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독 - 1998[SF]
끝없는 여독
갈색 난쟁이별 에코에 밤은 오지 않는다. 암석들에서, 깊고 깊은 강과 호수 바닥에서, 기름진 흙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따사로운 빛살이 밤을 불허하고 영원한 푸른 하늘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늘 따위도 없다. 식물은 땅에 붙어 자라는 반투명한 녹색 생물들이다. 식물들 덕분에 에코는 짙푸른 바탕에 간간히 하얀 구름이 흩어져 있는 공을 갈색 코로나가 둘러싼 아름다운 생김새를 띄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에코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지구로 돌아간다. 탐사단장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꼭 돌아갈 작정이야?
-우리 노란 난쟁이별이 섭섭해 하잖아.
물론 그런 까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부부는 그동안 너무 적적했었다. 폰 섹스나 사이버 섹스 따위는 진짜 짝짓기의 오롯한 대용물이 될 수 없다는 걸 실감해야 했었다. 정식으로 결혼 신고까지 마친 부부이면서 고작해야 이런 식으로 밖에 생활하지 못한다는 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자기야, 우리는 이제 진짜 부부가 될 수 있는 거지?
너는 언제나 그렇게 발랄하게 말했다. 비록 우리 탐사단의 남녀 비율은 똑같지만 명랑했기에 인기가 너무나 많았던 너를 내가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기야 컴퓨터 안의 전자기 신호로만 존재하는 탐사단에서 성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해와 프록시마 사이에 갈색 난쟁이별을 찾아낸 것은 분명 21세기 최대의 쾌거였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네메시스 를 상기시키며 태양계 붕괴, 인류 멸망의 공포에 떨었지만 공포에 떨기에 갈색 난쟁이별은 너무 멀었다. 3.7 광년 거리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엔 아무래도 멀다. 사람들은 갈색 난쟁이별에 네메시스라는 무시무시한 여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애처로운 요정 에코가 갈색 난쟁이별의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항성이면서도 너무 어두워서 눈에 띄지 않던 별에 에코라는 이름은 썩 잘 어울리는 듯이 보인다. 나는 에코란 이름을 좋아한다. 너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에게도 그날은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때 끊임없이 우리네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던 갖가지 희열들은 잊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백질 메모리칲으로 기억하고 DNA 사이버네틱스로 헤아리며 지름 1mm도 채 안되는 곳에 갇힌 의식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우주인으로 뽑혔다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었다. 착실하게 공부만 하던, 너무나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어째서 나를 뽑았느냐고 면접관에게 물었다. 면접관은 미국인이었기에 동시 통역기를 통해 말을 들었다.
-귀하는 정서적으로 대단히 안정되어 있으며, 현재 지닌 지식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못되지만 매우 강렬한 진실 탐구심을 지니고 있고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사회성, 감성, 지능, 적응력 모두 평균을 넘고 있습니다. 자연 과학도로서도 이같은 능력은 필요한 것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평화적으로 개척한다는 중임을 띈 인물에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바입니다. 우리는 앞서 말한 특징들을 지닌 16세 이상 30세 이하의 건강한 사람들을 전세계에서 3000명 뽑았고 그들을 합숙시키고 참여 관찰하여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뽑을 생각입니다. 우선 경고를 하겠습니다. 경고 사항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면 지금 포기하셔도 좋습니다. 이 경고 사항들은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곧 공개될 것이므로 가족들과 이에 대해 상의하는 것도 소문내는 것도 허용됩니다. 귀하는 가족들과 몇 천 년 동안 떨어져 있게 됩니다. 물론 귀하 자신이 느끼는 시간은 3년 남짓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귀하는 귀하의 육체를 버려야합니다. 귀하의 몸은 조각조각 나뉘어져 장기를 기증받고자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갈 것입니다. 뇌조차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사이버 인터페이스 기술이 실용화되기 전 상상되던 우주 여행보다는 훨씬 가혹하지 않다는 점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소행성 규모의 우주선을 타고 대를 이어가며 우주 여행을 하는 아크, 광속으로 여행하기 위해 수백만년의 세월을 지구도 가족도 떠나 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상상된 바 있습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몇십 년 정도의 시간만을 우주선에서 지내야 했지만요. 지금은 다릅니다. 귀하는 탐사를 마치고 돌아와 귀하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지금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불로불사를 이룬 이상 틀림없이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귀하의 유전자 풀은 무사귀환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며, 그것을 통해 돌아온 귀하의 영혼을 담을 그릇을 합성해낼 예정입니다.
물론 가족들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나는 부득부득 우겼고, 부모님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실증해 보이시고 마셨다. 너는 개인의 자율성이 좀더 존중받는 스웨덴에서 왔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뿌리쳤다.
예상되는 여러 상황에서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지를 묻는 갖가지 시험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상황들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여기서 이렇게 다정하게 옛 말을 할 수도 없었을테니.
그때까지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맨처음 만났던 것은 최종 심사가 끝나고 마지막 16명의 명단이 완성되었을 때였다. 합숙 훈련은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남녀 각각 8명 씩인 젊은이들이 벌거벗고 서로의 몸을 수즙게 훑어보는 에로틱한 경험.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 지리한 우주 여행에서 몹시 필요한 요소라는 교관의 말 덕분에 그런 상황에 떨어져야 했었다.
이제는 아무 쓸모없는 칭찬이 되겠지만 네 그때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달빛 아래서 보아야 한다. 지구 지름의 4분의 1에 달하는 지름을 지닌 특수한 위성인 달. 지구와 이름모를 거대한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지구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만들어져, 생성 과정조차 위성 가운데서 드문 달. 인류가 땅에서 바라볼 때 해와 겉보기 크기가 똑같아서 개기일식을 가능케하는 달. 신의 젊디 젊은 화랑들의 짝사랑을 받았던 달. 그 달이 우주에서 드문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드물고 소중한 존재이기에.
꼭 가야한다. 우리는.
에코는 여전히 우리 밑에서 돌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해와 같은 중력권에 들어가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도 않다. 1000억년이나 되는 수명을 지닌 에코. 에코는 80억 살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젊고 활력에 넘친다. 너는 그런 에코를 사랑했다. 내가 에코에 던지는 사랑보다 좀더 각별하고 좀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너의 사랑. 나는 에코를 질투하지는 않는다. 나와 에코에 대한 너의 사랑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아는 보통 사람이기에.
우리가 에코를 향해 떠날 때 모든 것은 불확실했었다. 명왕성과 카론이 거의 붙은 채 돌고 있는 광막한 시공. 해가 1등성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공에서 너와 나는 몸을 포기한 채 다시 만나야 했다. 명왕성 궤도를 도는 천체 망원경은 에코에 대해 피상적인 정보만을 주었고 탐사단은 최초의 탐사단으로 떠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파이오니아와 보이져가 갔던 그 길로 탐사단은 떠났다. 장대한 미리내 원반의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려는 의지. 탐사선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인간 정신의 표상처럼 보였고 우리는 희망에 넘쳐 있었다.
우주 여행은 당연히 지리했다. 우리들은 생각을 몹시 느리게 했고, 덕분에 시간을 빨리 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거의 곧바로 에코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9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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