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2)
일행이 들어선 곳은 말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풀 한 포기 없는 회색 공간 한가운데 엄청난 규모의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호수 한가운데 외길로 이어진 둥근 섬이 있었다.
둥글고 평평한 섬 위에는 삼층으로 된 석조건물이 서 있었고, 건물의 꼭대기엔 거대한 크기의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응, 저거 설마 안테나?”
재운이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접시의 한가운데엔 긴 작대기가 꽂혀있었다.
아무리 봐도 위성 신호를 받는 파라볼라 안테나였다.
고물상에도 하나 달았었기에 착각할 수가 없었다.
“휴우~! 그냥 못 본 것으로 해주세요.”
놀라는 그를 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의 주인은 그녀의 부친이었다.
말년의 휴식을 즐긴다는 핑계를 대며 미우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명계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에다 살 곳을 만들고는 제일 먼저 저 안테나를 달았다.
안테나를 통해 세상 모든 차원과 닿아있는 인드라망에 접속했다.
그리곤 말릴 틈도 없이 인드라망 안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흘렀다.
인드라망 안에서만 살고있는 미우왕은 모르겠지만,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이곳으로 온 모든 이들은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마 몇 년에 한 번씩 외부침입자가 들어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행사라도 없었다면 정말로 모두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이곳의 생활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게다가 가뭄에 콩나듯 들리는 방문자들은 한결같이 저 안테나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러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들 똑같이 비웃음을 날렸다.
미우왕이 명계에서 덕질한다는 소문은 이미 전 차원에 퍼져있었다.
하나의 차원계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던 미우왕은 그렇게 야망도 능력도 없는 등신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재운은 거대한 크기의 안테나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강림도 시선을 마주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찾는 명계의 덕후가 이곳에 분명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를 만나 아이템만 찾으면 퀘스트는 쉽게 끝낼 수 있었다.
호수 위에 놓인 외길 끝엔 원형의 석조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 건물 위쪽에 달린 안테나가 조금씩 위치를 옮기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건물 안으로 들어온 일행에게 그녀가 말했다.
일 층 로비 같은 장소에 그들을 남겨두고 그녀 혼자 중앙에 놓인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그녀가 이 층 난간에서 모습을 보이며 그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길게 늘어진 대리석 계단을 오르니 오페라 하우스 같은 이 층의 전경이 드러났다.
격조 높은 유럽의 왕궁 같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문 앞으로 일행을 안내한 그녀가 문전에서 일행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분 모두가 함께 들어갈 순 없습니다. 대표로 한 분만 먼저 입장할 수 있어요.”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누가 대표인지를 물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이 재운에게 모여들었다.
그녀가 그를 주시하자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일행의 대표는 저지만 미우왕님과 안면이 있는 쪽은 이쪽입니다. 최소한 둘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안됩니다. 접견 인원은 딱 한 명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그 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릴게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강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을 둘러본 재운이 그녀를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른 이들이 일행을 대기실로 인도했다.
“대왕님이 청하신 분을 모셔왔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뒤에 있던 재운의 눈에 꼬리 달린 그녀의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흠흠!”
그가 겸연쩍어하며 연신 마른기침을 뱉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진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펼 때가 돼서야 겨우 눈을 뗄 수 있었다.
“하하하! 젊구나, 젊어!”
방 안엔 반 층 높이의 단상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단상의 한가운데 계단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호탕한 웃음소리를 좇아가 보니 둥글게 말린 거대한 뿔을 단 장년의 남자 하나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체구는 매우 컸다.
어림잡아도 성주신의 배는 되어 보였다.
관우처럼 검고 긴 수염이 턱을 가리며 가슴께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얀색 비단에 금실이 박힌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남자가 앉은 책상 위엔 거대한 모니터가 올려져 있었다.
비스듬히 앉아서 재운을 내려다보는 그의 자세엔 자연스러운 위엄이 배어 있었다.
미우왕의 웃음소리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살짝 재운을 째려보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눈앞에서 엉덩이를 깐 네 잘못이 더 큰 게지. 보이는 걸 본 게 무슨 잘못일까.”
“엉덩이를 누가 깠다고 그러세요.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잖아요.”
“아이쿠 이런, 내가 널 화나게 했구나. 애비가 미안하다, 미유야!”
모습과는 다르게 미우왕은 딸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흠흠, 그래 나를 만나자고 했다고?”
“네, 대왕님!”
“무슨 일로 찾아온 ···. 응, 넌 인간이로구나?”
그를 바라보던 미우왕의 눈이 커졌다.
미우왕의 말을 들은 미유도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인간에 대해선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보았을 땐 분명 그의 전신에서 신의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렇기에 그가 인간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미우왕도 오랜만에 본 인간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호오, 인간이 용케도 이곳 명계까지 찾아왔구나. 네 몸의 기운을 보아하니 신물이라도 삼켰으렸다. 내 말이 맞지?”
재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적으로 말을 아껴야 할 때란 걸 알 수 있었다.
순순히 시인하자 그가 무릎을 '탁' 치며 좋아했다.
