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을 드러낸 마검 티르빙.
아델린의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정명공주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계속 밀리는 것처럼 보이던 아델린이 일순간 압도적으로 상대를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원흉인 저주의 사슬마저 다 베어버렸고, 다리 세 개가 달린 검은 새는 이제 저주에서 풀려나서 정상이 된 것 같았다.
이제 전투는 종료가 된 듯 보였다.
하지만 아델린은 저주의 근원인 말뚝을 없애버리려 하지 않고, 이제는 평안을 되찾은 검은 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품속에서 이제 바스러져가고 있는 불의 정령은 있는 힘을 다해서 정명공주의 눈을 애절하게 바라 보았다.
꽤 오랜 기간 함께 하였던 그들이기에 서로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얼마 전 뒤틀린 기운이 돌아와서 하급 소드마스터 정도의 역량은 가지고 있는 정명공주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아델린을 향해 뛰쳐나갔다.
"너.....뭐하려는 거냐...."
바로 검은 새를 일격에 도륙하려던, 아델린의 몸을 가진 티르빙은 공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싱긋 웃고서는 그대로 검은 새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야이....개xx....멈춰...xxx'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아델린은 티르빙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티르빙이 온전히 아델린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단지, 검의 방향을 살짝 틀어버리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꾸에에엑.......쿵....."
막판에 방향이 살짝 틀어진 검에 의해서 검은 새는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버렸다.
도착한 정명공주가 아델린을 가로막았다. 품에 있는 소멸해가는 불의 정령은 있는 힘을 다해서 쓰러진 새에게 다가갔다.
"너 뭐하는 거야...이제 이 새는 더 이상 공격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죽이려고 해???"
"클클클클...철딱서니 없는 공주야.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비켜라. 클클클클."
아델린의 검게 변해버린 눈과 얼굴에 흉측하게 돋아난 검은 혈관들을 보면서 정명공주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기시감을 느꼈다.
'저 모습은 마치 마니산에서 마검에 지배 받던 그때의 '이지'와 같은데.'
정명공주는 아델린에게 외쳤다.
"야....너 뭐하냐...안 일어나고....저따위 검한테 지고 있는 거냐??? 어서 일어나지 못해???"
"클클클클. 나는 정당한 약속을 통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다. 나는 계약에 속박되어 있는 몸. 곧 아델린에게 몸을 돌려줄 거란 약속은 지킬 거다.
하지만, 이 새는 죽여야겠다. 클클클클."
"아니 왜....꼭 그래야만 하는 건데..."
"클클클클....별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다만. 클클클클.
오랜 세월 쓰잘데기 없는 숙주들의 몸을 지배하며 살육을 벌여 왔을 때에는 원대한 나의 힘은 계속 검 속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꽤 쓸만한 숙주인 아델린을 지배한 지금.
나의 본래 힘에 비견 되는 힘을 방출 할 수 있었다. 계약에 의해서 이제 곧 돌아가야 할 시간.
저 새를 살육함으로서 압도적인 나의 힘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 미친 놈아....그따위 이유로 살육을 한다고???"
"클클클클. 너도 억겁의 세월 동안 한번 갇혀 지내봐라. 지금의 이 순간을 얼마나 귀하게 보내고 싶은 지를. 클클클클. 힘이 없는 자는 권리가 없다. 비켜라."
"그 힘을 저 말뚝을 없애는데 쓰면 될 거 아니냐. 아까는 결코 부수지도 못했던 저 원흉의 힘을."
"클클클클. 이제 저깟 말뚝이야 관심도 없다. 저 새를 신나게 베어버리고 바로 없애 줄테니 걱정마라.
다만....말뚝이라 하니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이 나긴 했다만,
과연 니가 할 수 있겠느냐?? 새를 베어버리는 것 대신에 나에게 새로운 유흥거리가 될 듯 하기는 한데. 클클클클."
티르빙이 된 아델린은 음흉하게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소름끼치게 웃었다.
