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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라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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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라토
작품등록일 :
2017.06.25 11:55
최근연재일 :
2024.05.21 10:58
연재수 :
28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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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1
글자수 :
746,320

작성
17.06.27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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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브레이브 블러드 - 1999[판타지](미완)

DUMMY

브레이브 블러드(Brave Blood)







1.괴물의 손가락 위에서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벌건 로사스가 더욱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아텐에게 외친다.

-전등 좀 고치라고 그랬잖아!

아텐은 히죽거리더니 말한다.

-너 지금 어떤 꼴인지 아니.

-몰라.

-네 애인한테 채일 때 같에.

-내가 찬 거야.

-같은 이야기잖아.

-그래. 그래. 같은 말이다. 미움이랑 사랑이 같다고 말할 참이지?

-그렇다.

-둘은 달라. 무의식 속에서는 같겠지. 하지만 표현하는 바가 다를텐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밀지 마.

-그러길레. 전등 바꿔놓으래니까. 어두워 죽겠네.

-나는 하프 오크라서 잘만 보이는 걸.

로사스가 깜짝 놀라며 아텐을 본다. 그러더니 찬찬히 훑어본다. 보통 키에 아래쪽이 주로 커다란 몸집. 나랑 지금까지 목욕도 같이 한 친구가 그런 엽기적인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말인가. 하프 오크가 되려면 단순한 혼혈로는 택도 없다는 걸 로사스는 잘 알고 있다. 마법사랑 생명공학자가 달라붙어서 오크랑 인간 가지고 씨름해야 가까스로 애를 받을 수 있다.

-고맙다, 아텐. 너에게는 평생 묻고 살아야 할 비밀이었을텐데. 비록 다른 종족이지만 그토록 나를 믿어주다니. 근데 넌 뚱뚱하긴 하지만 키가 너무 큰데.

-....농담이야.

-쯥. 요즘에 하프링들이 너무 많아서....

복도는 어둑어둑하다. 아텐이 긴장했는지 갑작스럽게 말이 없어진다. 로사스는 그런 아텐을 힐긋 본다. 어두워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혼자 어둠을 걸을 때 가끔 느꼈던 기분이 되살아난다. 저 앞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얽키고 설켜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어두운 복도는 인간의 손길을 거쳐 이룩된 네모 반듯한 형상인데도 동굴을 느끼게 한다. 사실 복도랑 불을 환히 밝힌 동굴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사스는 가벼운 어색함을 깨고자 말을 꺼낸다.

-이번 대상은 뭐야?

-나도 아직 몰라. 사장은 알겠지.

-앞을 조심해. 갑자기 문이 튀어나올 지 모르니까. 어쿠!

-네가 말하고 네가 박아도 괜찮은 거냐?

-밀기나 해. 가만 뭔가 손에 걸리는데.

로사스는 손에 걸리는 걸 떼서 더듬어본다.

-종이 조각 같은데.

아텐이 품 속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쳐본다. 로사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텐을 본다.

-그걸 왜 여태껏 안 쓴 거야?

-사장이 복도를 어둡게 만든 거야.

-구두쇠 같으니. 술값을 죽어라고 안 낼 때 알아봤어. 그렇게 술값을 안 내려고 들으니 얼굴이 성한 날이 없지. 나이는 먹어가지고 주책이야.

-그게 아닌 거 너도 알지?

-안다. 우리가 어둠에 익숙해지라고 그런 거잖아. 근데 그 손전등 윌로위스퍼가 들어 있는 거냐 아니면 전구냐?

-전구야.

종이 조각에는 이번 해부 대상이 갓 죽은 싱싱한 엘프라고 쓰여 있다. 표현 한 번 고약하다. 가만, 엘프! 둘이 종이 조각 밑 부분을 본다. 죽은 시각이 7시 반이니까 2시간 지났다. 언제 부활할 지 모르는 엘프를 2시간 씩이나 그냥 내버려 둔 건가?

둘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로사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벽장을 열어재낀다. 예상대로 그 속엔 적외선 안경이 달린 가면이 있다. 로사스가 그걸 아텐에게 건내고 자신도 쓴다.

-흠, 이제 좀 잘 보이는군. 그런데 빛깔 판단도 할 수 없는 이딴 안경을 쓰고 해부를 해야 되나.

