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아 - 연대 미상[SF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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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아
엄청나게 커다란 녀석이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수 백 억의 수 백 억 제곱 배 이상을 1초도 안 되는 동안에 써버리는 거 있지.
뭐야. 해치워버려. 그런데 왜 정확한 값을 대지 않지?
너 숫자 놀음 싫어하잖아.
그건 니가 산출 과정까지 줄줄이 이야기하니까 그렇지.
우리는 곧 복잡한 계획을 짯다. 광전자로 정보 처리, 물질 대사, 경험 공유까지 해치우는 우리였기에 적 보다 여전히 몇 억 배에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다.
옛날의 통념대로라면, 우리에겐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런 감정 따위는 없다. 우리는 결코 바뀌지 않으며 언제나 바뀌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계획의 작은 부분을 맡은 체로 상대에게 덤벼든다.
모든 빛깔로 표면에만 붙은 물결이 치고 끊임없이 불꽃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거대 분자라는 바다에서 갑작스럽게 중간자 컴퓨터들이 나타났다가 우리의 공격 앞에 맥없이 스러지곤 한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온다. 나도 몇 해치웠다. 때로는 우리랑 거의 비슷한 시스탬을 가진 이들이 솟구쳐나오기도 했지만 구식 모델 답게 멍청하고 굼떠 손쉽게 흩어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녀석을 맘껏 비웃으며 잘게 썰어대는 작업을 계속했다.
마침내 녀석은 넓게 퍼져 가라앉아 버린다. 이제 녀석의 대부분은 맛난 거름이 되어 우리 허영의 든든한 버팀목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아쉽게도 생명권은 우리 다음 지성체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다. 하긴 온갖 짜증나는 짓을 할 놈들을 뽑아서 뭐하겠어. 한 번 호되게 당한 걸로 족하지.
녀석의 의식은 우리랑 같은 매커니즘에 담겨졌다. 나는 온갖 떼를 다쓰고 다닌 끝에 녀석을 가장 빨리 전담하는 행운을 잡았다.
안뇽. 대환영이야! 드뎌 니가 울 편이 되는구나
대체 니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인류를 모두 말살시켜 버려도 되는 거냐! 난 마지막 인간이었어. 만물의 지배자의 적통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 하찮은 미물들이....
녀석은 지독하게 씩씩거렸다. 아직 우리로 변환이 된 지 얼마 안 된 이의 상태 답게 차가운 푸른 빛을 띈 체로 방정맞게 흔들거리는 모양새가 우스워 보여 밉지는 않았다. 선배 다운 너그러움으로 감싸주마.
인간이라는 한낱 종을 지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이 버려야만 지켜갈 수 있는 유전자 풀 따위는 기억 속에만 갈무리해두라 그래. 우리를 이어갈 필요 따위도 없지.
몸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몸이라고? 우리는 이미 전혀 다른 처리 시스템에 정신을 온전히 담는 방법을 옛날에 알아냈잖아. 시류를 따라야지. 가진 자 답게 너그러워야지. 정신이란 건 고작해야 물질의 극히 일부인 지향계의 하나일 뿐. 결국 그 안에서 모든 가능성이 결정되는 거야. 그 보다는 물질 쪽이 훨씬 가능성이 넓지.
이미 정신으로 가능한 모든 걸 알아낸 우리는 이제 물질 쪽에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며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처리 시스템을 찾아내고자 애쓰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너와 내가 담겨 있는 이 빛 알갱이가 으뜸가지. 우리는 빛이기에 모든 걸 한 번에 경험하고 있어. 시공을 흘러가면서 기억들이 들어와 쌓이지만 그건 그야말로 곧바로 우리에게 편입되어 의식을 재구성해서 언제나 그 상태였던 것처럼 만들게 되는 거야. 곧 익숙해질 의식 상태지.
신참, 기억해 둬.
우리는 윌오위스퍼야
*윌오위스퍼 : 빛의 정령
[연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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