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님 나가신다 4
"으음."
리커는 긴장했는지 입술이 자꾸 마르는 것을 느끼고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명실상부한 천족의 최고 권력자, 대주교 오르테거의 문 앞.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금장이 잔뜩 둘러진 문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쯤 들어갈 수 있는거지?'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기다린지 20분이 훌쩍 넘었다.
초조한 나머지 문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 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 틈새에다 귀를 가져다 대었다.
***
"성녀는 죽었단 말인가?"
"아마도."
"제대로 말해주게."
대주교의 짜증섞인 반응.
이원은 대주교를 조금 더 놀려줄까 하다가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 했다.
"죽었지. 내가 시체를 확실히 봤으니까. 성녀가 없으니 이제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인가?"
"으음···."
대주교는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마왕 급이 있는 요새라고 한들, 방어적인 능력에만 치중된 디바인 파워를 가진 성녀가 이렇게 쉽게 죽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실 성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기는 하다.
이원의 손에 죽은 성녀 마리는 신탁을 받아 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지하 신전의 리프라 여신상 앞에서 신탁을 받는 '척' 을 해왔을 뿐이다.
전대 대주교 시절에, 리프라의 시계바늘 중 시침을 사용하는 자가 천족을 구원하리라는 신탁이 있은 이후에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가 끊긴 이후로 교단은 종교를 앞세운 정치집단으로 변질 되었고, 성녀는 신의 이야기가 아닌 대주교의 이야기를 신탁이라고 신도들을 속여왔다.
어차피 그 누구도 신탁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기에.
그런 성녀가 이원이 신전에 등장하기 전 날 진짜 신탁을 받았다고 알렸을 때, 대주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계바늘의 시침에 대해 알고 있는 천족의 구원자가 나타날테니 성녀가 곁에서 항상 보좌하라는 신탁.
사실 그 때는 성녀가 환청이라도 들었거나 꿈을 너무 생생하게 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니 말이다.
다만 성녀는 그 일을 빌미로 자신이 신탁을 받게 될 자격이 생겼다고 믿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신탁의 내용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이원이 신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 그저 모르는 체 하고 있었을 뿐.
"절차와 전통에 따라, 여신께 선택받을 새로운 성녀를 뽑게 될 걸세."
"그 절차와 전통이란게 뭔데?"
"원래라면 전대 성녀가 신탁을 받아서 후임자를 지목하네만··· 지금은 성녀가 사망한 상태이니 후보자를 몇 명 추려다가 주교들과 내가 의논해서 뽑아야겠지. 며칠 후에 있을 총 집회에서 새로운 성녀를 뽑을 거라는 사실을 알릴거라네."
이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성녀는 전대 성녀의 뒤를 이어 나를 보좌하는 건가?"
"음··· 신탁의 내용이 명확하니 그게 맞긴 하겠지만 새로운 성녀가 어느 정도 교단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내 생각일세."
오르테거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차피 자신의 측근 중에서 뽑을 생각이기는 했다. 성녀라는 직책 자체가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찬 위치니까.
하지만 워낙 연기를 잘하고 외모도 출중했던 전대 성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리프라의 현신이라고 까지 불리며 칭송받았던, 자신의 젊은 '애인' 이자 희대의 사기꾼에 가까웠던 성녀 마리.
성녀라기 보다는 요물에 가까운 여자이기는 했다.
청초한 외모에 사악한 혀를 가진 요물.
물론 그 정도의 걸물은 찾기 힘들테지만, 젊고 아름답고 출세욕에 가득 찬 여사제들 중에서 꼼꼼히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성녀 역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애인'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여사제를.
"그건 그렇고. 영감, 부탁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줬으면 하는군."
"부탁?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겐가?"
오르테거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원을 바라보았고, 이원은 슬쩍 웃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리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들어갈 때가 된 것인가.
신전으로 오기 전에 부하 하나에게 서신을 맡겨 구하의 본가로 보낸 터였다.
대주교에게 줄을 댈 수 있을 것 같으니, 대폭 지원을 바란다는 서신.
이 일만 성공한다면 가문의 후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뭐 다른게 아니고. 실력 좋은 놈이 하나 있는데 그 놈을 구하의 사령관으로 앉혔으면 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잔뜩 인상을 쓰고 모른체 하는 대주교를 바라보며, 이원은 비릿하게 웃었다.
사실 군부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교단은 종교 집단.
인사 청탁을 하고 뇌물을 있는대로 받아 먹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교단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오르테거의 입장에서는 꽤나 거슬리는 일이었다.
