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실수 (2)
“저, 저승이요?”
“네, 저승. 당신은 지금 저승 문턱에 있는 겁니다.”
건장한 체격에 검은색 장 코트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제가 왜 이곳에···.”
“기억 안 나세요. 아까 고물 더미에 깔려 사망하신 거.”
“아~!”
재운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업무는 잔뜩 밀려있는데, 무슨 일인지 망자께서 깨어나질 않아서 제가 이곳까지 업고 왔습니다.”
남자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의 땀을 식혔다.
“그, 그럼 댁이 저승사자?”
“아뇨, 망자들이 흔히 하는 오해긴 한데, 전 저승사자가 아니라 강림차사 입니다. 저승사자는 저기 저 삼도천 너머에서 근무하는 거고, 이승에서 삼도천 앞까지는 제가 맡고 있죠. 여기 제 명함.”
강림차사란 남자가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아, 제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거군요. 실례했습니다.”
빨간 글씨로 쓰인 명함을 보며 재운이 사과했다.
“뭘 또 사과씩이나. 원래 전엔 저승사자가 다 맡아보던 업무인데, 요새 이승에 사람들이 좀 많아야죠. 아주 그냥 개미 떼처럼 많으니 우리도 분업화를···. 흠흠, 이거 제가 괜한 소릴 했군요. 저도 실례했습니다.”
강림차사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재운도 맞절로 응수했다.
“자, 그럼 바쁜 관계로 이제 좀 속도를 내볼까요. 걸으실 순 있겠죠?”
강림이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재운이 그의 손을 잡고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섰다.
“여긴 먼지 같은 건 없습니다, 하하. 자, 이제 삼도천까지 힘차게 가 볼까요. 렛츠고!”
강림이 손가락을 튕기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재운이 그를 따라 걷기 전에 자신의 몸을 둘러봤다.
죽어서 그런지 몸엔 상처하나 없었다.
요즘 항상 느껴지던 위의 묵직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죽을 때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니.”
좀 어이없는 죽음이었지만 각오하고 있던 터라 그렇게 억울하진 않았다.
“자자, 시간이 없습니다. 한 시간 후면 삼도천 다리가 올라가요. 그럼 내일이 돼야 건너게 됩니다. 노숙하지 않으려면 좀 더 서두르셔야 합니다. 컴온, 컴온!”
앞서가던 강림이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말로만 듣던 저승사자와는 전혀 다른 강림의 모습에 재운도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
삐이익!
“아이 씨, 이건 또 왜 이래?”
삼도천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선 강림이 짜증을 냈다.
지하철 개찰구 모양의 게이트를 통과하려는 데 자꾸만 에러가 나고 있었다.
“허어, 항상 바쁠 때만 꼭 이러더라. 에이 씨!”
게이트의 에러표시가 계속되자 강림이 옆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눌러댔다.
삑, 삑, 삑!
“네, 감찰실 입니다.”
“야, 나야 강림 31. 이놈의 게이트가 또 말썽이네. 그냥 그쪽에서 좀 열어줘라.”
“또 너냐? 안돼. 지난번에 한 번 열어 줬다 걸려서 나 시말서까지 썼다. 과장이 한 번만 더 걸리면 그땐 아주 아작을 낸다고 했어.”
버튼 옆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거야 또 안 걸리면 되는 거잖아. 나 오늘 근무 끝나고 중요한 약속이 있단 말이야. 소개팅!”
“호, 혹시 그거 선계 쪽 비천녀들이랑···.”
“그래, 이거 잘 되면 내가 너한테 새끼 쳐줄게. 이번 미팅 성사시키려고 내가 백 년 동안 노력한 거 너도 알지.”
“저, 정말? 그럼 내가 열어 줄 테니까 저번처럼 문제 생기지 않게 잘 좀 해라.”
“그럼, 그럼. 너랑 나만 입 다물면 누가 알겠냐. 니가 출입 관리 데이터만 살짝 바꿔주면 염라대왕도 모를걸. 흐흐!”
“닥치고, 확실하게 새끼 쳐줄 생각이나 하라고.”
삐익!
경고음과 함께 열리지 않던 게이트의 문이 활짝 열렸다.
“흐흐흐흐!”
강림이 음흉한 웃음소릴 내며 재운에게 자랑하듯 손짓했다.
