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보다 강인한. (2)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Ⅱ
“...리...어스...? 새로운 지구..?. 아니, 그것만이 아닐 텐데. 뜻이 뭡니까?”
성급한 이영을 손을 들어 제지한 황제는,
“설명해주기 전에 하나 묻자. 너는 아샤르 강하 전의, 이 땅에 존재했던 지구인의 문명을 어떻게 보느냐...?”
“...물론 아샤르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독자적으로 이만큼 성장한 것은 꽤 좋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돌아온 아샤르 사람들이 몹시 놀라며 경탄했던 것이기도 하다고... 그리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 흙덩이들이 고작 2천년 만에 진짜로 우주를 노렸다. 우리가 놀란 첫 번째의 일이다.”
지구 인류의 자부심에 어느새 웃은 이영에게 황제는,
“하지만 우리가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우리가 떠난 이후, 너희가 이 별을 이렇게나 훌륭히 말아먹었음이지.”
30만년 세월동안 한 점의 상처 없이 보존했던 소중한 정원이 바로 지구다. 그런데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철없는 애들이 온 집안을 헤집어 놓았다.
돌아온 이들의 경악과 실망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지구인들 역시 앞으로 이 별에서 살아야 할 처지임에도, 이만큼 망가뜨린 지구 및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논의와 대비가 아주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놀란 세 번째의 일이다.”
지구인의 명예를 위해 이영이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빙긋 웃으며,
“물론 그건 발전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또한 지구인들은 여태껏 잘 살아가고 있었고, 앞으로도 독자적인 문명과 나름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었다며 반발할지 모르지. 하지만 이제 지구는 우리들도 살아가야 하는 별이다. 손댈 권리는 우리에게도 있는 셈이야.”
“그래서 지구의 오염된 환경 같은 것을 정화한다... 그런 뜻이 되는 겁니까?”
“아니. 고작 그런 정도라면 보통의 개발 계획으로 족하지. 일단 리어스 플랜의 뜻을 보자면...”
황제의 손가락이 제목을 짚었다.
“Request for Evolution, 즉 진화를 위한 요소. 또한 그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육(Education)과 지원(Aid), 책무(Responsibility)와 자리(Table), 그리고 치유(Healing)의 다섯을 이은 약어인 셈이다.”
“그럼 궁극 목적은 진화...라는 겁니까? 어떤 의미입니까? 생물학적인 것... 아니면 뭔가 정신적인 것인가요?”
“후자에 가깝지만 모두 포괄해. 요는 지금까지의 사회,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근간인 인간 그 자체를 지금과는 좀 다르게, 보다 강하게 변화시켜본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바꿔? 이영은 걱정스럽게,
“...송구합니다만 이건 다소 터무니없이 들리는...”
“끝까지 다 들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진 않을 거다.”
묘한 자신감을 눈빛으로 선보인 황제였다.
“자, 질문 하나 더 하마. 네 눈에는, 지구인의 눈에서 본다면 지금의 아샤르는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일까요?
“...이를테면?”
“물론 아샤르는 마냥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하지만 보다 근접해 있겠죠. 상당수 지구인들은 지난 지구 침공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니 매우 불안해하겠죠. 하지만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샤르가 지금껏 이룩한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네 말이 맞아. 아샤르는 매우 날카로운 칼이지만, 또한 엄청난 보물 창고의 열쇠일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 단독으로는 증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샤르가 쌓아온 자산은 지구 인류가 지금껏 오매불망 바라던 것이라는, 그 증인과 증거가 필요하지.”
마치 마천루의 꼭대기에 있듯, 정자의 한쪽 벽면은 베라의 야경이 투사되고 있다. 황제는 그것을 바라보며,
“또한 지상인들도 세월과 정성을 들이면, 그리 부끄럽지 않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아샤르인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있었지. 그래서 나는 지상 영토를 손에 넣는 것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평화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어.”
“...그래서 굳이 전쟁으로 침략자의 낙인을 찍으신 것이었다... 그런 거죠.”
“...죽은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지금껏 그 몇 배의 선정을 베푸셨잖아요. 너무 자책하진 마십시오.”
지구 침공 당시의 자신이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말에, 무상한 세월을 느끼며 이영이 위로했다.
살짝 웃은 황제가 잔을 들었다.
“네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드디어 오는군. ...그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 한 잔 마시자.”
뻗어낸 서로의 술잔이 부딪쳤고 목을 축인 황제는,
“그동안 지상을 통치한 우리는, 우리 문명과 기술력의 위력 및 그와 구 지상 인류의 안정적인 융합의 가능성, 그리고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 이른바 아샤르식 생활방식을 선보일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립문명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신영토를 포함한 아샤르는 새로운 기준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란 거지.”
