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화해한 정명공주.
광해군의 새 보금자리가 된 곳에는 광해군과 이지, 김율이 앉아있었다.
김율은 여전히 경계하는 자세를 풀지는 못하였었고, 그들의 앞에는 정명공주가 앉아있었다.
아델린은 조용히 뒤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분'이라는 자에게 주입되었던 원한을 기반으로 하는 저주의 마나에서 해방되고
어제 사건의 현장에서 모든 일을 같이 겪었던 공주였기에,
이전과 같이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원한이 서린 눈빛으로 광해군을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하는 정명공주였다.
"한치의 거짓 없이 똑바로 말해주셔야 할 겁니다."
광해군은 정명공주를 따스이 보면서 말했다.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내 솔직히 다 답해주겠다."
"그날...내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내 아우 영창대군이 죽던 날.
은밀히 숨어서 그 아이를 죽이라고 직접 명령을 내리던 당신을요.
그리고 그 명을 거두어 달라는 나의 청에,
입에 조소를 머금고 그 끔찍한 영창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떠나가던 당신을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것을 당신이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광해군은 슬픈 듯 하나 의지가 서려있는 눈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분명히 하늘에 맹세코 그런 명을 내린 적도 없고, 너의 간청을 매정하게 뿌리친 적도 없다.
내 얼굴을 하고 '이지'에게 나타나서 음모에 빠트린 자. 그리고 영창대군을 죽게 한 자.
나에게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군대를 줄 테니, 사람을 바치라고 하였던 그 자...
분명히 그자이다. 내가 그자를 거절한 일로 너에게 마저 커다란 상처를 주었구나."
광해군은 정명공주에게 다가가 무릎을 끓고 사죄를 하면서 말했다.
"비록 내가 한 것이 아니라도, 내 아우이기도 한 영창대군을 지키지 못했던 죄. 그리고 정명공주. 너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입힌 죄.
나로 인해서 비극을 겪게 된 너희 때문에, 내 그날 이후로 편히 잠을 자본 적이 없다.
너에게 차마 용서해 달란 말도 할 수가 없구나...미안하다...정말로 미안해..."
광해군은 그들이 겪은 아픔을 진심으로 통감하며 머리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이미 어제 '이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의심스러웠던 모든 것의 퍼즐이 맞추어 가고 있던 정명공주였다.
오늘 이 자리에는 다만 확인을 하러 온 것 뿐이었다.
광해군을 차갑게 바라보던 정명공주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그리도 따랐던 오라비였는데...누구보다 이 조선의 백성을 위해서 필요하다 생각했던 임금이었는데...어찌....흐 흑흑흑...
오라비를 원망하는 힘만으로 살아왔었는데, 이제 저는 어찌하라고...."
정명공주는 자신에게 엎드려서 사죄하고 있는 광해군을 일으켜 안아 주었다.
그리고 둘은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비극을 잊기 위해서 조용히 계속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뒤에서 잠자코 있던 아델린이 말했다.
"어찌하시기는요....당연히 그 일의 진짜 원흉을 찾아서 복수하셔야지요."
아델린에게 울고 있는 자신을 보이기가 쑥스러운지, 정명공주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 원흉에 대한 복수 도와줄거야??"
"물론입니다. 제가 찾는 이와 동일인 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보다 어떻게 공주님께서 갑자기 무사 김율을 대적할 힘을 가지시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사실 공주님께서 '그분'이라는 작자의 수하라는 의심을 가지고 마마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원흉이 그 작자라는 것을 알게 되신 이상 그럴 염려는 더 이상 없겠네요"
정명공주는 차마 다시 꺼내기 싫은 기억인 듯 하였다. 하지만 이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러간 영창대군은 내 눈앞에서 죽어갔어.
처참하게 들끓어 오르는 방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그 아이를, 막아서는 군사들에게 막혀서 그저 바라 만 볼 수 밖에 없었어.
꽉다문 입술에서는 피가 나고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정신을 잃어 버리게 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어. 시꺼멓게 그을려 버린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지.
그때 한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어. 그자의 두 손에는 영창대군이 나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불을 떼던 자들의 머리가 들려있었지.
그것을 던지면서 그는 말했어. 진짜 원흉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눈앞에서 동생을 잃어버린 나는 그 자를 따라갔어. 그 자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이끌려갔던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방의 공간은 이미 그 자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이 지키고 있었고, 중앙부에는 강제로 끌려온 것 같은 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었어.
백 여명 정도씩 사람들을 모아다가 제단으로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는데, 나를 데리고 왔던 그 사내가 그들을 향해서 주문을 외우더니 순식간에 모두들 쓰러져 버렸어.
그중에 열 명 정도만 다시 일어나서 수하들에게 이끌려 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시체가 되어 어딘가로 옮겨졌어.
그 있어서는 안되는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거절해야 했었는데, 동생의 죽음 앞에서 나는 그 사내의 제안을 수락해 버렸어.
다음 백 여명의 무리에 섞여서 나도 그 제단에 올라갔고, 이윽고 주문이 들었을 때 정신을 잃어버렸지.
다행인 건지 나는 다시 살아서 일어난 무리에 속했고, 그 수하들에게 이끌려 갔어.
