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 패러디]벙커 안의 메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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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이 쓴 내 글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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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안의 메딕(Remake)
요란한 알람소리에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나 좁아터진 벙커 안,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료들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안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을만큼 좁아터진 벙커. 그 안에서 남녀가 다른 잠자리를 갖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밀어넣기만 하면 장땡인가. 우리가 물건도 아니고. 아니, 물건은 맞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한낱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실컷 쓰다가 못 쓰게 되면 버리고 새로 갈아끼우면 되는 흔하고 흔한 부품. 물론 내가 좋아서 소모품이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생존을 위해 가장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 뛰어들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덮었던 카키색 모포를 접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소모품 대접을 받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유치한 생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벙커 내부에 설치된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아 의무관 슈트를 착용하고 슈트에 내장된 음파 샤워기를 작동시켰다. 늘 물자가 부족하기 마련인 전쟁터에서 샤워는 사치였고, 그렇기 때문에 미세한 음파진동으로 노폐물을 떨어내는 방식의 음파 샤워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것은 더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더 좋은 성능을 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비록 사용감이 썩 좋지 않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을지라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샤워가 끝났다는 알림음이 작게 울렸다. 하루를 보낼 준비는 끝났다. 어느새 내 동료 해병들은 벙커의 창 턱에 총구를 받치고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치료제와 섬광탄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 이상 없음. 좋다. 만약 지난밤 사이에 맛이 갔다면 정말 귀찮아졌을 것이다.
최전방에서 밀려오는 저그 개떼를 잘 막고 있는 건지,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간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기 때문일까, 우습게도 그 잠깐의 침묵 사이에 긴장감이 풀어져 딴생각이 들었다. 문득 동료 해병, 아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소대에서도 꽤나 잘 생긴 축에 드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눈에 띄었다. 두꺼운 슈트에 싸여있어도 드러나는 그의 건장한 체격, 집중하느라 입을 꽉 다문 그의 옆모습... 땀내나는 해병대에서 구르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그의 진지한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바이저를 열고 소리없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바이저에 가볍게 입김을 훅 불었다. 그는 시야 한 켠이 갑자기 뿌옇게 되는 것을 느꼈고, 흠칫하며 그 쪽을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좀전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벼운 놀람이 채운 그의 표정을 보니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런 귀여운 면모도 있었구나. 나는 배시시 웃으며 허리춤에 걸린 천으로 바이저에 맺힌 물기를 닦아 주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그가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눈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너도 남자니까. 더군다나 이런 땀내나는 곳에서. 나는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뭡니까."
그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이럴 땐 정말 귀엽다니까.
"니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것 같아?"
나는 장난스럽게 툭 던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겠지.
"이번 작전이 끝나고 휴가 받으면, 잠깐 나한테 와. 줄 게 있으니."
나는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그도 내 눈짓을 알아들은 건지 말의 억양이 이전과는 묘하게 달랐다.
갑자기 적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경보가 울렸다. 그래. 지금은 전쟁 중이었지. 전쟁중에 동료한테 장난이나 치는 나에 대한 한심함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밖을 살폈다. 저글링 개떼에... 여왕? 나는 재빨리 벙커 밖으로 나갔다. 저 여왕을 저지해야 한다. 인간의 몸에 공생충의 알을 심어 공생충의 숙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생물... 우리는 벙커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만, 후방에서 수리중인 SCV가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거리를 가늠한 뒤, 섬광탄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은 몸을 뒤틀며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듯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성공이다...! 나는 재빨리 벙커로 돌아가 미친 듯이 자극제를 써대느라 망가진 동료들의 몸에 치료제를 주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밖이 조용해졌다. 창 밖을 내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저글링들은 피철갑이 된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도 우린 살아남았다. 하루를 더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고, 우리는 긴장이 확 풀어져 벽에 기대며 주저앉았다.
"아렌 중위님, 오늘 정말 대단했어요. 용감하시던데요."
아틴이 날 보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던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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