과거, 중국이 폭발적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중반에 이르도록 구 중화제국의 영광을 그다지 찾지 못한 것. 그것은 바로 세계인들, 특히 젊은이들이 선망할 수 있는 이른바 중국식 라이프 모델을 구 서구와는 달리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 덧붙인 황제는,
“자, 그리 되면 우릴 보는 세계의 반응은 어떨까?”
“음... 질시 혹은 선망, 아니면 그 모두겠지요?”
“그렇다. 설령 질시라도 받아낼 국력은 충분해. 그렇다면 선망을 이용할 때지. 저들처럼 되고 또한 살아보고 싶다는 그 욕망을 충족시켜, 지구의 기술 및 생활 수준을 아샤르에 준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그렇게 아샤르가, 더는 위험하지 않은 인류의 새로운 동반자임을 세계에까지 인정받음이 일차 목표다. 그를 위해서 이 다섯 방법을 쓰는 거야.”
황제의 손가락이 허공의 입체화면, 그 차트의 일부를 짚자 이영의 것도 같은 부분이 연동되어 반짝인다.
“이제부터 설명하지. 우선 교육...”
현재 지상의 교육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또한 재산과 국적에 의한 불균형은 발생할 수밖에 없어, 이는 부와 교양의 대물림을 고착화시킨다.
하지만 아샤르는 로사와 지드팃을 통한 교육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무상 제공의 정보팔찌는 역시 장소와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교육 기회를 제공해, 영국의 귀족이든 아프리카의 빈민 소년이든 팔찌를 갖는 이상 최고 수준의 교육과정까지 아낌없이 지원된다.
이는 지구 인류의 함량과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아샤르에 적대적인 인간의 숫자를 줄이는 첩경이다.
지원은 기술적인 것이다. 지구에 맞춘 적정기술을 국가와 기업과 민간에 제공, 세계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전반적으로 상승시킨다.
이것으로 아샤르 국민이 아니더라도 세계의 인류는 더 싼 가격에 더 많고 좋은 제품을 누리며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은 사실상 사라진다.
책무는 현재 지구 환경과 연결된다. 아샤르의 눈에 비친 세계는 심각한 난개발에, 불합리한 생산과 유통과 소비로 낭비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를 외면한 이유는, 아무리 미래를 위해서래도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것을 깎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원과 장소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이른바 지구 공학을 도입하며, 쓰레기와 탄소 배출량은 엄격하게 규제받을 것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아샤르의 기술력이 그를 보완하여,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는 생활의 질을 높이면 높였지 떨어뜨리진 않을 것이다.
자리는 곧 공론장을 의미한다.
지구의 평화는 아샤르의 안정을 위해서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저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만 그를 유지하려는 망상은 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아샤르는 영원한 침략자에 이방인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적 문제나 분쟁에 아샤르가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되도록 평화의 수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세계 수준의 통합 기관이자 공론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아직은 다소 문제가 많지만, 지구에서 주창되고 최대의 대표기관인 유엔을 대폭 강화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치유. 유사 이래로 즐거움보다 고통이 많았던 지구 인류를 쉬게 한다. 예전에는 수확을 위해 1년의 노동이 필요했다면 앞으로는 한 달로 끝내게 할 것이며, 10년 동안 고치지 못했던 질병을 며칠 만에 낫게 할 것이다. 10시간을 가야 했던 길을 한 시간으로 줄일 것이며, 한 시간을 투자해야했던 등굣길을 단지 팔찌를 여는 10초로 줄여 버릴 것이다. 그렇게 지구 인류는 지쳐버린 자신을 치유하며, 또한 미래로의 길을 찾을 여유를 얻게 되겠지.”
황제는 천천히 이영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되면 세상은... 지금껏 없었던 풍요와 안정을 갖고 또한 누리게 된다. 감상이 어떠냐?”
“...꿈같습니다.”
정말이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들었었다.
“그야말로 평화의, 그리고 번영의 시대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것만이라면, 내가 지금껏 남들에게 숨길 이유도 없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네요. 듣자니 좋은 이야기뿐인데... 어째서죠?”
황제는 스스로의 가슴팍을 조금 두들기며,
“그야 넌 지구인이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냐?”
“뭡니까. 당연히 아샤르 황제시잖. ...아!”
이영은 순간 손뼉을 치며,
“...순혈들이 싫어할지도 모르갰네요. 명분은 충분해도, 지구의 성장은 아샤르의 절대적 위치를 위협하니까요. 그리고 그를 주도하는 이가 하필 자신들의 황제라면...”
모처럼의 통찰을 칭찬하듯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일단 원래의 아샤르 시민, 즉 순혈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이내 약간의 어두움이 그 미간에 드리워졌다.
