 울렸다.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놀란 좌중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건 국정회의다. 어째서 황후가...?
전례 없던 행동에 모두가 당혹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예를 올리는 황후에게 이영이 물었다.
“무슨 일인지?”
“사안은 들었습니다. 비서성에 문의한 결과를요. 더불어 자문위원회와 하원의 문제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이리 염치불구하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찌를 듯 좌중을 둘러보며,
“설마 이 자리에서도 감히 내궁의 일, 차비를 의심하거나 제 일처리에 대해 불만이 논의된 것은 아니겠죠?”
황후가 굉장히 유순한 성품임은 다들 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얼굴이 몹시 굳어져 있음에, 대부분이 시선을 피하며 목젖을 울렸다.
“외람되오나, 이번 국정회의의 주제가 차비의 문제라면, 감히 청하건대 내궁에서의 일에 연관됨에 따라, 제게 맡겨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대신 국정회의라도 주관하겠다는 건가...?”
“저도 경험자입니다. 황태녀 출신이니까요. 또한...”
그녀는 눈을 빛냈다.
“저는 칙명에 따라, 폐하 이외에 유일하게 황제권자입니다. 자격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영은 유키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주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맡기지.”
“황송하옵니다.”
도망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천천히 이영이 퇴청한 후, 황후는 옥좌로 올라갔다. 지금의 그녀는 명백한 황제 대리다.
“자, 그럼... 제가 왜 이 회의를 주관하려 드는지, 혹시 짐작하는 분이 있습니까?”
관료 중 유일하게 진짜 황제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아는, 줄곧 굳은 표정의 총재가 말했다.
“잘은... 부디 하문하소서.”
“혹시 이 자리에서 차비에 대한 총애 운운하여, 감히 황제 폐하를 의심하는 이가 있을까봐 그럽니다.”
조금 전까지 말하던 내용이라 다들 움츠린다.
“저는 그런 의혹에서 자유롭겠지요? 남편의 시앗을 감싸줄 이유는 없겠지요? 또한 내궁 수사는 이제 막 시작인데, 여기서 너무 앞서나간 억측은 곤란하지요.”
이미 자백제 사용에 들어갔다는 보고도 있었다.
“국가 대사지만 또한 내궁의 일입니다. 함부로 입을 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할뿐더러, 혹여 폐하를 의심하는 불충 언사를 내뱉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려 합니다. 따라서 당분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문위원회 뿐만 아니라 하원도 제가 상대할 겁니다.”
“하오면.”
총재가 조심스레 말했다.
“모든 일은 황후께서 책임지고 처리하시겠다는...”
“그럴 겁니다. 여러분들이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차비의 가능성이 없는 과실이나 누군가가 했을 장난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신, 감히 공론화를 시켜서 황실과 정부를 압박하려 드는, 자문위원회와 하원의 움직임 아닌가요? 대체 여러분은 누구의 신하입니까?”
세리사가 내용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파는 근거리긴 하지만 빠른 통신이며 안에는 유키나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혹여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판단하여 끼어들었다.
황제가 부재중인 상황이다. 들키면 약점이 되는 요소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몰려서도 꽤나 침착했던 차비도, 이번만은 근심과 두려움이 깊었다.
...나 역시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러니 부디 주제를 틀리지 않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하실 일은 지금 갖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감히 황실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겁니다.”
“이미 소문이 제법 퍼졌고... 감히 말씀드리지만 마마께서 과하게 나서실 경우 일이 더 커질 수...”
내무상서 온케르의 말은 높아진 언성에 끊겨버렸다.
“제가 왜 나서는지 압니까? 차비와 저의 관계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황손인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벌써부터 입을 대는 자가 있다면, 낳지는 않았어도 어미가 된 입장에서 절대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공론화시킨다면... 단언컨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점은 지금 분명히 밝힙니다. 부디 그녀의 태중에 있는... 그 소중한 아이를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황후의 바램과는 달리 이미 논란은 퍼질 대로 퍼졌다.
물론 조작가능성은 유키나가 말하지 않아도 미리 제기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고 공감 역시 꽤 얻었다.
