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오 현자양반 2
이원은 감긴 눈을 뜨고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인간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어 차지했던 성, 버밀리온의 넓은 연회장. 그리고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오른손이 올라와 미간을 문지른다.
그저 멍하게 주위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 익숙한 사람들.
리버스 사이드에서 인간들의 세력을 규합하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사용하던 장소다.
당당한 표정으로 앞에 서서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 굉장히 그립고 익숙한 느낌이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자.
"성녀랑 이야기 했어. 잘만 풀리면 천족에서 우릴 받아줄거야. 그럼 힘을 합쳐 마족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거야. 그럼 우리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다녀올게."
"위험하니까 같이 가자고 몇번을 말해. 왜 나는 안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너 없이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네가 가면 걔들 쫄아서 문도 안열어줄걸."
그 여자는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았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난건 아니니까. 그래도 난 천족 리프라 교단 출신이라서 괜찮지만 마족 세력 출신 아저씨들이랑은 대화하기 힘들거야. 천족 출신 사람들 같이 갈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깨 약간 아래 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고개를 흔들어 뒤로 넘긴 여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었지만 이원은 불안한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올랐다.
"형님. 그래도 리프라 교단은 믿을만 하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김철호. 자신의 오른팔 과도 같았던 사람이다.
의구심이 들었다.
에르디도 배신했는데 김철호도?
그리고 잠시 눈을 깜빡였는데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버밀리온 성의 내부. 아늑했던 자신의 침소.
아까 보았던,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릴 정도로 그리운 느낌의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에게 입을 맞추어 왔다.
"에이. 왜이렇게 걱정해? 뭐 별일있으면 자기가 구해주면 되잖아. 응?"
"수현아. 그래도···."
"괜찮아. 잘 하고 올테니까. 뭐, 그래도 나도 리프라 교단 사제 출신인데 설마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아니, 천족놈들은···."
수현은 이원의 입에다 입을 포갬으로서 이원의 말을 막아버렸다.
이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려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는데 또다시 장면이 바뀌어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기사들의 시체. 그리고 불타고 무너져 내린 천족의 요새.
이 곳으로 오는 길에 있었던, 잔인하고 황량한 계곡에서 발견한 것은 수현과 일행들의 물건 몇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김철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령의 이야기를 이원에게 전했다.
"혀, 형님! 버밀리온이 공격받고 있답니다!"
눈앞이 뿌옇게 변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버밀리온 성의 성벽 위.
"누가 사주한 짓인가? 단독행동인가?"
"커··· 커흑···."
이원은 높은 성벽 바깥으로 천족 장군 헤스페데스의 목덜미를 잡아 손만 놓으면 떨어지도록 자세를 취하고 있다.
헤스페데스의 양 날개는 강제로 뜯겨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교단? 왕? 단독?"
"와··· 왕이오!"
"지랄하네. 천족 왕? 교단의 따까리 새끼가. 누가 모를 줄 아나? 맹세컨대 네 놈의 가족들을 모두 찾아 날개를 뜯어다가 마족들에게 던져줘 버리겠다."
헤스페데스를 꽉 움켜쥔 채로, 슬슬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리프라 교단의 성녀와 평화 협정을 맺고 함께 마족을 치기 위해 사신으로 길을 나섰던, 자신의 부인인 정수현.
그녀가 길을 떠난지 4일째 되던날 수현의 일행 중 한명이 성기사들에게 공격받았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이원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신단이 지나갔을 길을 훑었다.
한 계곡에서 수현과 일행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대로 가장 가까운 천족 요새를 쓸어 버렸다.
그 와중에 천족 장군인 헤스페데스가 버밀리온 성을 침공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성을 되찾고 헤스페데스의 날개를 뜯고 집어던져 죽여 버렸던 기억.
몇번이고 생명의 위기를 넘길 정도로 큰 전투였다. 앞에는 성. 뒤에는 성기사들의 병력.
결국 수현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떠올랐을 때, 분명히 눈물이 터져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자신은 울고 있지 않았다.
***
콰앙!
이원은 극심한 분노로 안구의 혈관이 모두 터져 시뻘개진 눈으로 메일로의 탁자를 내리쳤다. 두터운 나무 탁자는 속절없이 반으로 갈라졌고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식은 커피가 가득 차 있던 커피잔이 깨지며 바닥을 굴렀다.