“내전 전의 아샤르는 평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내전을 치렀지. 이후의 혼란도 대단한 판에, 또한 황족들이 제위를 미루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결국 대공위시대를 견뎌내려 다들 잠들어야 했고, 깨어나 보니 또 어떠냐.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넘어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있지, 왕조는 바뀌어 있지...”
한숨이 절로 뱉어진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면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이번엔 돌아온 시대가 문제로, 아샤르의 정원은 철없는 아이들의 흙발로 더럽혀졌고, 안전한 시대는 훌쩍 가버렸다. 영토 일부는 돌려받았지만, 대신 거칠고 상식 없는 인간들과 살아야 하는, 그 불안과 경계심은 상당했지.”
아무리 문화적 유연성을 가지려 해도, 고립문명 하에서 틀에 맞춰 살아온 그들에게 당장 다른 이와의 공존을 요구하긴 무리다.
때문에 통치 초창기에는 공중도시 거주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해 받아들였기에, 각 지역의 수도가 된 구 8개 공중도시에는 지금도 순혈들이 훨씬 많다.
대신 기존의 지상인들은 신설된 도시들에 몰려 있다. 그렇듯 아직은 완전한 융합이라 하긴 어려웠다.
“첫 1년, 내가 갖은 반발을 억누르고 미친 듯이 속도를 내어 각종 개혁을 밀어붙인 것도, 순혈들의 경계심이 폭증하고 인내심이 바닥나는 사태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자식의 죽음까지 이용했어.”
신제국 성립 이후 최초의 반역이 지상인이 아닌 아샤르인의 손에서 벌어진 것. 또한 황제가 피로 보복하지 않은 것은 순혈들의 불만을 상당히 억눌렀고 황권까지 크게 강화했다.
사건을 막지는 못했지만 효과는 무척 강력했고, 황제는 그 이용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0년. 어떻게든 평화는 누렸지만 정체도 잘 모르는 위협적인 능력자 집단이 있지 않나. 그걸 분쇄하니, 이번엔 황제에게 출신 문제가 있는 장성한 딸이 있지 않나. 여기에 여왕 도둑, 네놈도 한몫 했지...?”
“그저 송구합니다...”
놀리듯 보인 황제의 실소에 이영은 그저 뒤통수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탓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골칫거리를 더해준 셈이니 면목은 없었다.
“그렇듯 순혈들의 괴로움은 상당해. 세리사의 얼굴을 봐서 참아주는 것도 있고, 그동안 내가 민생에는 무척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황제가 친구를 만든답시고 사실은 잠재적인 적이 될지 모를 녀석들을 키운다면, 극단적 안전제일주의인 순혈들이 무척 싫어하겠지.”
“그래서 비밀로... 하시는 거였군요.”
“이것만이 아니다. 기존의 체제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의 반발도 적지 않을 거다. 인공지능 의존형인 아샤르식 정치체제는 분명 효율적이긴 하지만, 구 권력자들의 민중 장악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리지. 아샤르식 경제 역시 현재의 자본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말이죠. 반발이 있다 해도 그건 기득권층에나 해당되는 말이잖아요. 민중들은 좋아하지 않을까요?”
“아냐. 오히려 민중 속에서 더 큰 반발이 나온다.”
“어째서요? 자기들 좋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 금세기 50년 동안의 기술발전과 자동화, 그 여파로 사라진 일자리는 20억 개가 넘고 그만큼의 실업자도 생겼지. 물론 그들 역시 자국민이며 그 안정은 중요하니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들을 구제하려 했지만, 그 지위는 어디까지나 하층민으로 고정되고 또한 대물림되어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수가 그 해결을 바랐음에도 그리 하지 못한 것은, 재원이나 제도적 한계보다 더 큰 장벽 때문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느냐?”
“글쎄요...”
“인간에게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야.”
“욕구...요?”
“그래. 타인과의 차별화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의 과시욕, 그리고 성취 이후의 안주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수성가한 부자일수록, 오히려 서민 시절을 잊고 힘들게 구축한 부를 굳게 고정하려 하지. 바닥에서 시작한 정치가도 마찬가지. 그런 이들에게 있어 그 실업자들은, 구제의 대상이 아닌 자기 몫을 갉아먹는 무능자로 받아들여진다.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행하는 사람이 진심이 아니면, 그 효과는 항상 미미하다.”
“하지만 못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았는데요...”
“못 가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야. 세상의 장벽이 두터울수록 신분상승과 부에 대한 욕구는 강렬해진다. 하지만 도전하고 도전하다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에 절망한다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작다 해도 자신이 가진 것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지. 때문에 지금껏 자신이 올라온 사다리를 남이 올라올 수 없도록 걷어차고, 또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한 분풀이를 자신과 같거나 더 못한, 보복당할 염려가 적은 힘없는 이에게 하는 거야. 그게 바로... 이 세상은 약자가 항상 다수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든지 어디서든 벌어졌던, 타인에 대한 폭력과 억압... 이른바 상호 갑질의 큰 원인이다.”