그러나, 이후 황실의 행동은 의심받을 건수다. 황실이 조사를 내궁으로 한정하고, 당연히 해야 할 유전자의 주인공도 당장 찾지 않으려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게 논란 자체를 누르진 못했다.
그리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찬스네요.”
“하늘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을 주나니... 지금 외계인들도 떠들썩하죠. 기대 이상이에요.”
“의심받을 만하죠. 외계인들이라고 차비가 마음에 드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들도 차비의 부정을 무척 믿고 싶을 겁니다. 인간 이 생각하는 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요.”
“맞아요. 특히 황후의 파벌은 아직 뿌리 깊고... 차비가 먼저 아이를 밴 것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넘쳐나니까요. ...이 구경은 재미있어지겠군요.”
“그럼... 조금 더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를 기다려, 슬슬 접촉해볼까 합니다만.”
“잘 해 보시오. 성공하면 내 한 턱 쏘리다.”
가가대소 좋아하는 이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좋아하는 이유는 진실보다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다는 일종의 우월감이기도 하다.
어리석은 중생은 세상에 속고 있을 뿐이지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부심이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일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고, 음모론자들이 대체적으로 훨씬 바보다. 하지만 워낙 달콤한 맛이니 끊이질 않는다.
특히 이번엔 달콤함을 넘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지금의 황후는 아샤르 최고의 혈통이자 엄청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제국 봉인령의 진짜 이유를 아는 이도 극히 적다.
그런데 느닷없이 두 사람이 혼인으로 맺어진 것은 물론, 황제가 불과 몇 달 만에 시앗을 들였고 더불어 그 여자는 황제의 지난 약혼녀, 배신자에 국적인 여자를 심하게 연상시킨다.
이건 누구나 거리껴지는 요소들이다. 그런 탓에, 황제 부부 사이의 공갈 협박이나 구린 속사정을 의심하는 이는 아직도 없지 않다.
더불어 차비는 지상인 출신이다. 명색이야 황족이지만 기존 원숭이 출신인 차비가, 실수든 고의든 외간남자까지 끌어들였다면? 이는 장대한 역사와 그에 따른 긍지에 큰 상처다.
그렇게 서로의 혈통과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원래는 가벼운 스캔들 내지는 헛소문이 되었을 일조차 의심하고, 또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다.
만약 한 점의 의혹이 진실이 되어 사실일 경우라면? 자칫 황실에 모욕이 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진상을 밝혀 더 큰 수치를 사전에 찍어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황후가 주관하는 내궁 조사를 언제까지 기다려줄 정도로 자존심이 약한 이도 많지 않았다.
황실의 일이니 언론은 조심스러웠지만, 대신 지드팃 게시판에는 연일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유키나를 독대한 세리사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간, 폐하의 부재를 당장 들키고 말 거야. 그리고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내궁에 남자가 있던 것만으로도 큰 문젯거리고...”
황후가 차비를 직접 챙겨, 위해에서 보호하고자 며칠 연속 자신의 옆에 재우고 있으며 물 한잔까지 전부 체크한다는 것은 궁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태도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될 터이다.
그러나 지금, 이 건으로 인해 잡혀 들어간 시녀들만 30명이 넘는다. 크게 경직된 황궁 분위기는 좋은 소문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
유키나도 몹시 고민했다.
“어쨌든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모든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해요. 지금 그...에게도 당분간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하고 침전에만 있으라 했지만, 그게 언제까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죠.”
지금 상황에서 이영은 방해고 약점이다. 엉뚱하게 남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다.
심란한 황제가 자기 거처에 틀어박힌 셈이니 모양은 이상하지 않지만, 반대로 이제껏 정무에 빠진 적이 없는 황제가 오래 자리를 비움은 논란 자체를 증폭시킬 수 있다.
“...이제 일주일 남았는데... 논란을 더 퍼지게 막는 방법도 없고... 황궁 결선도 내가 참석을 취소할까? 혹여 내가 차비에게서 떨어지게 되면... 아냐.”
황후는 잠시 생각했다.
“결선은 전국 생방송이지?”
“네.”
“그럼... 예정대로 내가 차비를 데리고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챙기고 돌본다면, 내가 그러는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회임 중이잖아요?”