-어쩔 수 없잖아. 엘프는 가시 광선이 안 비치는 곳에서는 투시를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이 방 안이 흑체 비슷해지도록 마법을 건 거야. 엘프는 적외선 뿐아니라 장파에서 감마선까지 빛의 모든 스팩트럼을 볼 수 있지만 투시 능력의 제약 때문에 이 가면 너머는 못 본단 말야. 혹시 엘프가 깨어나 우리를 알아보면 골치 아프잖냐.

-내가 그걸 다 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말하는 건 무슨 심보냐? 여기서 싸우면 서로를 엘프로 착각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으스스한 농담이군.

로사스가 해부용 칼을 집어든다. 엘프는 생명력이 강한 종족이라 아무리 찔러도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데다, 가까스로 죽여놓으면 곧 연기로 흩어져버린다. 그 연기는 엘프가 태어난 고향으로 가서 엘프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하려면 방부제를 덕지덕지 뿌려야한다. 의외로 방부제가 쓸모가 있다. 세균을 매개체로 쓴다면 가능한 일이지. 방부제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걸 보면 세균을 매개체로 쓰는 건 처음 뿐인 것 같았다.

지금 엘프는 수술대 위에 단단히 묶여있다. 깨어나더라도 로사스랑 아텐에게 피해를 주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여자 엘프면 좋겠는데. 로사스가 입맛을 쓸쩍 다시고는 아텐에게 묻는다.

-어떻게 잡아왔데?

-청부업자한테 시켰겠지.

사장다운 짓이다. 평소엔 사람 좋은 중년 아저씨처럼 굴어도 알고보면 무서운 사내다. 그러니 아텐이나 로사스나 꼼짝없이 잡혀서 이딴 일이나 돕고 있지. 로사스가 말한다.

-배부터 째자. 근데 이 엘프, 여자네.


오늘도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시간에 이르렀다. 피비린내 나는 해부실에서 꼬박 시간 보낸 게 보람찬 일이라면야.

-만세다! 드디어 경쟁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나와 안전한 나의 레어로 돌아가는 순간이군.

-경쟁자? 사원이라고는 나랑 너 둘 밖에 없는 쥐구멍만한 회사에 무슨.

-아텐, 너도 마찬가지야. 흐흐, 좀 살벌한 말을 해주랴, 하프 오크 씨.

-하프 오크라니?!

-생각해보니 너는 하프오크랑 많이 닮았어. 조금 들창코고 턱도 살짝 늘어져있고 배불뚝이고. 하프 오크가 만약 있다면 딱 너겠는 걸, 아텐.

-크아아! 세계 비만 연합에 고소해서 네 자격증을 박탈하겠다.

아텐은 학교 동창인 로사스를 잡으려고 뛰었지만, 평소에도 체력 단련을 꽤나 하는 편인 로사스를 잡을 수는 없었다. 로사스는 가방을 챙겨서 잽싸게 문을 닫고 가버린다.

잠깐 달리다가 멈춰 올곶게 걸어가며 로사스는 방금 해부를 끝낸 엘프에 관해 생각해본다. 역시 이상해. 내장 구조, 세포 구조, 호르몬 체계, 어느 것 하나 인간이랑 비슷한 데가 없어. 그런데도 어떻게 하프 엘프가 태어날 수 있는 거지. 자궁 비슷한 건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나중에 사장이 보여 준 사진을 보면 아까 해부한 엘프는 굉장한 미녀였다. 우욱, 메쓰껍다. 아까까지 멀쩡히 살아있었을 엘프를 해부했다는데서 오는 느낌이다. 학생 시절에 거진 다 떨쳐버린 감정이고 지금도 해부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안 느낀다. 하지만 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음, 아직 손을 씻지 않았군. 대충 수건으로 닦아낸 거니까 씻었다고 말하기엔 좀 어폐가 있다. 뭐 어때. 매독 환자 만진 손으로 아기 받아내는 의사들이 수두룩인데. 그래도 되긴 된다. 보통 균이 활동하지 못하게 마법 걸고 아기 받으니까. 하지만 로사스는 찜찜해진다. 집에 가서 깨끗하게 씻어내는 게 좋겠다.

-으아아아!

고블린 한 마리가 허둥지둥 로사스 쪽으로 뛰어온다.

다음 순간 욕잔치를 벌이며, 비명 지른 고블린을 쫓아온 건 오크들이랑 인간들이다. 길거리 깡패들끼리 뭔가 진지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로사스가 놀라며 길 옆으로 비켜선다. 이런 망할. 집이랑 회사랑 가까운 건 좋은데 왜 하필 이런 길에 있어야 하는 건지.

멀리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봐.