"자, 자네··· 괜찮은가?"
눈을 부릅뜬 채 메일로를 바라본 이원은, 주위를 한번 더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메일로의 알약을 먹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흠, 흠. 아무래도 강렬한 기억을 본 모양이군."
위압감을 느꼈는지 몸을 살짝 떨고 있는 메일로의 앞에 앉아있는 이원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이 기억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혹시 이 알약이 환각을 보여주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원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명확하게 기억났다.
환각 따위가 이렇게 생생한 기억을 머리에 박아 넣을 수 있는가. 게다가 환각이 이런 감정까지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어째서 수현에 관련된 기억들이 통째로 들어내어 졌던 것인지. 정수현이라는 사람이 존재했던 것 자체가 자신의 기억속에서 사라질 수가 있는 것인지.
이원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 특정한 한 사람에 관련된 기억이 모두 사라질 수 있는가?"
"으음. 글쎄. 난 기억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네. 금시초문일세만."
"유니크 등급 아이템이 그런 효과를 낼 수도 있나?"
메일로는 이원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글쎄, 그런 아이템이 있었던가···."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듯 했다. 이원은 리프라의 시계바늘의 설명을 떠올렸다.
"무작위로 능력치를 없애버리는 아이템이 있다면, 능력치 대신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가?"
"으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긴 하네. 유니크 등급이 아니더라도 기억을 일부 지우는 효과를 내는 아이템은 있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시기의 기억을 지우는 효과기는 하지만 유니크 아이템이라면··· 그리고 그게 최상위 존재라면 내 지식이 닿지 않는 부분이니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네."
"유니크 아이템을 만든 자가 의도적으로 원하는 기억을 지우는게 가능한가?"
메일로는 알약을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특별한게 떠오르긴 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메일로는 다시 한번 스캐닝 마법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긴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직감이 그 말을 하는 것을 말리고 있었다.
그냥 저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 숨김없이 대답해주고 원하는 것을 모두 주라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메일로는 그 목소리에 따르기로 했다.
"뭐, 신이나··· 마신 중에서도 최상위의 존재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게 내 생각이네. 확실한건 아니지만 말일세."
***
여신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항상 들어왔었다.
마치 자신을 마족을 제거하는데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느낌.
천족과 교단에 가담시키려고 억지로 판을 깔아주는 느낌.
확실한건 아니라 하더라도 더 이상 여신이고 교단이고 불안정 수치 따위에 휘둘려줄 마음따위는 확 사라져버렸다.
현자의 숲과 연결된 석문을 지나 지하 창고로 나오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천족 병사들이 보였다.
"시펠과 성녀는 어디있나?"
"장군님께서는 지휘막사에 계시고 성녀님은 어디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원은 그대로 지하 창고의 계단을 올라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시펠의 지휘막사를 찾았다.
"현자의 숲은 다녀오···."
"한가지 묻지."
"···말씀하시오."
시펠은 아직 뻣뻣한 자세기는 하지만 이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악귀처럼 새빨개진 두 눈을 보고는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티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 요새에 교단 측의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아, 성녀님과 성기사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만."
"내가 지금 그 새끼들을 모두 죽이면 처리해줄 수 있나?"
"······."
시펠은 이원의 시뻘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자의 힘은 온몸으로 느껴봐서 알고 있다. 자신을 너무도 쉽게 쓰러뜨렸을때 조차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아직도 이마에 혹이 사라지지 않아서 잘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이마를 가리기 위해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성기사 따위가 죽었다고 위장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녀는 조금 복잡한 문제기는 했다.
침을 꿀꺽 삼킨 시펠은 눈을 부릅뜨고 이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성기사라면 몰라도 성녀라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제 부하들을 못믿는건 아니지만 5,000명이나 되다 보니··· 마음먹고 털겠다고 조사한다면 누구 한명 정도는 말을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장군도 아니고 성녀니까 말입니다."
"요새 안이 아니라 바깥이라면?"
"뭐 조금 일이 편해지기는 합니다만. 대신 병사들 모르게 직접 이끌어내 처리하신다면 뒷일은 깔끔하게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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