“이대로 차비가 우울증에라도 걸리면 아기에게는 훨씬 안 좋겠어. ...호위는 철저하게 붙일 테니까...”
같이 지낸 기간은 많지 않지만 우리 둘은 나름 친하다. 연적이 될 수 있는 관계지만, 서로의 역할은 명백히 정해져 있고 침범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아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 그러니 지켜줄 것이다.
황제를 위해서도 지켜내야 한다. 그녀는 황제가 가고자 하는 길의 상징이다.
또한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눈앞에서 아미에가 죽는 것을 바라본 처지에 루이코까지 잃는다면...
나는 도저히 그를 볼 면목이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라고요?”
침대 위의 루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얼토당토아니한 소리에 의심을 받는 것은 물론, 행복감에 젖어 있다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니 정신적 괴리는 컸다.
“미안... 하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고작인 것 같아.”
세리사는 재빨리 루이코의 손을 잡았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내야 해. 궁에 들어온 이후부터 너는, 결코 너 혼자만의 목숨이 아냐.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겠죠.”
“두렵니?”
“매우...”
하지만 루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게요.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걸어야죠.”
“..그래.”
“아프고 힘들겠지만, 이미 각오했잖아요. 나라를 팔고 자리를 산 여자라고 일부에서 쑥덕거리는 것... 부모님의 얼굴만 봐도 알아요. 그것도 견딜 각오를 했는데... 사실이 아닌 일에서 피할 만큼 비겁하고 싶진 않아요.”
몇 번이고 느꼈지만 정신적 강인함은 상당하다.
아냐, 오히려 평소보다 더 대단해...!
세리사는 꽤나 감탄했다.
“그리고... 이 일로...”
루이코는 배를 어루만졌다.
“절대로 누가 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세리사는 깨달았다.
그 의지를 증폭시킨 근본이 그녀의 안에 있다.
이영에게 말했지. 어머니는 언제 어느 때든 강하다고.
그 실증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나가겠습니다. 다만...”
그녀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부디... 잘 지켜주세요...”
세리사는 그녀를 껴안았다.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부디 용기를...”
다짐에 다짐을 서로 거듭하면서도, 두 여자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이 어려운 때에 가장 의지하고픈 그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여긴 분위기가 왜 이러오?”
“예로부터 유명한 요정인데 마음에 안 드십니까. ...물론 신법(新法) 이후에는 좀 죽어버렸지만 그래도...”
“...됐소. 날 보자고 한 이유는...?”
낮은 적색 조명과 밀폐된 방.
억지로 끌려온 그는 경계부터 늦추지 않았다.
“굳이 사람까지 보내서 만나고자 하고, 게다가 이렇게 은밀하게...”
“물론 조정의 일로 상심이 크실 줄은 압니다만...”
“본론부터 말하시오.”
지상인은 왜 이리 미사여구가 많은가. 아샤르인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낮게 웃으며,
“그럼, 각하께서는 이번 사태를 어찌 보십니까?”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지 않소? 영역이 다른데...”
“어딜요. 저희도 이미 아샤르 제국의 신민인데, 당연히 걱정 정도는 해야 하는 거죠. ...황후마마도 안 되었습니다. 시앗도 문제인데 부정의혹이라... 체면이 참...”
아샤르인은 움찔했다.
“...감히 우리 황실에, 마마께 모욕을 줄 생각이오?”
“그럴 리가요. 다만 저희들 입장을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정치가의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하는지라...”
“중요시한 것치고는 그동안 깨끗하지 않았지 않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정도 빈정거림은 별 상처도 아니다. 지상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야 하찮은 무명소졸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적어도 일국의 수장은 그러면 안 되죠. 각하께서도 스스로가 모시는 군주가, 만인이 믿고 따라갈 분이 되길 바라실 것 아닙니까?”
침묵한 아샤르인에게 지상인이 속삭이듯,
“각하의 입장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폐하를 따라가는 이유, 다른 곳에 있지요? 다 알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물론 그럴 수는 없으나... 그래도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오. 그런데도 굳이 상관하겠다는, 그 저의가 대체 무엇이오?”
“...서로에게 득이 될 이야기니까요.”
“...이득?”