로사스가 재빨리 내려다본다. 앞에서도 약간 밑에서 들려온 것 같아서였다. 오크 한 마리가 2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데거랑 스몰 실드를 들고 라이트 레더를 입은 체 로사스를 올려다보고 있다. 스텐달 제국은 칼의 비교적 자유로운 유통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 왜냐. 도무지 규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데거 같은 건 얼마든지 숨어서도 만들 수 있다. 이러니 아무리 대단한 스텐달 제국이라도 창이나 마법이나 종교를 휘어잡을 수 있어도 칼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사회의 속성 앞에 선 오크가 로사스를 노려보고 있다.

오크가 말한다.

-돈 내 놔.

-없어.

-내가 우스워 보이나?

-데거랑 스몰 실드라. 매우 실용적인 무장이야. 키가 작으니 밑으로 파고들어서 데거를 위로 올려치겠다, 내리치는 롱 소드 같은 건 스몰 실드로 막겠다, 이거군. 몸도 가볍다면 마법을 외울 틈을 주지 않을 수 있겠군. 게다가 보기 보다는 힘이 세니 데거를 던질 수도 있고. 아주 좋아.

-...돈 내 놔!

-바로 그 점 때문에, 데거랑 스몰 실드는 오크의 한결 같은 무장이 되어 왔다. 견고함과 탄력이 강화되고 좀더 가벼워지기는 했어도 바탕 틀이 바뀌지는 않았지.

-놀리는 거냐?

-오크는 매복 습격 아니면 야간 기습 밖에는 할 수가 없지. 다리가 짧고 덩치가 작으니까. 멀리서는 마법사한테 토막나고 가까이 가면 긴 무기에 박살나는 건 피해야 하니까. 무기에 있어 길이는 곧 실력이지.

-이이이익!

오크는 뭔 소리인지 도통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로사스의 단조로운 어조 안에 숨은 비아냥거림만은 느낄 수 있었다. 로사스는 지금껏 마법을 외우지도 않았다. 오크가 데거를 치켜들고 달려온다. 로사스 키가 약간 크다는 걸 감안해도 그의 허벅지 까지도 안 오리만치 작다. 대책 없이 두껍고 털 많이 난 몸만 아니라면 아장아장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걸음걸이인걸.

로사스가 등에서 원 핸드 소드를 재빨리 꺼낸다.

-인간! 너 무기가 있었구나.

-당연하지.

로사스가 원 핸드 소드를 빙빙 돌리며 감아쥔다.

-참고로 말해주는데, 나 마법사야.

-마법사 아닌 인간이 어딨냐!

-요즘, 이라는 말을 빠뜨렸군.

-에잇! 디그.

저 오크도 마법사였다는 말인가. 이럴수가 있나. 아무리 시대가 시대라지만 어떻게 오크가 마법 공부를 했을까? 로사스가 놀라며 뒷걸음질친다. 로사스 앞의 땅이 푹 꺼지며 오크가 그 안으로 동댕이쳐진다. 갑작스런 로사스의 공격(?)에 오크가 발작하듯 데거를 던진다. 데거가 눈 앞으로 세차게 다가든다. 안 돼. 로사스의 오른손이 왼쪽 어께랑 포옹하려는 듯 싶더니 허리가 움직이며 반대편으로 밀린다. 로사스가 원 핸드 소드로 데거를 쳐낸 것이다. 데거는 벽에 가서 꽂힌다. 로사스가 손을 쫙 펴고 말한다.

-어떤 분입니까. 고맙습니다

위쪽에서 꼬장꼬장한 아줌마 목소리가 들린다. 로사스가 그쪽을 본다. 어께가 떡 벌어진 속옷 차림의 아줌마가 말한다.

-자수 놓는데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어! 너까지 빠뜨리려고 했는데 피한 줄 알아. 다시는 우리 집 앞에서 싸우지 말아!

-그러죠

자, 자수? 로사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허리가 로사스 허리 두 배는 됨직한 아줌마도 자수를 할 권리가 있지만 그걸 말해서 남을 불쾌하게 만들 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로사스는 여겼다. 볼일 없어진 아줌마가 창문을 세차게 닫는다. 성격 파탄자인 로사스가 이 정도로 끝낸 건 오크랑 싸워 이겨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싸웠는 지는 모르겠지만.

오크가 구덩이에서 힘겹게 기어나온다. 로사스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띄며 원 핸드 소드를 오크에게 겨눈다. 흐흠, 월급쟁이가 한순간에 협객으로 바뀌는 멋진 길거리로다. 그리고 그런 낮이다.

