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도사의 던전사냥, 47화
“······.”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때 묻지 않은, 그래서 순수하다 못해 바보 같아 보이는 그녀.
나라면 충분히 그 순백을 더럽힐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지금 네가 생각하려는 그런 더러운 거 아니야. 다른 의미의 더러움을 얘기하는 거야, 알지?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건 아니었다.
차라리 답답함에 가까웠다.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래서 커즈식 사회생활을 가르치는 교육의 욕구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그 상대가 클로이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마법사이고,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아울러 2층을 넘어 3층 공략을 시작하려면, 이제부터는 손발을 맞출 팀원이 하나쯤은 필요했다.
어차피 근접전은 언데드가 수행한다.
그래서 원거리 딜러가 필요했다.
- 그녀를 가르칠 자신이 있나? YES.
- 그녀가 필요한가? 전략적으로 YES.
- 그녀의 가슴은 큰가? YES.
아니, 뭐야.
이 질문이 왜 나와. 누가 했어? 어?
- 그녀가 있는 게 나에게 손해인가? NO.
이 정도면 됐다.
나는 바로 말을 꺼냈다.
“클로이.”
“네?”
너, 내 동료가 돼라!
이러면 정말 뜬금없겠지.
부드럽게 가공해보자.
“내 팀에 들어올 생각 있어요?”
“네? 커즈 씨는······ 혼자 다니는 분 아니었나요?”
갑작스런 제안에 클로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그런데 어떤 팀이?”
그녀의 물음에 나는 태연히 답했다.
“지금 막 팀이 만들어 졌거든요. 커즈 팀(Cuzz Team)이라고.”
10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할 일을 했을 뿐, 다른 건 없습니다.”
“말씀하신 제안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답은 나중에 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그녀와 함께 할 생각은 없으니까.
“어제 그 여관으로 가면 되겠죠? 어떤 답변을 하게 되더라도요.”
“여관에 내가 없으면, 여기로 와요. 내가 있는 공방이니까. 여관 아니면 여기, 아니면 던전일 테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한 종이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펜으로 빠르게 주소를 적어 넣었다. 명필은 아니지만, 알아볼 정도로는 잘 적힌 듯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종이를 건넸다.
“공방 주소는 이거에요.”
“알겠어요.”
“그럼 또 봐요.”
“네, 정말 오늘 고마워요. 정말 감사합니다, 커즈 씨.”
“고맙다는 말 헤프게 쓰면, 막상 정말 고마울 때 감흥이 없게 들릴 수도 있어요. 적당히 써요.”
“알겠어요.”
“그럼 이만.”
던전 밖으로 나온 나는 그녀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예리나의 여관으로.
그녀는 다른 목적지가 있는 것 같았다.
이쯤이면 할 말은 다 한 것 같다.
미련도 안 남고.
이제 돌아가서, 다음 계획을 세울 차례다.
11
클로이는 한참을 울었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대로(大路), 그 길에 놓인 벤치 위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가족을 모두 잃고, 빈민가를 전전하며 살았던 삶.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계기로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깨우쳤을 때.
클로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매일 부모님의 기일에 예쁜 꽃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영전에 갖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외쳤다.
엄마, 아빠.
정말 멋진 딸이 될게요.
하늘나라에서 꼭 응원해주세요, 하고.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모험가의 삶.
지방에서 올라와, 의기투합한 메이와 아론은 마음이 잘 맞는 모험가 동료들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클로이의 옆에는 항상 사람들이 꼬였고, 메이와 아론은 그 곁에서 나름대로의 혜택을 누렸다.
덕분에 잘 나가는 남자 모험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팀을 꾸려 꽤 오랜 시간 함께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던전에서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그녀가 입가에 큰 상처를 입은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더 이상 남자들은 그녀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고, 도움의 손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그 사이.
클로이 이상으로 성장한 아론과 메이는 앞가림을 충분히 할 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쓸모가 없어진 클로이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하찮게 대했다.
그녀의 마법 실력이 충분히 쓸 만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던전 플레이에는 방해가 된다는 식이었다.
클로이는 두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더 마음을 주고 싶었고, 그들의 불합리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더 악독한 괴물이 됐다.
괴물의 마수 안에서 클로이는 점점 지쳐갔고, 그녀의 장점이었던 자존감과 명랑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겁쟁이 클로이, 쓸모없는 클로이.
흔한 립스틱칠과 예쁜 화장마저 할 수 없는 못난 괴물 클로이.
이것이 메이와 아론이 클로이에게 세뇌하듯 늘 하던 말이었다.
“커즈 씨 말이 맞아. 우린 처음부터 팀이 아니었어.”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커즈의 말은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지만, 하나도 틀린 말은 없었다.
메이와 아론을 두둔하듯 했던 말은 그저 자기만의 미련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 전에 변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이 복면 뒤에 숨어 현실을 부정했을 뿐이다.
“이젠 싫어.”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다.
나를, 클로이 그 자체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복면을 벗고 있어도 편견을 갖고 보지 않는 순수한 사람이 동료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커즈.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특이한 사람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네크로맨서라는 직업까지도.
- 내 팀에 들어올 생각 있어요?
그가 무심한 듯 남긴 말이 계속 기억 속에 남았다.
그를 떠올리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람이라면 끝없이 깊숙한 곳으로 숨고 싶어 하는 자신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의 그 자신감 넘치고 명랑 쾌활했던, 나 자신을 되찾아 줄 것 같았던 것이다.
“후우.”
그녀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론, 메이가 있을 숙소로 향했다.
마지막, 그 대화를 끝맺기 위해서.
12
쏴아아아.
장대비가 내리는 밤.
똑똑. 똑똑.
“와, 완전 잠들었었네. 누구세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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