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주의자 - 1999[SF]
생명주의자
윤희는 배가 끊임없이 부풀어오르는 걸 느낀다. 빌어먹을 새끼, 염병할 자궁. 어떤 놈인 지는 몰라도, 술 취해 필름 끊긴 사이에 윤희의 배를 불려놓았다. 단 하룻밤이었는데. 그 전엔 아무리 콩을 까도 끄덕도 않던 자궁이 나날이 불러온다. 중딩 Two에 애 엄마가 뭐냐.
어떤 것들은 임신해도 한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있는다던데, 그런 체질이 아닌 가 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헛구역질이 나온다. 잘 하던 술이랑 야리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온다. 건강에도 나쁜데 끊어버려? 헛구역질 안 하는 것들이 더 많다던데 운은 더럽게 나쁘지.
속에서 누가 툭툭 차는 것만 같아. 4개월인데 차는 게 사실인가, 아니면 환각인가. 머리가 돈다.
헤이, 우리 같이 갈래요? 싫어요. 나 바삐 갈 데 있어요. 휘황차란한 쫄티를 입은 두 사내가 윤희 어께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걔 헌팅 왜 했어, 새끼야, 뚱녀던데. 이빠이 귀엽잖아, 임마.
거울이 윤희 옆으로 바쁘게 지나간다. 푸석푸석한 통통한 얼굴. 머리도 못 감고 쫓겨난 덕에 떡이 되어 있는, 적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가리개도 안 한 체 질로 찾아들다니. 가리개 하나 안 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모두 무시한 새끼 때문에. 부끄럽지도 않았나. 벌거벗고 압구정동에서 노닌 거나 마찬가지잖아. 우와, 멋지다. 경찰이 나타났다. 도망가라, 개새끼야! 깡패들이 몰려든다.
그딴 년은 엄마도 아냐. 생기 없는 걸음 걸이. 허연 츄라닝 바지. 윤희 엄마는, 윤희가 배만 불뚝한 걸 알아냈다. 중산층 자녀가 부황 났을 리야 없는 일. 몽둥이에 맞으며 쫓겨났다. 아직도 욱신거린다.
돈 떨어지면 기어들어가자. 돈 한 푼 없는 주머니. 은경이한테 가서 돈 달래야지. 알바해서 몫돈 벌 일 없잖아. 낙태하고 실컷 울자. 적어도 낙태는 내가 하고 싶다. 딸이라는 까닭으로, 돈도 많은데 자궁에서 죽어 가는 아이들 많잖아.
네온 사인들이 비뚜룸하게 꽂쳐들 있다. 뒤엉킨 빛살들, 그림자들에다 대고 외치고파. 난 이 애 키우고 싶어. 키워서 친구로 만들고 싶어. 그럴 자신 없어. 아무 도움 못 받고 어떻게 좋은 친구로 키우나. 배불뚝이 되면 588에도 못 가. 아니. 거기 가기는 싫어. 포주한테 맞고 살기 싫어. 내 배부른 걸 봐 줘. 봐 줄 사람이 필요해.
어떤 언니 이야기 들은 적 있지. 고1 때 애를 낳았는데, 아빠인 동갑내기 오빠랑 같이 키웠다고. 그리곤 19살 때 결혼을 했데. 그건 그나마 나은 편이야. 그런 부모한테서 어떻게 그런 애들이 나왔나 신기할 뿐야. 부모가 환골탈태라도 한 모양이지.
이 년아, 가진 돈 다 내 놔. 돈 없어. 10원도 없어. 집에서 쫓겨났어. 진짜냐? 너 뻥 아니지. 이 년, 강간하자. 이렇게 사람 많은데 강간이 되것냐, 쨔식아. 끌고 가면 되잖아. 윤희가 조금 흔들리는 걸음으로 걷는다. 야, 이 년아 어디가! 냅둬.
눈이 잘못된 건가. 똑같이 생긴 것들이 왜 이리 많지. 마구 마구 늘어난다. 사람들이 도망간다. 덤벼든다. 누구든 가리지도 않고 국으로 맞고 거꾸라진다. 삐뽀, 삐뽀, 윤희가 한쪽 손을 갸우뚱거리게 들더니 검지를 치겨들고 휘젖는다. 경찰 아저씨! 아른거리는 소리가 귓청을 간질인다.
경찰들이 총을 쏜다. 시가전이다. 멋지다, 멋져. 꺄울! 똑같은 것들이 밀가루 반죽처럼 뒤엉켜있다. 반죽에서 끊임없이 떨어져 나와 총에 맞아 쓰러진 다른 똑같은 것들을 밟고 걷는다. 경찰들을 때린다. 경찰차를 뒤집어 엎는다.
약국 간판을 던져버린다. 부숴버린다. 윤희가 약국 안으로 뛰어든다. 아무 약이고 있는대로 쥔다. 알약들이 가방 안에 가득히 들어찬다. 와흐르르르르르ㄹ. 알약들을 줍는다. 주워서 입안에 있는대로 털어넣고 마구 흘려가며 씹어댄다. 너무 써서 정수기를 뒤집어 엎는다. 물이 안 나온다. 주먹 쥐고 두들긴다. 나와라, 나와. 칼이나 가위 없나. 자궁 안 아이의 탯줄을 끊어버려 목 마른 나 구해 줘.
똑같은 것들이 약국 안으로 들어온다. 윤희가 게츰스레하게 본다.
은경아, 너 맞니? 맞지. 맞아. 이 걸레야, 어디 갔다가 이제 오니. 아니네, 아니네. 친구랑 닮아서 실수했어요. 바닥을 짚고 노려보기. 똑같은 것들이 답한다.
당신은 지금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생명을 해칠 수는 있지만, 남이 해치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 안의 생명을 지키겠습니다.
부수적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포 하나 하나를 모두 개체로 순식간에 진화시킵니다. 한 개체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세포가 개체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는 곧 수조가 됩니다.
늘어나는 우리에겐 지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구는 우리 것입니다
똑같은 것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튕긴다. 유리창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윤희가 날아간다. 날고 있어. 하체가 부서지고 찟겨지며 갈라져버린다. 끔찍하게 아프지만 남의 일처럼 느껴져 평온하다. 날아라, 날아, 윤희야. 서울에서 인천까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다가 갈라진다.
시뻘건 덩어리가 아래에 있네. 그것에 메달려 있어. 그것은 형체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핏덩이들이 엄청나게 모여 이루어져 있다. 덩어리는 서울을 휘덮고, 똑같은 것들의 희멀건 덩어리랑 뒤엉켜 있다.
점점 커진다. 날아올라 바람을 가른다. 이제 난 슈퍼 우먼이 된 건가? TV로만 몇 번 본 자금성이 덩어리에 깔려 모래 성 마냥 무너져내린다. 사람들이 도망친다. 너무 아파. 엄마, 엄마.
윤희의 다리는 어디로 묻어 갔는 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UNHAPPY END
1999년 6월 13일 씀. 니그라토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