둘은 잽싸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 후 게이트의 철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
“자, 자. 여기 앉으세요. 간단하게 서류를 작성한 후 허가만 받으면 곧바로 삼도천을 건널 수가 있습니다.”
게이트를 지나고 하얀 복도를 거쳐 하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는 동안 다른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여긴 항상 이렇게 한가한가요? 오면서 다른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방안에 설치된 하얀색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던 강림이 대답했다.
“각자가 인지하는 세상이 다른 겁니다. 망자는 넘치도록 많이 오는데, 차사의 수는 늘질 않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바쁜 상황인 거죠. 삼도천을 건너고 나면 다른 망자들을 실컷 보시게 될 겁니다. 거기에 모였다가 같은 죄목끼리 묶여 벌을 받게 되거든요.”
“버, 벌이요?”
재운은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여기 저승이란 거 알면서. 저승이 뭐 하는 곳이겠어요. 심판하고, 벌주고 이런 거 하는 거지. 으이구, 잘 아시면서 그런다.”
강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팔꿈치를 찔렀다.
“그, 그럼 저도 벌을 받게 되는 건가요?”
재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야 까봐야 아는 거죠. 저는 배달만 할 뿐, 주방장은 저기 저 삼도천 너머에 있다고 나 할까. 왜 걱정되세요?”
“당연히 걱정되죠. 전 그냥 편하게 죽으면 되는 줄 알았지, 벌 받는단 생각은 전혀 해보질 못해서.”
“저런, 종교가 없으셨구나. 요즘 그런 망자들이 좀 많은 추세죠. 뭐, 상관없습니다. 까보면 다 거기서 거기거든요. 종교가 있든 없든. 다만 벌 받을 각오가 돼 있냐, 없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강림이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며 설명했다.
“대부분 벌을 받나요?”
“뭐, ‘케바케’라. 이렇다 하고 정확하게 확정할 순 없습니다. 이승하곤 워낙 법률 체계가 달라서. 그냥 ‘네, 네.’ 하다가 곱게 형벌만 좀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편 할 겁니다.”
“그래도 많이 아프겠죠?”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긍정적으로. 그저, 주사 한 번 맞는다는 식으로. 다만 판결에 불복하는 일은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왜요?”
“가끔 종교 지도자란 자들이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마, 신들과 밥도 먹고, 잉 사우나도 같이하고 잉.’ 이런 헛소리 하다 종종 가중처벌을 받거든요. 아주 생사 구분도 못 하고서. 참나.”
대충 알만한 소리였다.
“자자,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여기다 사인만 하시면 다 끝납니다.”
강림이 작성한 서류의 하단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빨간 펜을 집어 든 재운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곤 서명란에 사인했다.
빠른 퇴근을 위해 고군분투한 강림이 흥을 내며 서류를 단말기에 밀어 넣었다.
전산화가 이뤄진 저승에서 결재는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삑-!
“잉, 이거 왜 이러지?”
빨간 글씨로 적힌 서류를 훑어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시 한번 서류를 단말기에 밀어 넣었다.
삑-!
결재를 거부당한 서류가 다시 밀려 나왔다.
“아 또, 뭐가 문제야. 제기랄.”
짜증이 난 강림이 단말기 옆의 자판을 두드려댔다.
모니터에 빠르게 글자들이 흘러가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엑! 이, 이게 뭐야? 이럴 수가···.”
황당함의 크기만큼 그의 작은 눈이 커져 버렸다.
***
“예, 제···제가 1년을 먼저 죽었다고요?”
재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참, 저도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요. 날짜 확인을 분명히 했었는데, 다른 차사가 실수했단 얘긴 들었어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아까 게이트에서 에러 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참!”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게, 씁. 그냥 일 년 먼저 왔다고 생각하시고, 가던 길 가시는 게 어떨까요?”
강림은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제시했다.
“그럼 벌을 받아야 하잖아요?”
“착하게 사셨으면 벌을 안 받을 수도···.”
“······.”
“역시 그건 좀 무리겠죠? 대왕들이 워낙 딱딱한 꼰대라서. 하하하!”
강림도 별반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긁적, 긁적!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감형을 받아낼 테니, 그냥 쭉 가시는 거로···.”
“아까 그랬잖아요, 당신은 배달 전문이라고. 주방장은 저 너머의 대왕들이고. 배달이 무슨 힘이 있어서 요리를 바꿔요? 주방보조라면 모를까.”