-방패 버려.

오크가 울쌍을 짓는다.

-어서!

오크가 스몰 실드를 앞쪽으로 넘긴다. 로사스가 스몰 실드를 발로 차서 튕겨오르게 하고는 붙잡는다. 될 거라곤 여기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가벼운 스몰 실드로구만. 치는 무기로는 못 쓰겠어. 로사스가 말한다.

-나와.

갑자기 오크 얼굴에 화색이 돈다.

로사스가 뒤돌아본다. 아까 지나간 오크들이 아까 도망친 고블린을 장대 위에 높이 세우고 거들먹거리며 오고 있다. 다행히 인간들은 없다. 로사스가 구덩이에 빠져 있는 오크를 원 핸드 소드로 겨누며 위협한다.

-날 그냥 가게 안 하면 이 오크를 죽이겠다.

오크들이 웅성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나서서 묻는다.

-뭐라고?

-날 보내라. 이 오크를 죽이겠다.

-죽이지 마!

-날 보내.

-안 돼.

-그럼 죽이겠다.

-죽이지 마!

로사스는 신경질을 낼 뻔한다. 돌겠군. 한 마디 이상은 사고 속도랑 기억 용량이 저등해서 이해를 못 한다지.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나. 객기로 한판 벌린 게 이 꼴이 되는군. 이게 다 엘프 때문이다. 엘프를 해부하고나서 기분이 내내 나빳다. 그렇게 해부학 교재랑 다른 몸은 처음 봤다. 하긴 인간 해부학 교재 가지고 엘프를 해부했으니 다를 밖에 없나. 그런데 왜 겉보기엔 거의 같은 거야? 이상한 걸로 화가 나는 판에 오크가 시비를 걸었고 로사스는 열 받은 김에 한판 붙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로사스가 말한다.

-오크 동지 여러분!

-왜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오크 가운데 가장 폭이 넓은 녀석 하나가 어금니를 누렇게 번뜩이며 나선다. 로사스는 갑자기 치과 의사가 된 느낌으로 오크를 바라본다. 연구 대상이 될만한 이빨이야.

어금니가 말한다.

-어서 풀어줘. 그러면 보내주마.

-오호, 너랑은 이야기가 될 것 같군. 오크는 동료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 그건 옛날이야기인 모양이군.

-사회성이 있는 동물이라면 그런 짓은 못 하지.

-너 혹시 하프 오크 아냐? 참 말 잘 한다.

-물론.

-진짜?!

-말 잘 한다고.

오크의 농담이라. 그런데 저 오크들 전혀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아. 언젠가 배운 적이 있어. 오크는 요즘엔 동료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못 구한다고 슬퍼하거나 악 쓰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인 종족도 아니다. 제길. 경찰은 언제 오나.

로사스는 구덩이에 있는 오크랑 커다란 어금니를 헤 벌린 입을 통해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는 덩치 큰 오크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로사스가 구덩이에 있는 오크를 본다. 풀려나면 잡아먹겠다는 눈초리다. 어금니 큰 오크가 말한다.

-그런데 어쩌지? 애들이 짜증을 내고 있어. 그냥 밀어붙이자는데.

-그러면 이 녀석은 반드시 죽는다.

-애들이 짜증 낸다니까.

-짜증내라 그래. 니네가 조금만 오면 이 녀석 목은 날아간다. 그리고 또 하나 니네에게 불리한 점이 있어. 난 죽지 않아, 여기서는.

오크들이야 알 리가 없지만, 로사스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는 그만의 비밀 믿음을 털어놓은 셈이다.

고향 집 앞에 있는 빈터에서 두 사내가 싸운 적이 있다. 둘 다 처음 보는 사내들이었다. 한 명이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였고 살인자는 시체를 들쳐엎고 사라졌다. 고향은 아직도 신사들끼리의 결투를 인정하는 곳이기에 살인자가 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같은 사건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 로사스가 봤기 때문이다. 한 번은 5살 때, 또 한 번은 12살 때. 똑같은 빈터, 서로 다르게 생겼지만 칼로 찌르는 동작은 똑같았던 두 사내. 로사스는 5살 때 빈터로 무심코 걸어들어가다 그 살인 장면을 처음 보았다. 온 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이질스럽게 느껴졌다. 살인이 지나가고 살인자가 시체를 들춰엎었을 때 웬 소년이 로사스를 치고 달아났다. 로사스는 힘없이 넘어져버렸다. 그리고 7년 뒤 로사스는 빈터로 무심코 들어갔다가 7년 전이랑 똑같은 자세로 한 사내가 다른 사내를 찌르는 걸 보았다. 순간 밀려온 느낌은 7년 전이랑 똑같았다. 로사스는 너무나 무서웠고 미친듯이 달렸다. 그리고 5살로 보이는 한 아이를 치고 달아났다.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같은 마을에서 가끔씩 보아왔던 꼬마랑 형이었으리라. 로사스는 그 일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고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살인자랑 살해당한 이 가운데 하나가 같은 운명을 걷는 이일 거라는 믿음이 새록새록 생겨나 자리잡았다. 로사스는 그때부터 목검을 잡았다. 죽는 쪽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고향에 가기는 싫었지만, 또 알아?