"뭔데.....그걸 하면 저 새는 베지 않고, 말뚝만 없애고 아델린에게 몸을 돌려 줄 거냐?."
"클클클클....그래. 그러도록 하지. 나를 살육에 미친놈이라고 비아냥 대며 고고한 척 하는 너에게 알려주고 싶어졌다. 나의 심정을. 클클클클."
"말해라...무엇을 하면 되는데."
"저기 저 저주의 기운이 아직도 발하고 있는 말뚝을 니가 받아들여라. 그 저주의 힘을 너도 한번 짊어져 보아라. 클클클클. 너도 결국 나의 심정을 알게 될지 모르지."
"어떻게....받아 들이는데...."
"간단하다. 그냥 그 말뚝을 뽑아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단.....그걸 뽑는 순간 그 저주의 힘은 너의 몸을 얽어 맬 것이다. 아까 저 검은 새가 미쳐 날뛰던 것처럼 미치게 될지도 모르지. 클클클클."
속에서 다 듣고 있는 아델린은 외쳤다.
'공주...안된다...하지마라!!!!!.....자칫하면 너의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미친 티르빙 놈아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클클클클. 시끄럽다. 곧 몸을 돌려 줄 테니 너는 잠잠코 있어라. 클클클클.'
정명공주는 이제는 사라져가는 소중한 반려정령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하는 검은 새를 차마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알았다. 그럼...저걸 뽑으면 된다는 거지?"
"클클클클. 지체하지 말고 어서 해라. 아델린의 방해로 일격에 처단하지는 못했어도 나의 검에 치명상을 입어서
이미 저 검은 새는 죽어가고 있으니 시간이 없는 건 너다.
그냥 지금 편하게 보내주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너나 아델린이나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클클클클."
검은 새의 상태를 보아하니 시간이 얼마 없는 듯 했다. 정명공주는 서둘러서 말뚝으로 갔다.
그리고 아직도 티르빙에 의해서 잘려나간 사슬들이 흉측하게 널부러져 있는 검은 말뚝에 손을 대었다.
"에잇!!!!!"
말뚝이 점점 뽑히기 시작했다. 절대자에 가까운 힘을 보여주고 있는 티르빙의 의지로 이제 그 말뚝의 저주의 힘은 정명공주에게 옮겨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으아아악!!!!!!!"
정명공주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분'이라는 자에게 영창대군의 비극을 원한으로 한 저주의 마나를 주입 받을 때보다
훨씬 큰 고통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클클클클. 어리석은 인간들. 한동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될듯 하구나.
아델린.... 자...시간이 되었다. 다시 너의 몸을 돌려주마. 클클클클."
순간 아델린의 검게 변한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얼굴에 흉측하게 돋아난 검은 혈관들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델린은 즉시 정명공주에게 뛰어갔다.
"이게....무슨 무모한 짓이오...."
아델린은 이전에 정명공주에게서 분출되는 저주의 마나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의 몸에 그것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주의 기운은 정명공주의 몸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이라는 자에게 주입 받았던 것은 정명공주에게 결국 안착을 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려고 하였던 것이라면
지금의 이 저주의 기운은 정명공주의 동의하에 받아들여서 그런 건지, 마검사로 타고난 그녀의 단전에 온전히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던 정명공주는 이내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아델린은 그런 그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하지만 이것이 향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아....티르빙 놈에게 권한을 넘겨주는게 아니었는데....'
'클클클클....내가 아니었다면, 그냥 모두들 순식간에 죽었겠지. 그게 더 나은 결과라는 것인가??? 클클클클....인간이란....참...흥미로워....'
아델린은 티르빙의 말을 그냥 무시한 채로 정명공주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명공주의 의식이 잠시 후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눈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자동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강한 저주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새를 장악했던 말뚝의 힘이 이제는 그녀를 새로운 숙주로 삼은 듯 했다.
