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도사의 던전사냥, 09화
내가 딛고 선 언덕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은 무척이나 크고 아름다웠다.
성벽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 성벽이 구역을 나누듯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방금 내가 나온 곳처럼 던전의 출입구로 보이는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똑같이 검색대가 있고, 그 주변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던전 도시(Dungeon City)잖아?”
Chapter 2.
1
그렇게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이, 형씨. 뭘 그렇게 넋이 나가서 보고 있소? 뭐 어디 이쁘장한 여자가 옷이라도 홀라당 벗고 뛰어다니는 거요?”
툭!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살짝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덥수룩한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른 중년의 키 작은 남자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김리?”
그를 보는 순간 떠오른 이미지가 나도 모르게 여과 없이 입으로 터져 나왔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봤던 난쟁이 드워프 김리의 현신이라도 믿겠어.
“김리? 그게 뭐요?”
“아, 아닙니다. 안녕하세요? 날이 참 좋네요? 햇살도 따스하고, 하핫!”
나는 뼛속까지 순수하고 고결한 우윳빛으로 가득할 것 같은 백마법사의 흉내를 냈다.
살짝 뒤로 숨긴 내 오른손이 격하게 오그라든다.
착한 커즈라니?
애청자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위선자라고 쌍욕을 퍼붓겠지.
그래도 말이야.
내가 아라한 사가에서 악명 높은 유저이긴 했지만, 인성도 근본도 없는 성격파탄자는 절대 아냐.
내게 수더분하게 말을 건 사람에게 미소쯤 지어주는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라고.
네크로맨서라고 눈을 희번덕하게 까뒤집고, 미친 놈 마냥 피 칠갑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거든.
그거, 그거, 선입견이야. 알지?
물론 내 원래 페이스대로라면.
- 뉘슈?
- 당신 나 알아?
같은 상황, 다른 느낌으로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긴 했을 거다.
어쩌면 대화 자체가 시작되지 않았을 지도.
날 뒤에서 기척 없이 건드렸다는 자체만으로도 목숨이 남아나진 않았을 테니까.
깜빡이는 키라고 있는 거고.
노크는 하라고 있는 거거든.
“뭘 그리 신기하게 보냔거요. 어딜 봐도 죄다 악마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밀려는 돈에 환장한 놈들뿐인데. 아, 물론 형씨가 환장했다는 건 아니요. 말이 그렇단 게지.”
그의 말투는 사포처럼 거칠고, 투박했다.
손 위로 연신 쩔렁이고 있는 금화나 피가 잔뜩 묻은 옷을 보니,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내 모습을 본 거겠지.
“아직 도시가 익숙하지가 않네요. 모르는 것도 많고.”
“아하! 다른 도시에서 오셨구만?”
“예,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되묻는 말에 긍정을 하면, 대화가 쉽게 풀린다.
그리고 말하기 좋아하는 상대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역할도 하지.
“동료는?”
“아직 없습니다.”
“그럼 독고다이요? 엄청난 고수인가본데?”
“그럴 리가요.”
“음! 요즘 형씨 같은 젊은 친구들이 자주 보이거든. 아무래도 라이크만 던전이 어렵기로 악명이 높으니 말야. 괜한 공명심에 라이크만 시(市)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어떻기에요?”
나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정보를 얻을까 싶었는데, 정말 잘 됐다.
질문에 그가 입술에 축축하게 침까지 듬뿍 묻혀가며, 신나게 말을 이었다.
“라이크만 던전 최하층을 가본 사람이 없잖수. 두 달 전에 아그네스 그룹이 23층 공략한 게, 최고 기록이니까 말이야.”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습니까?”
“없지. 그래서 전하께서 5만 골드를 포상으로 내건 것 아뇨? 최하층도 아니고, 바로 다음 층인 24층 공략하는 그룹이 나오면, 그 사람들은 죄다 돈방석에 앉는 게지! 동시에 모디모르 왕국의 대모험가 칭호를 얻는 것이고 말이야.”
“모디모르 왕국이요?”
“그래, 모디모르 왕국. 아, 풀네임으로 알고 계시우? 아스, 드, 모디모르 왕국. 이게 정식 명칭이지. 껄껄껄.”
잠깐, 왕국의 이름이 너무 익숙한데?
그럴 수밖에!
아라한 사가의 ‘국가 작명 이벤트’에서 내가 제출하여 뽑혔던 이름이 바로 모디모르 왕국이었으니까.
원래 이름은 남자의 말대로 ‘아스 드 모디모르 왕국’으로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만든 엉터리 작명이었다.
덕분에 유저들에게는 약칭으로 불렸는데 그게 모디모르였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우연히 나온 이름이라면, 이런 미친 생각을 한 놈이 또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된다.
즉, 이건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이 세계가 아라한 사가를? 아냐, 여긴 현실이고 그건 게임 속이지. 반대에 가깝겠어. 아라한 사가가 이 세계를 모방한 것 같은 느낌이야.’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간다.
사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두 세계가 연동이 되어있는 느낌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만약 아라한 사가에서 기억과 일치한다면.
모디모르 왕국은 칠(七) 대륙 중 하나였던, 로판시아 대륙의 북부에 있다.
그리고 연금술의 왕국이다.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2단계 위, 즉 20년의 격차로 기술이 앞서 나가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남자의 말이 연금술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요즘 연금술사들이 전하의 명령으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한 모양이우. 연금술이 우리 왕국의 자랑 아뇨? 그래서 마정석 가격이 폭등하는 모양이야. 형씨도 말요, 한탕 하러 온 거면 여기 말고 저 쪽을 가쇼.”
남자가 가리킨 곳은 도시의 북동쪽이었다.
시야가 탁 트인 이곳과 달리, 그 쪽은 주변이 온통 음침한 기운들로 가득한 숲 지대였다.
워낙에 높게 자란 나무들로 우거진 숲이라, 던전의 입구와 성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긴 별로인 모양이군요.”
“이쪽은 경험치 위주로 얻을 때 오는 루트요. 요즘 누가 경험치에 목 매겠수? 돈이 최곤데 말요. 레벨 업은 나중 문제지.”
자연스레 경험치와 레벨을 언급하는 남자.
이 세계, 내 생각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레벨, 스킬, 직업 같은 것도 마찬가지겠지.
즉, 서로의 힘이나 클래스의 차이를 도식화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단 얘기다.
좋아, 생각보다 빠르게 이 세계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어.
적응이 크게 어렵진 않겠는 걸?
“아이고, 초면에 혀가 길었수다.”
남자는 내가 다른 생각에 잠시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에둘러 대화를 정리했다.
아마도 내가 그의 말에 흥미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건 아니에요, 아저씨.
이 세계에 적응 중이라 그렇거든요.
- 작가의말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변함없이 인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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