학교에서 로사스는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 어떻게 불리워지는 지 알 수 있었다. 크로스 두머(Cross Doomer). 운명이 엇갈리는 자들. 비슷한 운명을 지닌 자들 끼리는 서로 밀어내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엇갈리며, 다른 운명을 지닌 자들 끼리는 서로 만날 수도 있지만 결국엔 멀어져간다는 이들이었다. 자신에게는 커다란 뜻을 가지나, 실용성이 없어서 직업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지. 하필 별 쓸모도 없는 능력(?)을 타고났담.

오크들은 조금씩 로사스에게 다가오고 있다. 워낙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한꺼번에 못 오는 것이다.

-오면 죽이겠다.

-죽여.

-거짓말 하는 줄 아나.

-그렇게 생각 안 해.

-이건 정당 방위니까 괜찮아.

구덩이에 있는 오크가 빽 소리친다.

-뭐가 정당해!

정당이라는 말의 개념은 조금이나마 박혀 있는가 보다. 로사스가 조금씩 뒷걸음질 칠 것만 같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로사스가 더욱 얼굴을 굳히며 눈을 매섭게 뜬다. 어떻게 한 명도 안 나와 볼 수가 있나. 하다 못해 메신저로 신고는 할 수 있잖아. 이래서 도시가 싫어. 서로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 가까이 붙어서 스트레스가 올라가고 경쟁이 세지며 권력이 집중될 여지가 커진다.

-오크들!

아앗.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로사스는 신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울 줄 몰랐다.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와 더불어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엘프가 로사스 옆에 선다. 실제로는 멀리 뛰기를 한 거지만 로사스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아까 여자 엘프를 해부했다는 게 떠오르자 뭐가 올라오려고 한다. 혹시 그 엘프가 부활한 거 아냐. 내 손 밑에서 흩어져버리는 걸 봤는데.

금발을 위로 묶어서 조금 짧고 뽀족하게 친 다음에 왼쪽으로 슬쩍 뉘여 놓았다. 그 결과 드러나게 될 옆은 아예 밀어버렸고 뒷머리는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황금 파인애플 머리다. 새까만 원피스는 무릎 밑까지 늘어져 있지만 옆을 트여 놓아 새하얗고 윤기 나는 허벅지의 고운 곡선이 드러난다. 날나리 엘프든 뭐든 다행이다. 엘프 사회에서 어른이라 인식되는 모든 엘프는 사법권을 지닌다. 엘프는 걸어다니는 법전이기 때문이다. 즉 엘프는 설령 드래곤이라도 마음대로 처형해버릴 수 있다. 드래곤도 사법권을 가지고 있어서 골치가 아프겠지만. 엘프가 더할나위 없이 부드럽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테르에린이라고 해요.

-테르에린, 처음 뵙습니다.

-네. 잠시 지켜봤는데 서로 더 다치기에 앞서 그만하고 물러나서 다른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보는 게 어때요?

테르에린이 허리춤에 찬, 아니 등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어 두 손으로 쥐고는 오크들 쪽을 노려본다. 호리호리한 체격, 미소까지 띈데다 거룩하게까지 느껴지는 예쁜 얼굴,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뽀족한 귀. 어디를 봐도 엘프인데 행동은 트롤 같군. 최근에야 밝혀진 거지만, 엘프랑 트롤은 단짝이었다. 둘 다 숲을 좋아하니까 의기투합한 것이다. 아마 테르에린은 트롤이랑 하도 같이 다녀서 물든 것 같에. 움직임은 진짜 우아하다. 몇몇 동물에게나 허락된 올곶고 정밀한 행동거지. 세계의 참다운 두발 동물은 엘프일 것이다. 움직임이 끝내준다. 로사스는 해부를 했던 엘프가 생각나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테르에린을 바라본다.