“만두 서비스 정도는 저도 추가할 수 있거든요, 지금 배달 막 무시하는 겁니까?”
강림이 상처를 찔린 것처럼 발끈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제 말은 당신 말이 믿음이 안 간다는 거죠. 그냥 전 다시 돌아가서 1년 더 살래요. 럭키도 걱정되고, 또 1년이라도 착한 일을 많이 해둬야 다시 와도 안심이 좀 될 것 같아서요.”
“럭키?”
“저와 함께 살던 고양입니다.”
“지금 고양이 걱정할 때가···.”
강림이 하던 말을 멈췄다.
이미 재운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보였다.
자신이라도 이럴 땐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직장이라고 해도 여긴 저승이었다.
매일 같이 망자의 절규와 기괴한 사고들이 터져 나오는.
“허 참! 이거 영생 완전히 꼬여 버렸네.”
이미 소개팅은 물 건너 가버렸다.
아니, 어쩌면 자신 또한 재판을 받고 망자들과 함께 지옥 코스를 완주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실수를 자백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감찰실 친구 놈까지 함께 끌려갈지도 모른다.
긁적, 긁적, 탕!
습관처럼 머리를 긁어대던 강림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좋습니다. 뭐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습니까. 까짓거 제가 다시 돌려 보내드리죠, 대신···.”
“대신?”
재운의 몸이 한껏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거 죽을 때까지··· 아니, 다시 죽어서도 절대 비밀로 하시는 겁니다.”
강림이 비장하게 속삭였다.
“뭘 어떻게 하시려고?”
“아까 게이트 통과할 때 제 인맥으로 출입 기록을 건너뛰었으니, 공식적으론 망자께서 아직 저승에 들어오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이대로 조용히 돌려보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된다 이거고. 캬~ 이 똑똑한 머리.”
“근데, 그러면 전 어떻게 되나요, 고물 더미에 깔려 사망했다면서요? 설마 그 상태로 살라는 건 아니겠죠?”
“그, 그게···.”
강림이 다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
“자자,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빨리, 빨리.”
강림이 재운을 재촉하며 저승의 어딘가로 끌고 왔다.
하얗던 공간이 사라지고 칙칙한 동굴 속 길들이 이어졌다.
말없이 재운을 이끌던 강림이 한참을 돌아 어느 동굴 앞에 이르렀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1년 전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럼 제 앞으로 2년이란 기간이 남는 건가요?”
“그렇죠, 원래 여긴 중대한 사건이 벌어질 때 사전에 막으러 가는 용도로 사용되던 건데. 이번 건 저한테 매우 중대한 사건이니 이렇게라도 써야죠, 뭐. 두 번 한 일을 세 번이야 못하겠습니까. 씁!”
강림이 착잡한 심정을 쓴 입맛으로 달랬다.
이게 걸리게 된다면 앞선 일은 경범죄 정도 취급을 받을 것이다.
“여기로 들어가서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올 겁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이승에 도달하게 될 거고. 뭐, 더 궁금하신 건 없죠? 조금 있으면 순찰 차사들이 순찰 나올 겁니다. 그 전에 갈림길까지 빨리 가셔야 해요. 자, 그럼 서두르시고, 전 여기서 그만.”
“저, 저기 혹시 제 부모님이 어디에 계신지···.”
다급해 하는 강림을 보며 그가 작게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망설이고 있었다.
쩝!
짜증 섞인 눈빛을 보내려다 포기한 강림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이름을 물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두 분 다 지옥엔 없습니다.”
“휴~!”
결과를 기다리며 두근대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자자, 서둘러야 합니다. 자칫하면 당신이나 나나 모두 무간지옥에서 뺑이 칠 수도 있어요, 지금 상황이.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절대 왼쪽 길로 가시면 안 됩니다. 거긴 바로 지옥행이에요. 아셨죠?”
강림의 다급한 재촉에 인사도 못 한 채 동굴로 들어섰다.
길은 시골의 샛길처럼 짧은 풀들 사이로 좁고 하얀 땅이 이어져 있었고, 옆으로는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한참을 좁은 길을 따라 걷던 중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재운아~!”
갑자기 길옆 안개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 작가의말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만렙용병 재벌 성공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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