다시 살아난 우리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했어. 몸에서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어. 그들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온몸에서 들끓어 오르는 기운에 흥분해 있었지.
그때, 나를 데리고 왔던 사내는 나만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나의 기운을 살펴보더라고.
그리고 나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나에게 영창이 죽었던 방에서 나왔다는 검은재에 주문을 걸더니 물에 타서 먹게 했어.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어. 깨어났을 때는 내 처소였어.
그 이후로는 점 조직 형태로 명령이 하달 되었어. 처음에는 모여서 각성한 능력을 다루는 법과 검술을 익히는 정도였는데 차후에는 암살 명령으로 이어졌지.
그러다가 결국 반정에도 동원되게 되었던 거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명령이 내려오지는 않고 있어.
하지만, 내 안에 깃든 뜨겁고 어두운 기운은 날로 커져서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기운이 커짐과 동시에 내 아우를 죽게 한 오라비에 대한 원한과 분노도 날로 커져 갔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는 기운과 원한의 힘으로 수차례 오라비를 죽이러 갔던 거고.
새로운 명령이 없어진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기운을 분출하기 위해서 백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악덕 권신들을 약탈하며 의적행세도 했었던 거고.
시간이 흘러서 마침내 이제는 내가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느껴지는 순간까지 이르게 되었어.
더 이상 '그분'이라는 자에게 연락이 닿지도 않아서 이제 죽겠구나 생각했었지.
오라비와 같이 죽을 생각으로 찾아갔던 마니산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던 거야.
니가 나의 기운을 모두 흡수해버린 이후에는,
터져나오려는 기운이 사라져서 육체도 편해졌고,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쏟아지던 악의와 원한도 사라지게 되었던 거고."
듣고 있던 아델린은 생각했다.
"'그분'이라는 자는 이미 언령의 힘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듯 하구나. 가히 신과 같은 힘이 아닌가.
여전히 그자의 의도는 알 수가 없구나. 너무나도 비어있는 구석이 많아.'
아델린은 겉으로 공주에게 자신만만하게 웃어주었다.
"반드시 진짜 원흉에게 원수를 갚을 날이 오시게 될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잃고 있는 마검은 그런 아델린을 비웃었다.
'웃기시네...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면서... 쎈 척은....클클클클'
'하아.....검의 본체가 있는 아공간을 차단시켜서 생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나.'
'클클클클...너와 나는 영혼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 검을 아무리 떼어놓아도 상관없단다..애송아. 클클클클'
이러다가 정신분열증에 걸려버릴 것 같은 아델린이었다.
숙연해진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아델린은 공주를 데리고 아진이의 방으로 갔다.
아델린은 우선 정명공주에게 주문서 두 장을 주었다.
"이건 공주마마꺼, 주문서 두장입니다. 이건 대역을 맡을 존재를 불러 들이는 것이고, 이것은 제 처소로 오는 포탈을 만들 주문서입니다."
"오호.....이걸 찢으면 된단 말이지?"
이번에는 아진에에게 주문서 한 장을 주었다.
"아진이 너는 내 처소로 오는 포탈을 만들 주문서 한 장. 어머니께 허락 받은 거 맞지??? 아까 물어봤어야 했는데..."
"선비님과 함께 가는 것이니 허락하신다고 하셨으니 걱정 마셔요. 헤헤헤"
"둘다 오늘 해시 정각입니다. 잊지 마세요."
아델린은 이제 정명공주의 기운을 살펴봐 주기로 했다.
정명공주의 사연을 들으면서 귀찮기만 했던 왈가닥 공주가 조금 측은해 보이기도 했고,
혹시 모를 여행길에 세자와 아진이를 지켜줄 보호자로 삼아볼 생각이기도 했다.
"공주마마 약속했던대로 뒤틀린기운을 바로 잡아드리겠습니다."
"흥...참 오래도 걸리는 구나..."
정명공주는 툴툴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델린은 이제는 필요 없는 행위이지만 과거에 뻥을 쳤던 게 들통날 까봐 맥을 집어주는 형식으로 공주를 살펴보았다.
'흠...분명히 강제로 심어졌던 저주의 마나 흔적은 남아있는 상태야. 그리고 기운이 뒤틀려 있고. 이제 이 기운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은 큰 문제가 없는데.
특별하게 김시정의 호위무사격이었던 이들과 크게 다른 것은 없는데, 어떻게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던 거지?
마법을 사용하게 하는 그 힘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분명히 어설프게나마 소드마스터의 영역에 있었어. 무슨 비밀이 있는 거지?
일단 먼저 기운부터 잡아주고 생각하자.'
아델린의 호기심을 일으키긴 했지만, 우선 그것을 해결하기 보다는 공주의 기운부터 잡아주기로 했다.
아델린은 정명공주의 등에 손을 대고 그녀의 기운을 이끌었다.
자리를 잘못 잡고 뒤틀려 있는 기운들을 바로 잡아서 제 위치에 놓으니, 이내 알아서 나머지 기운이 제대로 통하기 시작했다.
'옳지...이제 됐다. 다시 한번 상태를 확인해볼까?'
공주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 본 아델린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이럴수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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