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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라토
작품등록일 :
2017.06.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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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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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노인의 말 - 1998[현대]

DUMMY

천막 노인의 말



어디에도 철조망은 보이지 않는다. 막막한 오클라호마의 평원만이 내 눈앞에 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하늘은 비마저 지리려 한다. 발이 모래에 속절없이 파고든다. 처음엔 가랑비였지만 금새 소나기가 되었다. 나는 정처없이 달린다.


어쩌자고 락 패스티발에 별다른 준비도 없이 참가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마약에 취해 바위 틈새에 누워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친구들은 내가 벌써 집에 돌아갔는 줄로 알고 있겠지.


길 잃은 피곤한 이의 심신이 머물 곳은 따로 있다. 다행히 비를 피할만한 천막이 눈에 띄어 무턱대고 들어선다.


-어르신. 나그네가 비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담배 먹던 노인은 흔쾌히 자리를 내준다.


노인은 자애로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매에 연륜과 지혜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름살을 지녔다. 비는 흘러들지 못했다. 천막 안에는 모닥불이 가끔 불똥 튀는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 모닥불은 천막 안에 일종의 가족스런 친밀감과 유대를 이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막 안에 나와 노인 밖엔 없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엄존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노인은 분위기에 힘을 얻었는지 낯선 길손에게 이야기를 해준다다. 내가 젊고 붙임성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외모라는 것이 성격과 환원적 관련성이 있다면 말이다.


노인의 말은 다행스럽게도 나의 모국어였다.



-맨 처음엔 큰 눈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없음만이 있었다. 그저 큰 눈이 있었다. 큰 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아직도 큰 눈은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큰 눈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돌아와 바로잡아 줄 것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어쨋든 태초에 큰 눈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하는 줄은 몰랐다. 그게 슬펐다. 큰 눈은 눈물을 흘렸다. 금새 우주는 물로 꽉 찼다. 큰 눈은 갈피를 잡았다. 큰 눈은 헤엄쳐 한군데에 자리를 잡았다...



듣기가 다소 고역이었지만 꾹 참고 들었다. 비를 피하게 해준 은인일 뿐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이야기 방식이 저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나? 리포트 쓸 때 도움이 될지.


노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곳에서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큰 눈은 그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큰 눈은 그 장소를 골똘히 보았다. 그 장소가 바로 지금의 오클라호마다. 한참 궁리하던 끝에 좋은 생각이 들었다. 큰 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물 속에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눈은 눈을 좀더 가늘게 떴다. 물보다 무겁고 진한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진흙이었다. 큰 눈은 진흙을 반죽하고 그것을 물 위로 떠올렸다. 물 위에 떠오르자 진흙은 넓디 넓게 퍼져나갔다. 큰 눈은 절대력으로 진흙을 굳게 하고 물 위에 떠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땅이 생겼다. 큰 눈은 땅을 보았다. 큰 눈은 눈을 더욱더 가늘게 만들며 사람을 진흙으로 만들었다.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도 차례 차례 만들었다...



노인이 이야기를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자넨 뭐하는 사람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길 잃은 대학생 정도로 알아두십시오.


-그러면 프렉탈 이론을 알겠군.


-들어는 봤지요.


-척도를 작게 하면 할수록 관측 대상의 크기는 불어난다. 해안선을 재는 자의 단위를 1cm로 하면 1mm로 했을 경우보다 해안선이 훨씬 짧아진다는 이야기가 프렉탈 이론에 들어있지. 내가 방금 말한 우리 부족의 창조 신화인 큰 눈의 이야기가 프렉탈 이론과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내 선조들은 눈부신 직관으로 20세기 과학의 갖가지 이론들을 예언해냈단 말이야. 최소한 수백년 전의 옛날에 말이지. 이 밖에도 이런 신화는 한이 없다네. 말해 주겠네....


나는 그 노인의 멋대로 껴맞추는 말을 듣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일리는 있을 지 몰라도, 부분으로 전체를 보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신화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란 노인답게 스스로의 의견만 높이 내세우는 태도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식의 말들을 들으면 웬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그들은 어디까지 발전해야 발전했다고 말할 생각인가. 앞대의 사람이 정밀도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말을 지껄이면 뒷사람들이 거기서 지금의 이론과의 알량한 유사성을 찾아내는 짓거리가, 스타랑 팬클럽의 관계랑 무엇이 다른가. 그 보다도 순수성이 떨어진다는 생각만이 든다.


하지만 천막에서 뛰어나와 비를 맞으며 어딘가에 있을 인가를 찾아 광야를 헤멜 자신은 없었다. 난 얌전히 도사리고 앉아 노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려고 애쓴다.


노인의 말이 조금씩 진실처럼 들린다. 이 천막에 정이 가는 것도 시간 문제다.



@1998년 3월에 씀. 니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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