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그라토 기타 단편 모음

아테네 - 1999[SF]

아테네

1.

고대사에 우뚝 선 빛나는 도시 아테네.

모든 문화는, 모든 문명은 한 번 쯤 직접 민주주의를 행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를 이상으로서 역사에 뚜렷하게 남긴 것은 아테네 뿐이었다.

나는 전 인류의 공동체가 다시금 아테네라 불리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이를 이룩한 귀족적 선견지명에 갈채를 보내고 싶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론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거의 오롯하게 되었다.

2.

기억을 떠올린다. 미나의 멋진 알몸을 떠올린다. 초시공 한복판에서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기억은 빛난다. 여전히 그것은 연상, 감정, 상황 따위에 좌지우지된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대우주의 속성은 기억에도 예외가 없다. 나도 미나도 육체화된 의식을 다시 에너지화시킨 물리 지성이지만 아직 인류라 불리고 그렇게 느끼는 건 기억의 속성에도 빚 지고 있는 바 크다. 물론 그것은 인격 공학으로 실재가 훨씬 가까워졌으나, 자의성은 변하지않는다. 양자 역학이 뒷받침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양자 역학은 원자 밖으로 뛰쳐나간 지 오래다.

미나는 액체로 젖은 체 샤워하고 있다. 환상 보다 나은 현실에 난 손바닥을 마주친다. 미나와 나는 여러 차례 하나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라 불릴 것이고, 미나는 그녀라 불릴테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의미가 있는 지는 아리송하다.

나도 미나도 카피 레프트다. 카피 레프트는 더이상 카피 레프트라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모든 카피이자 모든 현실이다. 미나는 결코 샤워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보인다.

모든 걸 대상화한다는, 현대인의 보편적 특질도 갖추고 있지만 대상에 비춰지는 사랑도 지닌 미나가 말한다.

3.

마침내 우리는 미래를 만났어.

시공을 여행하고 평행 우주를 찾아낸 뒤부터 시간은 우리 의식에서도 무너졌지. 그때부터 미래는 보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 우리의 힘이 늘어나면 미래는 온다.

오랜 옛날부터 예상했던 그런 발명이 일어난 거야. 우주를 발명할 수 있게 되었어. 나는 붉은 별 밖에 없는 새빨간 우주를 만들고, 그곳을 수많은 성적 도구들로 가득 채울 거야. 그것으로 너를 유혹해 줄 거야. 그러니 너도 파란 별 밖에 없는 새파란 우주를 만들고 분위기를 잡아 줘.

4.

한 우주를 니 마음대로 유린해도 괜찮은 거야?

자연에 맡기자는 소리가 아냐. 그들은 존중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미나가 나를 멀거니 본다. 걔네는 재미있는 장난감일 뿐이야. 걱정 마. 내가 만들고 타임 머신으로 카피해서 너 하나 줄께. 그럼 됐지?

원시 시대로 돌아갔던, 정보 시대의 인류는 신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으로 보는 인식에 다시금 이르렀어. 이제 우리는 비록 제 2의 물결 시대로 돌아갔지만, 그때 보다 훨씬 높은 진화 수준에 머물러 있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 퇴화된 행위를 하겠다는 거야? 그 우주를 만들면 너에게 유린당할 존재들에게 몰입한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거야.

5.

어머머, 얘 좀 봐.

내가 진실을 이야기해줄께. 진실은 멋진 환상으로 포장되어야 아름답지만 난 도저히 그렇게는 못 말할 거 같으니까 양해해주렴.

어떻게 몰입이 가능하다는 거야? 몰입해도 돌아갈 내가 있는 이상 그 몰입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어. 그렇다고 진짜로 몰입하면, 나를 잃어야만 하잖아. 그러면 니가 너무 너무 슬퍼할 것만 같아. 만약 내가 니가 되면 그게 뭐야. 내가 화장실이 되면 그게 뭐니?

너랑 나랑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곳에 그런 슬픔 들여놓을 수는 없는 거잖니. 못 할 일이야 아니자만 그럴수야 없지.

싸우지 말자. 토론하면 사이 나빠지기 쉬운 거라구. 우주를 만들어서 팬시로 쓰면 보기 좋겠지. 아, 새로 발전소가 생겼데. 우주 발명은 이 기술의 부수적 요소야. 가짜 진공을 발전소로 쓸 수 있게 된 거야. 응용 물리학의 승리지. 문명은 죽음과 싸우는 거야. 우리 옛날 몸은 죽음도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수련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그건 실재랑 너무 멀었어. 이제 우리의 과학 기술은 실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이건 어디까지나 죽음과 싸우는, 사랑과 정의의 전사인 문명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하는 조크일 뿐이라구.

6.

미나랑 헤어져서 생각해본다.

우주 발명은 작은 유행이 되겠지. 그걸 막는다면 작은 유행일테지. 몇몇은 설득할 수 있겠지. 진짜로 막으려면 나는 권력을 쥐거나 공동체를 부숴야만한다. 떠난다고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맞서 싸우기는 할테다. 그럼으로서 몇몇 사람들과 사귈 수 있고 새로운 경험도 할 수가 있을테니까. 국가에서의 모든 활동은 권력과, 시장에서의 모든 활동은 상업성과 관련되는 것처럼 아테네 같은 친화적 유기 조직에서의 모든 활동은 공동체적 즐거움과 맞닿아 있는 거다.

잠깐 아테네가 공동체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 공동체주의와 물리적 착취 제도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곳. 공동체가 씨족이건 유기 조직이건, 물리적 착취 제도가 노예 제도건 초시공 공학 카피 레프트이건.

아직 난 아테네에서 산다.

[Fin]

1999년 6월 28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