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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라토 기타 단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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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라토
작품등록일 :
2017.06.25 11:55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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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320

작성
17.06.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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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쇼펜하우어의 지행일치 - 1995[역사]

DUMMY

쇼펜하우어의 지행일치





나는 도덕 선생님의 이야기에 정신이 퍼뜩 깨이는 것을 느꼈다. 키가 작달만한 도덕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며 제자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중 1생이었으나 벌써 인생을 생각하는 - 조숙하다고 해야하나 애늙은이라고 해야하나 - 나는 그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야기는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허무하다고 말했는데 자기 마을에 전염병이 돌자 가장 먼저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뭐야 뭐야 하고 수군거리며 쇼펜하우어를 비웃었으나 대다수의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을 발견했다 - 아니 발견했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국민 윤리 시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배우게되자 나는 그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은 지행일치을 이룬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길거리에 나갔다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느끼고 멈짓했다. 다닥 다닥 지붕들이 붙어 좁을대로 좁은 거리에서 가장 악취가 풍기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사람 아니 하나의 고깃덩이를 다른 한 사람이 쇠꼬챙이로 꿰어 우마차에 실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시체가 자신의 몸에 닿을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조심스럽게 싣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체를 태워버려라, 어서, 어서. 나는 가련다. 아니, 저 오싹한 소리는 뭐냐.


그것은 승리를 자축하는 한 마리 잡종 고양이의 울부짓음이었다. 무심히 거리의 쓰레기를 뒤지던 고양이. 공포에 질려 찍찍거리는 쥐가 도망치려 앞발을 버둥거려 몇 발자국 이동했다 싶으면 발톱을 그려 쥐고 쥐를 끌어 자신의 턱받이로 쓰려는 양 가까이 둔 다음 다시 도망치게 했다가 앞발로 후려쳐 볼따귀를 할퀴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다 보았다. 고양이가 고개를 그의 방향으로 돌리고 턱을 오만하게 곧추 세운다. 두툼한 입술에 한줄기 피가 맺혀있다. 쥐를 한 입에 뱃 속으로 쳐넣어 버린 것이다. 오, 저런, 네 놈은 그 쥐가 페스트 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고양이가 자신의 목에 한깟 힘을 넣는다. 고양이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고양이는 사람이 와서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고양이는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고 몸을 비틀며 기뻐할 것이다. 오냐, 내가 널 만져주마. 그것은 헛소리다. 그는 맹목적 죽음를 두려워한다. 내 육신의 죽음과 생각하는 나, 비록 그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지만 막연한 죽음에의 공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빚더미같은 찌꺼기가 남아 페스트 균에 걸려있을지도 모르다는 막연한 추측에 손이 움직이지 않음을 느낀다.


그는 거리를 지나 미친듯이 자기 거주지로 달려왔다. 큼직한 가방을 꺼내어 양말부터 중절모에 이르기까지 담고 여러 권의 책들, 필기도구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챙겼다. 빠뜨린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본다. 텅 빈 옷장, 정신없이 어지러운 바닥, 역시 어지렵혀진 책상. 책상 위에는 몇백장의 원고지가 약간 삐뚤어진 채 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나꿔채었다. 새로운 책 염세 철학 입문 이로군. 이것은 꼭 가져가야만 해. 또 원고지에 쓰려면 팔이 뻐끈해지고 눈이 침침해질 것이니까. 그는 고통에 찬 육신과 생애을 증오했다.


그는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가볍게 옷을 차리고 가방을 든 다음 종종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여편네를 만나서는 절대 안 된다. 밀린 방세 내세요하면서, 그러면 피할 길이 없지 않나. 꼼짝없이 낼 밖에. 어께가 좁고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커다란 여자라는 짐승은 사귈만한 치들이 아니다.


어머니라는 것이 3층 베란다에서 나를 떨어뜨려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년이 알아차린 것은 내 목숨이 생각보다 훨씬 질기다는 것 뿐이었다.


아까 시체가 있던 곳과 화장터는 그가 나온 거리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이미 악취가 베어들고 있었다. 폐 페스트에 걸리면 석탄처럼 살갗이 변하고 사흘 안에 죽어버리지. 페스트에 걸려 널부러진 주검이 쓰던 물건들은 당장 태워버려야 해. 안 그러면 그 물건들이 페스트를 옮길테니까. 2000만명, 전 유럽 인구의 1분의 3 내지 1분의 5가 페스트로 인해 섬멸된 적이 있었지. 기껏해야 몇백년 전이야. 우주의 역사, 아니 인류의 역사만 보아도 몇백년은 찰나의 순간, 순간의 찰나 밖에 안되는 한없이 짦은 일초의 똑똑임일 뿐이야.


거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않은 철도 정류장에서 증기 기관차를 잡아 탓다. 나는 아마도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병을 피해 달아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 인생을 허무라고 했으면서 삶에 대한 집착을 보였으니.


삶은 오로지 살고자하는 욕망의 발현일 뿐이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저 살고자하는 욕망에 꼭두각시마냥 끌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가방 속의 원고 뭉치들을 어루만졌다. 그래, 난 오늘 지행합일을 이루고야 말았어. 그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고 그것은 미소처럼 보일 것이다.



@1995년에 씀. 우울하게 쓴 꽁트. 니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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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모모지세 - 2009[SF] 17.06.26 167 0 6쪽
34 암살자 - 1997[판타지] 17.06.26 212 0 11쪽
» 쇼펜하우어의 지행일치 - 1995[역사] 17.06.26 261 0 6쪽
32 우주 폭력배 : 악의 현현(미완) - 2013[SF] 17.06.26 243 0 4쪽
31 리치 킹(미완) - 2008[무협] 17.06.26 181 0 8쪽
30 넝마주이의 죽음 - 2차판 - 2014[현대] 17.06.26 330 0 32쪽
29 노예주와 노예 - 2014[현대] 17.06.26 230 0 5쪽
28 살인자 지망생 - 2014[현대] 17.06.26 234 0 10쪽
27 인육교실(人肉敎室) - 2014[현대] 17.06.26 168 0 3쪽
26 악녀와 요술사 - 2013[판타지] 17.06.26 199 0 13쪽
25 영혼 결혼식 - 1999[SF] 17.06.26 198 0 3쪽
24 넝마주이의 죽음 - 2012[현대] 17.06.26 176 0 30쪽
23 김은 노숙자다 - 2012[현대] 17.06.26 156 0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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