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승으로 (1)
하얀 안개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 누구세요?”
재운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등은 순식간에 땀으로 젖어 들었고, 온몸엔 소름이 돋았다.
“그놈 참, 여전히 간이 콩알만 하구나. 허허!”
안개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영감님?”
“그래 이놈아, 그래도 내 목소리는 잊지 않았구나.”
“아니 영감님이 어떻게 여기에···.”
반가움에 말을 내뱉던 그의 입이 멈췄다.
여긴 아직 저승이었다.
“예끼, 이놈. 어떻게 긴 뭐가 어떻게야, 갈 때가 돼서 저승에 온 게지. 헐헐!”
“저, 저기 영감님. 저도 무척 반갑긴 하지만 들키기 전에 제가 여길 빠져나가야 해서···.”
목소리는 맞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박 영감이란 법은 없었다.
반가움도 잠시, 경각심이 든 그가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왜, 뭐 죄라도 지었느냐?”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안개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모시로 된 개량 한복을 입고, 입엔 단죽을 문 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는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휑한 이마에 허연 수염처럼 길고 가는 장발.
살아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영감님!”
노인의 모습이 보이자 그제야 재운의 눈에 반가움의 눈물이 차올랐다.
세상에 날것으로 버려진 그를 거둬준 생명의 은인.
박 영감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 웃고 있었다.
“그놈 참, 꼬락서니 한 번 처량하구나. 허허!”
박 영감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엔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그게, 제가 큰 병을 앓게 돼서.”
“말 안 해도 내 이미 다 안다.”
안개를 빠져나와 길 앞에 선 박 영감이 재운의 변명을 막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여, 영감님. 흑!”
다시 외톨이가 된 것을 받아들이며 쌓았던 마음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만큼 그에게 박 영감이란 존재는 컸다.
“이런 못난 놈 하곤, 나이가 얼만데 청승맞게 울고 자빠졌어.”
살아생전처럼 무뚝뚝하게 나무랐지만, 그의 눈은 한가득 웃고 있었다.
“근데 영감님은 대체 어떻게 여기에···?”
한바탕 감정의 폭풍을 털어낸 재운이 진정하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직 그는 이승까지 빨리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예서 네놈 올 때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니까 제가 올 걸 어떻게 아셨냐 구요?”
“내가 여기서 좀 높은 자리에 있어. 그래서 아는 게지. 에헴!”
다 태운 단죽을 손바닥으로 치며 박 영감이 거드름을 피웠다.
“저, 지금 영감님 만나서 너무 좋긴 한데, 여기서 이렇게 지체하다간 영영 이승으로 못 돌아갈지도 몰라요.”
“걱정 말거라, 네게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걸리면···.”
“예끼, 네놈이 정녕 날 못 믿겠다는 게야?”
“그, 그런 게 아니라.”
“걱정 말래두 그러네, 내 앞에서 널 잡아갈 놈은 이곳에 없느니라. 그나저나 럭키는 잘 있느냐, 말썽은 안 부리고···?”
다급함에 안절부절못하던 재운이 박 영감의 웃음을 보자 그대로 긴장을 놓아버렸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여기서 이렇게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대로 저승으로 다시 끌려간다 해도 이 순간을 그냥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박 영감은 소중했다.
“럭키가 말이죠···.”
5년간 쌓였던 이야기보따리가 그렇게 풀리기 시작했다.
***
“옜다. 이걸 가져가거라.”
박 영감이 귀에 꽂고 있던 단죽(짧은 곰방대)을 내주며 말했다.
“이걸 왜?”
“나 대신 네놈이 해줄 일이 있어서 그런다.”
길옆 널따란 바위 위에 앉은 박 영감이 단죽을 받아든 재운에게 말했다.
“내가 사실 영계에서 감투하나를 쓰고 있거든.”