'아......이걸 어쩐다. 티르빙 놈의 힘이 없이는 저걸 다시 막기는 힘이 들텐데. 또 다시 원점인가.'
그녀의 어둠의 기운이 점점 온전히 자리를 잡으며 강대해져가던 그 순간,
티르빙의 검에 쓰러져 버린 검은 새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 새의 옆에는 이제는 마지막 불꽃이 다 타버리고 소멸되기 직전인 아기새 모양의 불의 정령이 검은 기운에 휩쓸려버린 정명공주를 슬픈표정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옆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던 불의 정령을 배웅하듯 슬픈 눈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서
검은 새는 자신의 머리에 있는 이글거리는 태양의 힘을 강렬하게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 태양은 점점 붉고 환하게 타오르더니 점점 푸른색의 빛이 되었다가 이내 검은색의 불꽃을 발하더니
검은 새 자신의 온몸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은 새는 타버리고 잿더미만 남아 버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아델린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도대체 왜 스스로.....자멸을...."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정명공주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하며 검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제 공주랑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티르빙...너 니가 저지른 일이니 수습도 니가 해라.'
아델린은 티르빙을 손에 들고서 자신의 오러를 강하게 흘려보내며, 공주의 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그런데 갑자기 검은 새의 잿더미에서 붉게 타오르는 화염의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새는 순식간에 정명공주의 몸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공주의 몸 안에서 붉은 빛과 어둠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클클클클. 저건 또 뭐냐....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생겼구나. 클클클클.'
'아이...Cx....너 따위랑 지금 말 섞고 싶지는 않다만. 상황이 다급하니 어쩔 수 없지. 저건 무슨 일이 생긴 건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다만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될 거라는 거지. 클클클클.'
아델린은 티르빙에게 더 이상의 조언은 기대하지 않고, 정명공주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얼마 되지 않아서 공중에 떠올랐던 공주의 몸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공주가 눈을 떴다.
다행히도 그녀의 눈은 더 이상 검지 않았다. 원래의 공주로 돌아온 것이다.
"쓰흡.....켁켁......콜록콜록..."
공주는 연달아서 기침을 했지만, 크게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공주에게 아델린이 다가가며 말했다.
"마마 괜찮습니까??? 몸은...그리고 정신은....다 온전하신 겁니까?"
"아델린...너냐??? 너도 니 몸을 다시 찾은 거야???"
"네...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티르빙을 말리지 못하고 마마께서 그러한 일을 당하시게 했습니다."
"뭐...일단....괜찮은 것 같아...말뚝을 뽑고 나서 온몸에 휩싸인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은 것 까지는 기억나기는 하는데..."
"공주마마께서 말뚝을 뽑으시고 나서 갑자기 검은 기운에 휩싸이셨습니다. 눈동자도 검게 물드셨고요. 그리고 강한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자멸하였던 검은 새의 잿더미에서 날아오른 붉게 타오르는 새가 공주마마의 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마의 몸속에서 붉은 기운과 검은 기운이 충돌하더니 지금 정신을 차리시게 된 겁니다. 기억나시는 것이 없으십니까?"
"어...그런 기억은 없어...."
그 순간 정명공주의 반지에서 붉게 타오르는 작은 새가 나왔다. 공주는 순간 소멸해가던 자신의 반려정령이 다시 힘을 회복하여 돌아온 줄 알고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맺혔다.
"아....나의 작은 친구야....다시 돌아 온 거야????"
공주는 자신의 품에 안긴 그 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좀 달랐다. 자신의 반려정령은 이제 갓 병아리의 모양을 벗어난 아기 새의 형상이었는데
지금의 새는 크기는 작지만, 성숙한 새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훨씬 선명하고 강하지만 공주에게는 뜨겁지 않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명공주와 아델린을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소중한 반려정령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안에는 그 아이가 있기도 하기에 결코 슬퍼하지 말아라"
"????그게 무슨 말이야...너는 누군데?"
"나는 네가 목숨 걸고 구하여 주었던 삼족오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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