“그렇습니다. 지금 의혹은 누구보다 깊으시겠지만, 또한 각하와 그 파벌은 아샤르인. 아무래도 황실을 들쑤시는 것이 쉽진 않겠죠. 허나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니, 저희가 대신 좀 거들어드리죠.”
“...거든다고? 당신들이?”
“네. 저희 인원은 아시다시피 아샤르 순혈의 몇 배. 목소리 큰 사람들도 상당히 많단 말입니다.”
“즉, 감히 입을 놀릴 수 없는 우리들 순혈을 대신해 당신들이 떠들어주겠다? 이 사태가 커지도록?”
“그래야 각하께서도 의혹을 검증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그저 묻힐 공산도 없진 않지요.”
낮은 신음은 역시 유혹인 듯, 아샤르인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걸 기화로 황제 폐하를 상처 입히겠다? 떠들어대는 당신들 입을 막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장차 정치적 거래... 달콤한 사탕을 물려줄 거다?”
“...아, 그렇게까진...”
“내가 당신들을 모를까. 거짓은 그만두시오.”
못마땅한 혀가 차인 아샤르인에게 지상인이 되물었다.
“하지만 분명히 유리한 도움일 겁니다. 황상이 조금 다친대도 이 일은 풀어야죠. 아니면 황후마마께서 너무 불쌍하지 않으십니까...? 시앗이 자신보다 더 일찍 임신하고, 더불어 내밀어진 의혹에서조차 입을 다물린다면... 장차 황후마마의 입지는 어찌 될까요?”
침묵했지만 이미 일그러진 아샤르인에게 지상인이 천천히 말했다.
“저희 입장에서도, 특히 일본 쪽 정계에선 저 차비는 나름 불만입니다. 어딘가 명망 있던 집안도 아니고... 기왕 통합의 상징이라면 일본 황실 쪽에서도 찾으면 있을 것을... 그게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럼 구 한국인들은? 설마 일본계와 이해관계가 일치할 리는 없을 텐데...”
“그런 입장에서는 일본인인 게 마음에 안 들지요. 어찌 되었든 첫 아이이고 아들이기라도 한다면, 일본인 모친을 둔 황태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여기에 1억 넘는 인구의 지지를 받는다면 황령 주민들에겐 불리하겠죠.”
“그렇다면 결국 당신들은... 정계의 끈, 그 입장의 새로운 후궁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인가?”
“날카로우시군요. 그리고, 이건 아샤르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저 따위 말많은 차비는 별로 의미가 없고, 황후께도 그저 걸림돌일 뿐이겠죠.”
“태어날 아기씨가 의심의 여지없는 황손이라 해도...?”
다른 씨일 확률은 극히 적다. 사실이더라도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로 낳거나 지킬 바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상인은 쇄기를 박았다.
“각하의 입장에서는... 그 아기씨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황후마마가 더 중요합니까? 지금도 황후마마를 찍어 누르고 윗줄에 서신 황제께서, 장차 개혁의 성공으로 더욱 권력을 강화한다면 황후마마께 얼마나 득이 되겠습니까. 만약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끈은, 황후마마께 쥐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여러분이 오래 전부터 품고 있는, 두 분 폐하의 결합에 대한 진실. 그리고 최소한 황후마마 스스로 황상의 첫 자손을 생산하시고 그 위치가 완전한 반석에 오르는... 그 기반을 마련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샤르인의 무언. 그것으로 승기를 파악한 지상인이 조금 웃었다. 아샤르인이 낮게 신음했다.
“내가, 그대들의 시커먼 속셈에 알고도 같이 가야 한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오?”
“시커멓다니요. 지금 위기감은 저희만 느끼고 있습니까?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가 같은 입장 아닐까요? 그러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하신다면, 저희 손도 한번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생각의 공조와 상호 협력은 곧, 황제 폐하께서 즉위 이후 누누이 말씀하시던, 바로 그 공존의 지름길이 아닐까요?”
이미 이겼다는 듯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갖은 곳에서 미움받는 루이코에, 보이지 않는 적은 느끼지만 어떻게 해주기는 힘든 세리사에, 황제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더불어 못된 작가의 파괴심리는 아직 팽팽하게 살아있단 말입니다. 크...
내일 뵙겠습니다. 소제목이 곧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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