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악연 (1)
비성유통 본사.
서울 외곽에 자리 잡은 건물은 몇 년 전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전 건물주로부터 비성유통이 매입한 곳이다.
회사는 그 후로도 쉼 없이 주변 땅을 사들였다.
12층인 본사 건물을 제외하고도 주변의 대형 창고 5개가 모두 비성유통의 것이 되었다.
이 땅과 건물을 기반으로 회사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며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비성유통 10층 사장실.
범모는 사장 집무실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책상 맞은편엔 그의 아버지인 천 사장이 앉아있었다.
50대를 갓 넘은 천 사장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다만 눈 밑에 짙은 그늘과 창백한 피부, 무표정한 얼굴이 합쳐져서 그의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소정식품이 다시 살아날 것 같다고?”
범모를 등지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천 사장의 목소리는 인상만큼이나 차가웠다.
“네···!”
어둡고 무거운 공기에 눌린 범모가 옅은 숨을 뱉으며 겨우 대답했다.
“그렇게 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높이 없는 음성으로 천 사장이 다시 물었다.
“가, 갑자기 이상한 놈이 튀어나와서···. 그 있잖아요, 예전 아버지와 동업하던 한 사장. 그 양반 아들놈이 쓰레기나 줍는 처지가 됐는데···.”
“김 비서, 자넨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던 범모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시간을 너무 끌었습니다. 숨 쉴 틈을 주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벽 쪽에 서서 어둠 속에 동화된 듯 서 있던 비서란 자가 즉시 대답했다.
범모의 입이 다물어졌다.
“내가 왜 너에게 그 회사를 맡긴 줄 아느냐?”
“일을 배우라고···.”
“그래, 내가 하는 일을 시간과 공을 들여가며 직접 겪어보라고 연습 삼아 던져준 거다. 그런데 그깟 조그만 업체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
높낮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음성엔 미약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범모가 침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천 사장의 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맞는 눈높이 교육을 하질 못했구나.”
천 사장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곤 느린 걸음으로 범모에게 다가오며 힘주어 말했다.
“이번엔 네게 딱 맞는 방식으로 가르쳐주마.”
고개를 숙였던 범모가 슬쩍 천 사장의 눈치를 봤다.
그에게 다가오는 천 사장의 눈엔 강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 이걸 네 손에 꼭 쥐고 있거라.”
천 사장이 책상 위에 있던 만년필을 들어 범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성공하려면 말이다,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절대 남에게 뺏겨서는 안 돼.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손에 쥔 것을 놓쳐서는 안 되는 거란다.”
조금 부드러워진 천 사장의 음성에 범모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하지만 그래선 작은 성공밖에 이룰 수 없겠지. 큰 성공을 하려면 말이다···.”
짝!
들려진 범모의 얼굴로 천 사장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사정없는 손찌검에 범모의 고개가 휙 돌아가 버렸다.
“방법은 딱 하나다, 그저 내가 찍은 놈을 사정없이 밟아 버리는 거지. 가진 걸 모두 토해낼 때까지.”
짝, 짝, 퍽, 퍼억!
감정 없는 목소리와 더불어 규칙적인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점점 강해졌고, 범모의 신음도 점점 커져갔다.
손바닥, 주먹, 발.
부위를 가리지 않고 천 사장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용케 정신을 잃지 않은 범모가 몸을 움츠리며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휙!
천 사장이 범모의 손에 있던 만년필을 빼앗았다.
“이렇게 말이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천 사장이 결론을 내렸다.
눈치를 보던 비서가 쓰러진 범모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범모의 얼굴을 보면서도 천 사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쪽 고막이 터진 것 같습니다.”
비서도 큰일 아니라는 듯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했다.
“치료해줘, 그 정도면 교육비론 싼 편 일 거야.”
피 묻은 만년필을 다시 책상 위에 놓으며 천 사장이 지시했다.
잠시 미뤄뒀던 업무가 책상 위에 한가득 남아있었다.
“한 사장 아들내미라···.”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천 사장이 낮게 읊조리며 미소 지었다.
어느 구석에선가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환청처럼···.
***
“왜 보자고 하신 거죠?”
재운이 강림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경리과장의 집에서 강림을 소환한 후 의기소침해진 그가 다시 돌아가기 전에 재운을 따로 불러냈다.
일이 마무리되면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다시 불러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내심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재운이 쉽게 그의 부탁을 승낙했다.
하지만 좀처럼 끝나지 않는 미션에 초조해져서 그의 부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림이 재운을 호출했다.
고물상 사무실에 누워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재운의 품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놀란 그가 품속을 뒤져보니 적패지가 휴대전화처럼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적패지를 들고 강림을 떠올리자 그의 의념이 전해져왔다.
‘일단 혼자만 있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나를 불러내 줘요.’
처음 겪어보는 일에 긴장한 재운이 급히 공터로 가서 그를 호출했다.
뭔가 또 다른 일이 터진 건 아닌가 하여 바짝 긴장했다.
긁적, 긁적!
“아니 뭐,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강림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내가 오늘 정신적인 타격이 좀 컷잖아요, 그래서인지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술에 힘이라도 좀 빌려볼까 하고···.”
요점 없는 말이 빙빙 돌아 나왔다.
“훗!”
그 모습을 보던 재운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는 짓이 제법 귀여웠다.
기억 어딘가에 녹아있던 지난날의 강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백 년 동안 준비했던 소개팅이 어긋난 사건.
사건을 덮으려고 점점 일을 키우던 모습 등.
비록 그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그저 때우던 의미 없는 지난날의 삶보단 지금의 삶이 훨씬 흥겨웠다.