“감투라면 직책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그래, 명예직이긴 한데 혜택은 쥐꼬리만큼도 없으면서 일은 우라지게 많은 직책이지. 젠장 그때 내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박 영감이 분한 듯 투덜거렸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기에···?”
“내가 아직은 안식년이야, 그래서 나 대신 재운이 네가 그 일을 해줬으면 한다.”
재운에게 박 영감은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고아인 부모님을 대신해 혈육의 정 같은 걸 느끼게 해준 소중한 인연이었다.
위암 판정을 받고도 고물상 일을 놓지 않은 건 박 영감이 일궈놓은 것을 망치지 않으려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런 박 영감이 그에게 부탁을 해왔다.
그게 무엇이든 꼭 들어주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건 돌아가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다. 이 단죽을 들고 갈림길로 가거라. 거기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되느니라.”
“네? 강림차사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바위에서 일어서던 박 영감이 노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놈 참, 말 많네. 내가 좌측으로 가라면 갈 것이지. 에고, 나도 몰러. 그럴 거면 네 맘대로 하거라.”
박 영감이 몸을 돌리고 손을 휘저으며 재운에게 그만 떠나라고 했다.
그리곤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감님, 영감님.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려 주셔야죠? 좌측길은 지옥으로 곧바로 이어졌다고 하던데···.”
단죽을 손에 쥔 재운이 안개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그 안이 위험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
손에 든 단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죽은 박 영감의 손길처럼 아직도 따뜻했다.
***
박 영감이 사라지고 다시 길을 나선 지 한 시간.
마침내 갈림길이 나타났다.
사방은 여전히 짙은 안개로 싸여있었다.
오직 이 작은 길만이 이정표가 되어줄 뿐이었다.
표지판 하나 없는 갈림길 위에서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전문성으로 보면 강림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가슴은 박 영감의 말을 따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선택 하나로 이승과 지옥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결코 쉽게 결정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갈등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 결심했어!”
결국, 그는 결심을 굳히고 좌측길로 걸어갔다.
박 영감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결정을 내린 후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좁은 길을 따라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길은 그저 가만히 그의 선택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
“냐아~!”
난데없는 고양이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울퉁불퉁한 쿠션감과 삐걱거리는 스프링이 고물상 컨테이너 안의 소파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사이로 작은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휴~! 돌아왔구나.’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외치는 대로 좌측길을 선택했지만 내심 불안함도 있었다.
오른쪽 길을 선택했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라 위안하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결국, 가슴의 선택은 옳았다.
지금까지는.
영감님을 믿었단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냐아~!”
럭키가 미약한 소리로 계속 울어댔다.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걸 녀석이 알기나 할까?
그보다는 제 배고픈 것이 더 큰 일이겠지.
재운이 웃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선반 위에 올려둔 사료를 찾아주려는 것이다.
냐아~, 훌쩍!
한 손에 올려둬도 넉넉할 만큼 작은 체구의 은회색 고양이가 새라도 잡는 양 그의 손을 향해 뛰어올랐다.
철썩, 꽉!
그리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작은 털 방망이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아 야야! 럭키 너, 발톱을 세우면 어떡해!”
작은 발톱이 손등을 파고 들어와 아팠지만 크게 몸부림칠 순 없었다.
3개월령 크기의 작고 가벼운 고양이가 그의 몸짓 한 번에 날아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럭키가 손에 들린 단죽을 잡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뭐야, 너 이거 갖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재운도 신기했다.
영감님의 단죽이 분명했다.
자칫 꿈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 현실임을 그것이 증명하고 있었다.
너는 분명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자자, 알았어. 내가 여기다 둘 테니까 발톱 좀 집어넣어라, 아가야.”
단죽과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매달린 럭키를 조심스레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여물지 않은 동그란 귀와 몸보다 커 보이는 앙증맞은 머리를 가진 새끼 고등어가 얌전히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여전히 발밑에 단죽을 밟고 있었다.