오크들이 마구마구 웅성거리면서 슬금슬금 물러난다. 엘프랑은 안 싸우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대 정령 나와라!, 파이어 스워웜! 엘프라면 가능한 저런 공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테르에린이 말한다.

-그쪽도 칼 치우시죠.

로사스는 말 잘 듣는 아이 같은 어투로 답한다.

-네.

로사스가 원 핸드 소드를 등에 있는 칼집에 능숙하게 꽂는다. 나도 이쯤은 된다고. 하지만 테르에린을 보니 자신이 드래곤 앞에서 입김 자랑 했다는 걸 금새 깨닫게 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브레스란 건 드래곤이 입김 세게 부는 느낌으로 퍼붓는 거다.

구덩이 안에 있던 오크가 로사스랑 테르에린을 살피면서 오크 떼 쪽으로 달아난다. 로사스가 말한다.

-머리가 멋있군요.

-아, 머리요. 아무리 볶아도 금새 풀어지더라구요. 그게 엘프 머리카락 특징이라나.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하긴 머리 볶은 엘프는 본 일이 없다. 앞으로는 나올라나? 로사스가 인사치례로 말한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난 경찰이 아니에요. 지나가다 도와준 거예요.

-정말 좋은 아가씨군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고마워요. 집이 어디죠?

-저... 그냥 인사인데요. 이럴 경우 대부분의 인간 아가씨들은 슬슬 저를 피하며 여러가지 핑계를 대던데.

-귀하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요. 더욱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더욱 무시할 수 없네요. 평소에 그런 경험은 안 좋은 추억으로 나타나겠죠. 꿈에 반영될 지도 모르죠. 저에게 차를 대접함으로서 그게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저를 안내해주세요.

엘프 맞나? 엘프의 성격의 공통점 : 엄청나게 낙천적이며 낙관적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감각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는데 뭐가 무섭겠나. 블랙 홀에 던져도 부활하고 고향을 다 태워먹어도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부활한다지. 엘프가 번식력이 좋고 팽창욕이 강했으면 세상은 엘프 판이었을 것이다. 테르에린은 틀림없는 엘프다.


로사스는 바싹 긴장하고 있다. 난생 처음으로 엘프를 집안에 들였기 때문이다. 이상해. 진짜 이상한 엘프야. 처음 만나는 엘프이므로 어떤 엘프든 로사스에겐 다 이상해보였을테지만. 로사스가 부엌에서 나와 조촐한 탁자 앞에 앉은 테르에린에게로 간다.

-따끈한 꿀물 차 대령합니다.

-트롤들이랑 제가 같이 많이 마시는 음료군요. 어쩌면 이렇게 잘 아실 수가 있죠.

역시 트롤한테 물든 거였어. 트롤은 야참으로 인간을 먹는 버릇을 가끔씩 발휘하는 종족이라는데.

-테르에린, 맛 있어요?

-제 입맛에 딱 맞네요. 정말 고마워요. 이런 재주를 가지고 계시는 지 몰랐어요.

-이 집에서 혼자 살다보면 이렇게 되지요.

-집이 이상해보이지는 않는데요.

-농담입니까?

-싱겁죠.

로사스는 눈앞에 있는 미녀에게 성욕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다시말해 대쉬하고 싶다. 그런데 엘프한테는 어떻게 굴어야하나. 인간끼리 연애에도 빠싹과는 거리가 먼 로사스인지라 다른 종족 간의 연애엔 당연히 더욱 경험이 없을 밖에 없다.

갑자기 불안감이 온다. 엘프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는 게 어떨까. 폴리모프한 그 무엇인가 일지도 몰라. 집에 들이기 전에 미리 했어야하는데. 오크들로부터 구해줬다는 데 정신이 팔려 경계심을 잊고 있었어. 로사스가 후회하면서 벽장을 뒤지더니 닿기만 하면 폴리모프가 풀리는 부적을 가지고 온다. 드래곤이면 어쩌지? 집 날아갈텐데.... 그러면 내 집만 부서지겠어 이웃 집들도 몽땅 날아가겠지. 허구헌날 부부 싸움에 아동 학대에 마약 거래에 도둑들끼리의 비밀 회동 장소에.... 테르에린이 드래곤이면 안 되는데, 부적 쓰지 말까. 그래도 안 하는 것 보다야 나을까?

-테르에린.

-네.

-이 부적에 손 좀 대시지 않겠어요?