“캬~! 역시 내 촉은 아직 녹슬지 않았어. 그래, 네가 이곳까지 온 목적이 무엇이라고?”
“많은 곤충을 담을 아이템을 사기 위해왔습니다.”
“뭐라, 아이템?”
그의 대답을 들은 미우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왠지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험험! 얘야, 넌 이제 나가보려무나. 얘기는 우리끼리 할 터이니.”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긋하게 양해를 구했다.
나긋한 그를 노려보며 무엇인가 한바탕 쏟아낼 듯하던 그녀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표정을 푼 미우왕이 손을 까딱거리며 그를 가까이 불렀다.
“자자, 우리 다시 한번 말해보자고. 어떤 아이템을 원한다고 했지? 어디까지 알아보고 온 거야? 설마 고마왕 그놈한테 먼저 갔던 건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근엄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앉은 의자를 손으로 치며 여기 앉으라는 시늉까지 했다.
고철을 대량으로 사가는 중간업자처럼 변해버린 미우왕를 보며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정말 고마왕 그놈한테 먼저 갔었던 거야? 그놈은 물건도 볼 줄 모르는 잔챙이에 불과해. 내가 거래하는 것 중 어느 하나도 그놈 물건보다 못한 것이 없어. 자네도 잘 알겠지만···.”
고마왕이란 이름만 나오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품새가 어지간히도 그 인물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차, 이런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네. 자네가 좀 이해하게. 대면판매는 여기 온 이후 자네가 처음이거든.”
그가 쉼 없이 입을 놀리며 모니터를 돌려세웠다.
모니터 위엔 리스트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게 현재 내가 보유한 아이템이야. 이 중에서 곤충을 담을 만한 것은 요런 것들이지.”
딸깍, 딸깍!
미우왕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그곳엔 5개의 품목이 적혀 있었다.
“이거 내가 참 어렵게 구한 거야.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는 거지. 자넨 상상도 못 할 만큼 먼 차원에서 집이나 차를 축소해서 가지고 다니려고 만든 캡슐형 아이템으로써···.”
그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어떤 물건이라도 보지 않고 그 물건의 상세한 제원과 사용법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얘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그 물건이 사고 싶어질 정도였다.
“저기···.”
“어때, 이 정도면 자네도 만족하겠지? 혹시나 못 고르겠으면 두 갤 사는 것도 추천하네. 내 특별히 보너스로 다른 아이템도 하나 끼워주지. 자넨 정말 복 받은 거야, 하하하!”
무엇이든 팔겠다는 집념이 그의 말투에서 느껴졌다.
그는 아이템 거래 자체를 너무도 좋아하고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건···.”
“뭐야, 이것 중에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는 거야? 이런, 내가 자네 안목을 너무 얕봤나 보네. 내 먼저 사과하고 이번엔 진짜배기를 보여주지.”
“저기 제가 이걸 사려면 무엇을 걸어야 하는 겁니까?”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그의 수다 사이에 어렵게 말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그의 행동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그가 불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너 초짜였냐? 그런데 왜 초짜라고 말을 안 했어. 이거 괜히 헛심만 썼잖아, 에잉!”
태도까지 불량해지며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말할 틈을 안 줬잖아요. 전 그저 아이템을 살 방법을 찾아왔을 뿐입니다. 속인 게 됐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됐어, 그러면 또 내가 뭐가 돼. 넌 그냥 속인 놈으로 있는 게 진정으로 날 위하는 거야. 그냥 나쁜 놈으로 있으라고.”
그가 불퉁거리며 헛소리를 해댔다.
왜 강림이 괴팍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를 탱탱볼 같은 인물이었다.
이게 덕후란 존재들의 특징인 걸까?
“그래, 어디까지 알고 왔어?”
“뭘 말입니까?”
“아이템 거래 방법 말이야, 꼭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 알겠어?”
“네.”
“어쭈, 이놈 말하는 것 봐라. 뻔뻔하네.”
슬슬 재운도 열이 받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부당한 일을 연이어 겪었기에 일단 뚜껑이 열리면 이성은 저만치 날아갔다.
“그냥 ‘아이템이란 걸 거래하는 인드라망이 있다.’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건 누가 알려줬는데?”
“밖에 있는 강림 차사가 알려 줬습니다.”
“누구, 강림 차사? 걔가 날 어떻게 아는데?”
“예전에 심부름 왔었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럼 걔도 여기로 오라고 해봐. 얼굴을 보면 기억이 나겠지.”
“함께 온 일행이 둘 더 있는데 그들도 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뭐, 안 될 거야 없지. 다들 오라고 그러지 뭐.”
딱!
미우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잽싸게 남자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미우왕이 눈짓하자 재운은 남자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둥근 건물의 복도를 지나 근처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강림이 신음을 내며 그를 반겼다.
“케켁, 재운아. 나, 나 좀 살려줘. 제발!”
그는 미유에게 목이 잡힌 채 두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강림이 앓는 소리를 하며 다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의 목을 쥔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를 보며 재운이 입을 열었다.
- 작가의말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만렙용병 재벌 성공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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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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