“여기 잠시 있어, 내가 부활한 기념으로 츄르 하나 쏠 테니까.”
늘 밥에 카레를 얹고, 김치와 김으로 식사를 때우던 그였지만 럭키의 식사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고물상과 함께 영감님이 물려준 유일한 친구가 이 고등어 빛깔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그렇듯 고물상도 물려받은 재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남의 손 타지 않고, 망가지지 않게 보살필 집이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좁은 복도를 타고 반대편 선반으로 걸어갔다.
복도 사이에 오래된 망태기와 집게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항상 벽에 걸어뒀던 것이, 언제 여기로 옮겨와 있는 거지?
낡아빠진 망태기와 집게를 들어 조심스레 원래 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영감님이 남겨준 물건이었다.
영감님이 이것들로 고물들을 주우며 이 고물상을 일궜을 터였다.
어쩌면 이 물건들이 이곳의 시작을 지켜본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품처럼 소중히 모셔두고 있었다.
저 벽 위에 장식품처럼 걸어두고.
“응?”
재운이 눈을 세차게 비벼보았다.
뭔가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벽엔 한 장씩 떼는 옛날 방식의 반투명한 일력이 걸려있었다.
일력 본지도 꽤 오래되었다.
금은방 하던 동네 어르신이 하나 던져준 이후론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큰 글씨체로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글자색이 붉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란 뜻이다.
월은 4월, 날짜도 자신이 죽은 바로 그날이었다.
분명 이날은 평일이었는데?
문제는 년도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죽은 날짜와 비교해보면 5년이나 뒤로 밀려 있었다.
‘분명 1년 전으로 돌아올 거라 했었는데?’
물론 오른쪽 길로 갔을 때 얘기다.
“그, 그럼 왼쪽 길은 5년···.”
영감님이 왜 왼쪽 길로 가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왼쪽 길은 지옥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5년을 건너뛰는 시간의 통로였다.
“여, 영감님···.”
또 한 번 울컥 감정이 차올랐다.
박 영감은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준 것이다.
***
감정을 추스른 재운이 벽에 망태기와 집게를 걸어두고 럭키에게 줄 간식을 챙겨왔다.
고마운 만큼 그가 남기고 간 럭키에게 뭔가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럭키야, 여기 츄르 먹자!”
소파 위 작은 크기의 단죽을 깔고 앉은 럭키가 햇살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 중 20시간은 자는 것 같은데도 당최 자라지 않는 것이 미스테리였다.
“럭키, 맘마 먹어야지. 너 이거 무지 좋아하잖아.”
스틱형의 봉지 끝을 뜯어 럭키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눈을 부라리고, 침을 흘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을 놈이 지금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너 이러면 국물도 없다. 내 부활 파티 겸해서 하는 거라고, 알아?”
네발을 몸 밑으로 집어넣고 식빵 굽는 자세로 웅크린 럭키의 작은 등을 쓰다듬었다.
“러, 럭키야?”
차가웠다.
추운 겨울을 함께 나던 작고 따스한 털북숭이 몸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급하게 다른 손을 코끝으로 가져다 댔다.
여전히 몸에 얹은 손에선 ‘그르렁’ 거림도, 야무진 심장의 맥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아가. 럭키야? 대체 왜···.”
호흡도 없었다.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적막감이 찾아왔다.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건강하던 아이가 죽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죽은 건 아닐 거야.
분명히 조금 전까지 건강하게 날뛰었잖아.
손등에 난 상처가 아직도 따끔거렸다.
영감님같이 럭키도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아가. 이대론 절대 못 보내.”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몸을 감싸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 안 죽었으니까 그만 뛰어, 먼지 날려.”
품 안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멈춰서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뭘 봐, 냉큼 안으로 기어들어 가지 않고.”
럭키가 눈을 부라리며 사람 말을 하고 있었다.
- 작가의말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만렙용병 재벌 성공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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