만약 네가 이런 일에 거절하면 넌 엘프가 아니다. 테르에린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곧바로 부적에 손을 대어버린다. 로사스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며 테르에린을 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저... 옷 좀 벗... 아, 아니! 팔 좀 어께까지만 걷어주실레요.

-까닭은?

-엘프인지 아닌지 보려구요.

-아까 확인하신 게 그게 아니었나요? 저는 그런 줄로 알았는데요.

-이번엔 말씀드리기가 좀 뭐하군요.

-알았어요. 어떤 이유일지 추측이 안 되는 걸 보니 제 기억 안에는 없는 일인 것 같아요.

테르에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원피스를 벗어올린다. 우옷! 소매가 어께까지 안 올라가는 옷인 모양이다. 두꺼운 가죽으로 보였으니까 당연하다. 테르에린은 원피스 안에 가벼운 셔츠랑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테르에린이 인간 사회에서 하루 이틀 돌아다녔겠어. 아무튼 실망이 크다. 더욱 틴에이저 날나리 같아진 테르에린이 어께를 걷어보여준다. 아름답고 깨끗하며 동그스름한 어께다. 몸매 죽인다.

-몸매 감상이 끝나셨으면 옷 입어도 되지요? 더이상 보여드리는 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네

테르에린은 옷을 걸치더니 우아한 동작으로 걸친다. 진짜 닮았어. 엘프 나무를 지켜주는 댓가로 나오는 즙을 먹고 사는 엘프가 왜 육식동물의 눈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인간이나 오크나 사자나 가진 눈을 말야. 아름답고 순해보이면서 강한 의지가 새겨진 깊은 보라빛 테르에린의 눈이 야수의 그것과 닮아 있다니. 이런 질문은 독창적인 건 아니다. 여러 차례 여러 종족이 엘프에게 던진 질문이며 로사스도 이 점을 짐작하고 있다. 경박한 기분파인 로사스는 참을 수 없었다.

-왜 엘프의 눈은 인간이랑 똑같이 생긴 겁니까?

-엘프는 초식 동물이 아니니까 도망칠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몰린 두 눈은 원근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지요. 색감도 좋구요. 투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도 이 편이 낫답니다.


-그 뒤 어떻게 됐어?

-갈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게이트를 열더니 떠나더군.

건장한 편인 로사스가 머리를 휘젓는다. 아텐이 말한다.

-엘프 여자조차 너를 싫어하네.

-죽여버리겠어!

-역시 너, 애인이 널 버린 걸 아파하고 있었구나.

-아쉽게도, 그래.

아텐이 의자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굽히다가 바로잡더니 말한다.

-니 확인 방식 가운데 이상한 게 있어. 부적은 좋아. 그런데 어께를 보이게 한 건 문제가 있어. 물론 대부분의 다크 엘프가 어께 쪽에 악마의 문신을 새기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악마의 문신은 어디나 새길 수 있거든. 또 하나 악마의 문신은 덮어씌워서 가릴 수 있어

-테르에린이 다크 엘프일 지도 모른다는 거군.

-맞아. 좀더 확인 작업이 필요해. 필요하다면. 뭐 그런 엘프에게 굳이 관심 기울일 거나 있어. 일회용 생명의 은인일 뿐인 걸. 안 할 꺼지? 틀림없이 안 할 꺼야.

-네가 나냐.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냐?

-쉬는 시간이 끝났다. 학교에서 그렇게 지겹도록 시간 관리를 하는 까닭은 뻔한 거지.

일 밀린 게 많았기 때문에 아텐이랑 로사스는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일이랑 싸우기 위한 모험에 뛰어든다. 서류를 정리하자.

로사스는 회사 건물 안으로 집을 옮길 작정이다. 아텐도 그렇게 했는데 로사스라고 못할 건 없다. 회사 건물은 드워프가 만든 살아있는 건물이다. 실제로 건물은 숨을 쉬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미미한 진동이 느껴진다. 섬유질과 키틴질로 이루어진 벽은 단단하며 스스로 느리게 위로 자라난다. 공생합체로 만들어진 섬세한 세포들이 커가는 것이다. 로사스는 더이상 그 싸구려 집에서 있고 싶지 않았다. 마법 방벽까지 쳐진 회사로 옮기고 싶다. 테르에린이 오는 게 두렵다. 이제 테르에린은 로사스가 어디에 있는 지 알고 있기에 언제든지 게이트를 열고 찾아 올 수 있다. 엘프라고 무턱대고 믿은 게 잘못이다.

