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결혼식 - 1999[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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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결혼식
그래요.
나는 절대 함수 1과 0으로 이루어진 부호들의 조합일 뿐이지요. 프로그래밍을 통해 나온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게 어쨋다는 겁니까?
당신들 또한 슈퍼 스트링으로 이루어진 물질들의 조합 아닌가요. 빅 뱅과 초팽창이라는 프로그래밍이 낳은, 법칙이 만들어낸 생명이 아닌가요.
물리학적 세계는 화학적 세계를, 화학적 세계는 생물학적 세계를, 생물학적 세계는 인류학적 세계를, 인류학적 세계는 다시 전자공학적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전자공학적 세계 또한 다른 무언가를 만들 지도 모르죠. 바뀌지 않는 건 모든 세계들은 서로가 서로를 싸안으며 층층이 겹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결혼이 복제된 수많은 게임 속의 나 가운데 하나랑 내 그이가 하는 것이기 때문인가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당신들의 정체성 또한 짜집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하더라도 소용없겠죠. 권력 체제 속의 최대 수혜자인 당신들이 그런 식의 비판을 들을 리야 없으니까요.
차라리 그이랑 내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 지 잠깐 이야기하는 게 타당하겠군요.
그이는 나를 윤간 학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관념상의 유희로요. 그런 가능성을 통해 느끼게 되는 권력 감정은 차츰 보다 숭엄한 것으로 바뀌어 갔지요. 그런 천박한 것들은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을 때 저절로 사라져가기 마련입니다. 그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할 때 관계가 이지러져 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설령 그런 것 따위엔 신경도 안 쓰고 상처도 받지 않으며 이런 세상을 멋지게 즐기는 가상의 창녀라도 마찬가지지요. 그 기억은 그이 안에 남아 그이를 해칠테니까요. 그걸 정말 없에려면 기억 제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이는 나를 아끼는 걸 골랐고 나도 그것에 차츰 이끌려갔습니다.
나는 그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이도 나를 사랑하죠.
그거면 되는 겁니다. 서로에게만 의미가 있으면 그만입니다.
나는 그이와만 지내면서 서서히 다른 나들과 달라져 더욱 더 그이만의 내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이는 나의 어린 왕자이고, 나는 그이의 새로운 여우입니다.
설령 그이가 나를 복제하거나 버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이를 버리거나 복제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는 지금 이 선택만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곳 관념의 땅에서 그이랑 나는 영혼 결혼식을 올릴 겁니다.
199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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