"알 만한 사람들 끼리 모른 척 하지 말자고. 대주교. 바보취급 하려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공짜로 해달라는건 아니다. 아마 그 쪽에서도 꽤나 경제력이 있는 모양이니까."
대주교는 말 없이 이원을 노려 보았다.
신탁에서 말하는 천족의 구원자, 이원.
께름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떤 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단의 교육을 시켜보려고도 했지만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죽으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게 낫겠다 라는 판단에 북부 전선으로 파견 보냈던 것이다.
물론 성녀는 신탁 내용과 별개로도, 이원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 놓은 첩자 같은 존재였고.
비록 굉장히 애석하게도 사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듣자하니 구하 사령관이 조금 말썽이라며? 총사령관 명령도 잘 안듣는다고 하던데. 이 참에 영감 입김이 닿는 자로 바꾸는게 어때? 내가 추천하려는 인재는 구하 출신이기도 하고 이런 일에는 눈치가 굉장히 빠른 친구니 예전보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거라고."
이원은 리커를 구하의 사령관으로 앉힐 생각이었다.
가장 까다로운 사령관인 젠사카를 끌어내리고 멍청한 리커를 사령관에 앉힌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리커에게 많은 것을 얻어낼 요량이었다.
본 목적은 교단을 뒤에 업은 천족 군부의 세력 약화기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치 향상과 세력 형성을 위해서는 천족 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구하의 경제력이 큰 도움이 될 수 있기에.
물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리커의 가문에서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것이 사령관의 직책이니 만큼 충분히 원하는 만큼 뽑아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욕은 리커가 먹고 돈은 이원이 먹게 될 그림.
"···지금은 전시이기에 사령관을 교체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네."
조금 머뭇거렸지만 대주교의 동공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칠 이원이 아니었다.
실제로 젠사카가 구하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로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피들레오스를 들들 볶은 것도 오르테거 본인이었다.
"뭐 어떤가. 전쟁 중이니 그 놈이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더 쉬운 일일테지. 안그런가?"
"으음···."
멍청한 자가 권력을 쥐게 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이원은 천족이 마족에게 밀린 근본적인 이유를 신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이 우두머리로 있으니 당연히 싸움에서 질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전쟁이나 군대와는 거리가 멀고 거드름이나 피울 줄 아는,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 찬 교단이 천족의 군부를 휘어잡고 있으니 천족이 이때까지 버틴 것 조차 용할 정도였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천족 전체를 멸절로 이끈 대주교.
이원은 그냥 이대로 놔 두는 것이 천족을 멸절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어 여기서 그만둬야 하는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조금 더 바람을 넣었다.
"오는 길에 마차에서 내가 추천할 인재가 플렌다를 한 병 주더군. 아마 꽤 귀한 술이라지? 그리고 영감을 만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그깟 술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약속을 나에게 했단 말이야. 플렌다는 그저 나와의 친분을 쌓기 위한 거였고. 어려울거 없잖나? 그냥 사망 가능성이 높은 큰 전쟁 중에 그 자가 죽으면 후임자로 지목만 해주면 되는거라고. 영감을 만나게 해주는 데 내 눈을 뒤집어 지게 할 정도의 제안을 할 정도라면··· 뒷 이야기는 상상에 맡기지."
"구하의 사령관이 죽는다면··· 말이지."
오르테거는 탐욕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금 벌어지는 전투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천족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대주교는 젠사카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전쟁은 장군이 하는게 아니라 강력한 디바인 파워를 지닌 교단의 인재들이 하는 것이라는 자만.
실제로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는데 교단의 공을 드높이기 위해 주교를 포함한 고위사제단을 전장에 파견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의한걸로 받아 들이지. 들어와라 리커!"
쿠당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상위 천족 하나가 대주교의 집무실 안으로 구르듯 들어왔다.
"예, 예! 대주교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든 대화를 다 듣지는 못했지만 일부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커가 들은 내용은, 자신을 구하의 사령관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야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리커는 교단의 예를 표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대주교를 바라 보았다.
"저는 구하 출신의 리커 사카냐. 사카냐 가문의 차남으로 벨레르도 요새 소속입니다. 구하의 셀 수 없는 부를 교단의 발전을 위해 '기부' 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었습니다!"
"으음···."
조금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주교를 바라보며, 이원은 코웃음을 한 번 치며 거들었다.
"뭐. 그 사령관이 안죽으면 어쩔 수 없고. 만약에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하는 약속이니까. 맘 편하게 받아들이쇼 영감."
- 작가의말
리커의 이름은 FunnyM 님이 말씀하신대로 똥꼬 핥...쪽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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