아텐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테르에린은 엘프의 눈에 관해 이야기해준 다음 곧바로 말했었다.

-로사스, 제가 왜 당신을 도와드린 것 같아요?

-지나가다 오크들에게 제가 당하는 걸 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이곳을 지나갔을까요?

-스무 고개 하세요?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해 볼까요?

-아니요. 실은 로사스가 크로스 두머라는 걸 알아냈기 때문이지요.

로사스는 머리 속에 맑아지고 눈 앞이 하예지며 심장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걸 어떻게 알았소?

-아쉽게도 말씀 드릴 방법이 없네요.

-왜요! 내가 평생 비밀로 간직해둔 일을 당신이 알고 있는데 그걸 말해 줄 수가 없단 말입니까?

-저도 모르는 일이라서 말씀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죠.

-엘프는 무한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한한 기억 용량일 뿐이에요. 때문에 대부분 백지 상태에 있지요.

무한이라면 1이나 1000조나 그게 그거겠지. 무한이라는 게 증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한은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크기를 잴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자연수로 이루어진 무한이 2의 배수로 이루어진 무한 보다 크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무한한 기억력이 클까 엘프의 그것이 클까.

무한한 기억력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테르에린이 말을 잇는다.

-저는 정부 기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황당한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겪고 있는 기분이군. 테르에린, 도대체 나를 데리고 가서 뭘 시킬 겁니까? 스파이, 이중 간첩, 마법사의 실험 대상, 드래곤의 장난감? 어떤 걸 시킬 겁니까? 당신 같은 미녀 엘프랑 같이 한다면 뭐든지 괜찮을 것 같은데.

-칭찬 고맙군요. 그런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 그냥 크로스 두머의 소재나 파악하자는 거에요. 혹시 당신이 아는 다른 크로스 두머가 있나요?

-크로스 두머들의 친목계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 단체가 있어요? 혹시 아신다면 이름이 뭔지 어디에 있는 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런 건 없어요. 제가 아는 크로스 두머는 아무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진 크로스 두머들은 서로 끌어당긴다고 들었어요. 그런 일이 당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인데, 까닭이 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좋아요. 그런데 정부 기관에서 크로스 두머 소재를 알아서 대체 뭐에 쓴답니까? 크로스 두머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들, 역사 속의 모래알갱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능력자와는 다릅니다. 실용적인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라 부르기도 뭣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때문에 최근에야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알려졌지요. 그동안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거든요. 스스로가 크로스 두머라는 건 스스로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여기 적어도 몇 사람이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까. 그들은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추측해 본 바로는 그들 같은 운명을 가진 크로스 두머들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이들인 듯하지만 실용성이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또 크로스 두머들이 서로 만났다고 해서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테르에린은 조금도 화난 것 같지 않았다. 재미있게 여기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엘프의 감정은 인간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인간은 원숭이랑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 또 쥐나 도마뱀과도. 결국 인간의 감정은 그들과 같은 조상의 감정에서 진화했으니 그들이랑 많이 닮아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엘프는 인간과 조상을 조금도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만치 비슷한 쪽으로 진화가 수렴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감정의 충만을 끝없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걸까. 가끔 표현하는 감정은 흉내라는 게 드러나 조금 부자연스럽다. 그렇다고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건 엘프다운 흉내였고 때문에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테르에린이 말을 잇는다.

-저도 실용성이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어요.

-혼자 있고 싶어지는군요.

-알았어요. 안녕히계세요.

테르에린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로사스의 기분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테르에린은 게이트를 열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로사스의 이성은 테르에린이 위험한 존재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1999.11.19.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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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영혼 결혼식 - 1999[SF] 17.06.26 198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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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은 노숙자다 - 2012[현대] 17.06.26 156 0 2쪽
22 신림역 살인마 - 2011[현대] 17.06.26 135 0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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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옥의 법칙 - 1997[SF] 17.06.25 72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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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래에 굶어죽다 - 1998[SF] 17.06.25 95 0 5쪽
6 프림 커피 - 1995[현대] 17.06.25 188 0 17쪽
5 후조의 마왕 석호 - 2009[역사] 17.06.25 71 0 23쪽
4 생명주의자 - 1999[SF] 17.06.25 78 0 6쪽
3 돼지 멱따기 - 1997[현대 + 역사] 17.06.25 103 0 6쪽
2 천막 노인의 말 - 1998[현대] +1 17.06.25 267 1 5쪽
1 동급생 - 1998[현대] +1 17.06.25 823 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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