황제는 어깨로 큰 한숨을 쉬며,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 원하는 것은, 모두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이 아냐. 엿 같은 세상이면서도 나와 내 가족만은 잘 사는 거야. 그러니 다소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괴롭혔던 시스템에 대한 가장 큰 옹호자는, 하필이면 그동안 당한 자들이지. 이것이 역사상 모든 혁명과 개혁의 발목을 번번이 잡은, 일종의 심리적 고질병이다.”
“말씀대로라면 그건 참... 바보 같은 이기주의네요.”
이영은 절로 혀를 찼지만 황제는 재빨리,
“이건 비난만 할 거리가 아냐. 그들도 그동안 하도 혹독하게 당한 탓이야. 개혁 의지보다는 욕망과 복수심이 넘쳐나고 한편 복수할 힘도, 그렇다고 체제를 고칠 여력도 없는 자신이 미운 거야. 또한 막상 그 체제가 무너진다 생각하면, 지금껏 거기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쳤던 자신의 인생과 존재의의를 상실하는 것 같겠지. 이 모든 것은 그들을 그리 만든 세상의 몫이 크니, 힘없는 이에게 책임을 온전히 지울 수는 없지.”
순간 울컥했지만, 과거의 자신도 그 일원이었음에 이영은 약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황제는 다시,
“...그리고 이게 국가나 세계의 일로 발전해봐라. 지난 세월 쌓아온 자산은 무로 돌아가고, 대신 후진국 따위가 감히 위대한 우리나라와 맞먹게 발전한다? 하늘에게 갑자기 툭 떨어진 저 외계인 국가는, 대체 무슨 권리로 조상들이 피똥을 싸며 만든 세계의 서열을 개판으로 만드는가? 기존 체제에서 좀 살고 방귀 꽤나 꿨다는 곳은 물론, 경쟁 현실에서 구르고 구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나라에서도 과연 이럴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있을 것 같습니다. ...매우 많이요.”
“그래. 그러니 앞으로 내가 부와 풍요를 준다 해도, 그것에 안주하거나 더 많이 얻어 타인을 짓밟으려 하는 자들은, 부패한 구 권력자보다도 오히려 그동안 당하고 살았던 그 민중에게서 나오게 된다. 내가 구제해야 하는 이들에게서 오히려 터져 나올 그런 반발은, 어쩌면 내 계획의 최대의 적이다. 때문에 나는 가디언즈나 특정 국가만이 아닌, 개인의 욕망에 편승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자손에게 오히려 미래의 문제를 떠넘기기나 하는, 그런 뭇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싸우게 될 공산이 크겠지. ...지겹도록 말이야.”
속이 타는 듯, 말하는 동안 계속 마셔대 비어버린 술병을 손수 치우며 황제는,
“게다가 이 모든 진단은 내가 내린 것이다. 의사의 진단은 나름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것 역시 걸림돌이지.”
“...갈 길이 너무 가시밭길이군요. 아, 여기...”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한데 황제는 어떨까. 이영은 깊은 위로를 담아 황제의 잔을 재빨리 채웠다.
부지불식, 마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니 리어스 플랜은 단순히 부를 증가시키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반드시 더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네게 맡길 일을 정했느니, ...들을 준비가 되었느냐.”
올 것이 왔다. 이영은 눕혔던 몸을 바로 일으키며,
“말씀하시지요.”
“조만간 화성의 행성개조가 시작됨은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제법 떠들썩하고 그에게도 관심 분야라 꽤 알고 있는 이것은, 지구 가치로 환산하면 5조 달러 남짓과 35년의 기간이 소모되는 거대 프로젝트다.
아샤르 기술성과 통합지원본부가 지난 2년간 사전 준비를 해왔고, 조만간 개발주체인 유엔 산하의 화성개발공사가 발족될 것이다. 그 수뇌의 인선도 진행 중이다.
“임원의 반은 국제연합에 양도했지만, 대표와 남은 임원은 간섭을 허용치 않는 아샤르의 몫이지.”
이어진 말은 이영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그러니 네게 그 대표, 화성개발공사장의 직을 내린다. 5월부터 부임하여, 이후 화성 사업을 총괄해라.”
“...네? 제가요?!”
과거 가짜 황제를 하라는 것과 맞먹는 당혹감에, 이영은 자신도 모르게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래. 모든 인력과 장비와 자원을 네게 맡기마.”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이번 장은 두 사람의 대담 형식의 취하는 고로, ...대사가 많군요. 싫어라...
일단 그의 시각, 그리고 생각은 이래서 이러하다... 라는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논란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요.
졸지에 주어진 대형감투, 그 이유는 다음 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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