어쨌든 저 강림 차사가 그 시발점이 되어줬다.
“좋습니다. 까짓 술 한잔하는 게 뭐 어렵나요, 제가 한잔 사죠.”
시간제한에 쫓겨 혼자 앓느니, 술 한잔으로 잡생각을 털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더불어 강림에게 자신의 고마움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동네 슈퍼에서 술과 고기를 좀 사와 공터에서 구워 먹으면 꿀맛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강림이 약간의 오해 있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멈춰서서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재운을 보며 그가 쑥스러운 듯 양쪽 검지를 빙빙 돌리며 속삭였다.
“그 왜 있잖아요. 여자들 많은 거기, 클럽···. 힛!”
“뭐, 인마?”
입에서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
“야, 나 처음이라 무지 떨려.”
강림이 흥분한 듯 외쳤다.
“사실 나도 처음이야.”
재운도 못지않게 들떠 있었다.
서로 예의 바르게 욕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둘은 친구가 되었고,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어차피 영혼에게 나이란 건 무의미했다.
직위나 서열이 신분을 나눌 순 있었지만, 신분 높은 양반이야 별로 만날 일도 없었다.
그렇게 매우(?) 친한 사이가 된 둘은 동네 호프집에서 거하게 회포를 풀었다.
술이 적당히 들어가자 강림이 2차를 꼬드겼고, 술기운에 둘은 여자가 많은 유흥가 클럽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둘 다 유흥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상식적인 수준에서 제법 이름을 들어본 강남의 모처를 목표로 잡았다.
택시를 타고 한걸음에 달려온 둘은 번화가 입구에 내려 촌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저기 어때?”
“에이, 사람이 별로 보이질 않잖아?”
거리 곳곳에 있는 휘황찬란한 간판을 보며 나름 품평회를 하고 있었다.
이왕 마음먹은 거 확실하게 놀아볼 생각이었다.
“근데 여긴 어디냐, 행인도 별로 없고···?”
더 좋은 곳을 찾던 그들의 발길은 어느새 외딴 길에 닿아있었다.
휘황찬란한 길 뒤로는 음습하고 적막한 골목이 늘어서 있었다.
짝! 아악!
저 앞에서 손찌검하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뭔가 싶어 궁금한 촌놈 둘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응, 너는?”
그들에게 다가간 재운이 의외의 인물을 보고 놀랐다.
그의 앞엔 거즈로 얼굴과 귀를 감싼 범모가 서 있었다.
“여어, 이게 누구야? 반장을 여기서 또 보네. 역시 우린 인연이 있나 봐. 낄낄!”
술을 먹었는지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입에선 달콤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재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들떴던 기분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술에 취한 범모가 때린 여자가 뺨을 가린 채 길가에 앉아있었다.
긴 생머리에 붉은 립스틱, 짧은 치마에 큰 귀걸이를 단 여자도 낯이 익었다.
소정식품 사장의 딸이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눈치 없는 강림이 둘을 보며 물었다.
“이건 또 뭐야?”
범모가 눈을 부라리며 강림을 노려보았다.
“이 양반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하셨네.”
강림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재운이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사, 상관 마세요. 남의 일에···.”
소정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거절했다.
“오호라, 서로 구면이지. 너도 소문 듣고 왔나 보네. 이년이 여기서 일한다는 거.”
범모가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술주정엔 깊은 분노가 배어 있었다.
“내가 어디서 일하건 너한테 무슨 상관이야, 왜 나한테 함부로 손찌검하는 건데? 무슨 자격으로···.”
그녀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쌍꺼풀 있는 긴 속눈썹 안으로 눈물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시발, 이러려고 그렇게 도도하게 굴었냐, 겨우 여기서 이 짓 하려고 날 그런 눈으로 쳐다봤었냐고?”
그녀의 말이 화를 키웠는지 범모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가 네 소문 못 들었는 줄 알아? 너 때문에 인생 망친 여자가 학교 안에 얼마나 되는지를···.”
억울한 심정에 그녀도 악을 썼다.
엄마를 일찍 떠나보낸 후 늘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빠가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와 밤잠을 설쳤다.
곧 닥쳐올 어려움에 대해 그녀도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친의 낯선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두려움은 자꾸만 커져갔다.
결국, 그녀는 고민 끝에 학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처음엔 아르바이트를 알아봤지만, 그 돈은 자신이 받던 용돈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다.
더 높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마담이 자신을 보며 높은 급여를 약속했다.
각오는 했지만, 첫 출근부터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첫 호명으로 들어간 방에서 범모를 만났고, 지금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범모가 그녀에게 미행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나한테 고분고분하기만 했어도 내가 왜 그런 것들에게 손을···.”
그녀의 말은 범모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초에 모든 잘못은 그녀에게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벌레 보듯 했다.
나름 사는 집이라 돈으로도 꼬실 수 없었다.
안달이 났다.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이 그를 미치도록 괴롭혔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린 숙제의 목표를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로 정했다.
2년을 기다린 끝에 결국엔 그 회사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벌레 보듯 했다.
그 도도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도도한 매력을 꺾을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룸살롱이라니.
자신을 무시하던 그녀가 제 발로 몸과 영혼을 파는 시궁창으로 기어들어 왔다.
‘고작 이거였어, 이러자고 그렇게 값비싸게 군거야.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수모를 당한 줄이나 알아? 으득!’
갈증만큼이나 큰 분노가 머리를 가득 메웠다.
앞으로 내딛는 발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런 개 같은 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퍽! 쿠당탕!
그와 동시에 그가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만하지!”
재운이 그녀 앞에 기둥처럼 서 있었다.
- 작가의말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만렙용병 재벌 성공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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