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예티의 땅[4]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시야가 짧아지자 사위를 밝히는 마법등이 켜지며 최전방 경계병들의 야간경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둑해진 하늘을 날개짓하며 유유히 날아다니는 큰 새가 철책선을 넘어 미지의 땅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보이는군요."
큰 새의 끝자락에 엎드려 있던 내가 아래를 바라보며 암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레피아 경이 나지막히 말했다.
"당연하지. 밤인데. 하지만 이 녀석에겐 훤히 다 보일 거야."
갈기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레피아 경을 보면서, 나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 있는 이 큰 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빅 아울(Big Owl). 레피아 경의 패밀리어이기도 한 이 거대한 새는 뇽을 포함한 5명을 등에 싣고도 힘들지 않다는 듯 유유히 날고 있었다.
언더 프로즌 요원들의 임무수행에도 자주 동원된다는 이 녀석은, 낮에는 시야가 좁고 밤에는 시야가 훤히 보인다는 특징이 있어 야간에 행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었다.
"이 방향이 확실한가?"
체스터 경이 고개를 돌려 뇽에게 물었다. 뇽은 대충 무슨 말인지 짐작한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뻗어 방향을 지시했다.
"계속 가면 된다."
"좋아. 이 친구 말대로 계속 가보자."
그 뒤로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야음이라 기도비닉을 유지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리라. 빅 아울의 잔잔한 날개짓 소리만이 귓전을 스칠 뿐이었다.
깜깜한 하늘을 얼마나 날았을까. 머지 않아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스듬한 산기슭으로 나무를 엮어 세워놓은 울타리 안으로 조잡한 움집들이 드문드문 지어져 있었다.
"고블린들의 마을이로군. 저걸 보니 우리가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는 게 실감나는걸."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체스터경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들은 대부분 야맹증이 있어 밤에도 불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이목이 집중되어 예티나 트롤, 혹은 타 고블린 부족에게 공격당할 공산도 컸다. 그래서 녀석들은 저렇듯 가파른 산기슭에 본거지를 두는 게 보통이었다.
"보통은 지금같은 우기나 겨울 전에 철책선 침범을 활발하게 하죠. 야간활동은 거의 전무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아르펜. 그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거 말씀이신지요."
내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체스터경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작년에 있었던 탈영병 사건. 그때 고블린들이 야간에 덤벼들었던 것, 기억나나?"
"...아!"
"보고서로 읽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왜 밤에 앞도 못보는 놈들이 횃불도 제대로 안들고 우릴 공격해 왔을까?"
"체스터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에 네가 맞붙었던 그 예티놈의 경우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지. 고블린들을 어떻게 동원시켰을까?"
"..."
"가장 최근에 네가 활약했던 전투도 마찬가지야. 고블린이 마법을 쓴다니, 제3세력의 개입이 없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3세력이라구요?"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심쩍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스터 경은 흥분한 나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까부러치면 새에서 떨어지니까, 진정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봐. 제3세력까진 아니더라도 몬스터 단독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배후가 있다고 생각 못하는 게 이상한 거지."
"맞습니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의혹이 커지는만큼 의구심도 깊어졌다.
아르고니아가 초기에 영토확장을 하면서 몬스터들은 철책선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는 소리다. 그래서 몬스터들의 천국이 된 이 땅은 인간은 결코 살 수가 없는 땅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전능한 존재가 몬스터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결국 뇽이 말하는 드루이드 예티 일족을 만나봐야 답이 나오겠군요."
"그게 정답이지. 우리는 아직 이 땅에 대해 아는 게 한개도 없으니깐 말이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체스터 경이었다.
그렇게 고블린 마을 하나를 지나친 뒤 한참을 날았다. 고블린 마을은 그 뒤로도 드문드문 나왔는데, 내 생각보다 마을의 수와 규모가 커서 깜짝 놀랐었다.
"어때, 목줄 차고 집안만 지키다 밖을 나돌아 다니는 소감이?"
집 지키는 개에 비유하는 체스터경이었지만, 딱히 비아냥조는 아니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감을 말했다.
"진작 나돌아 다녔으면 더 좋았을껄, 합니다. 다른 분들은 이런 풍경이 처음은 아니시겠죠?"
"물론. 언더 프로즌의 뱃지를 달고 있으면 여기저기 다 돌아다녀야 했거든. 이쪽이야 뭐 자주 오진 않았지만."
"현직 요원으로서 말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많이 못 돌아다녀. 국장으로 임명된 왕세자가 경비를 깎기 시작했거든."
레피아 경이 질끈 묶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 말에 율라 중사가 고개를 돌려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왕세자."
"길들이려는 거지. 자신만의 언더 프로즌으로 만드려고 말이야."
그들의 대화에선 잔잔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직급상으론 상관이었지만, 존경심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설명을 들어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었지만,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았다. 이 좁은 나라에서 꼭 그렇게 대립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니깐.
"저기!"
얼마나 비행했을까. 아래를 내려다보던 뇽이 손가락을 짚으며 뻗었다.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처음에 봤었던 고블린마을처럼, 사방의 시야를 비추기 위한 횃불과 울타리가 있었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그것과는 달리 울타리는 굵은 나무를 깎아 만든 거대한 목책이었다. 직사각형의 목책 안으로 지어져 있는 집 또한 조잡한 움집이 아니라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조형미가 있는 집이었다.
아르고니아인의 집과는 궤를 달리하는 양식이어서 무척 특이했다.
"뇽 같은 예티들이 더 있다?"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뇽과 같은 크기의 예티들이 모이더니,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며 손짓하고 있었다.
레피아 경이 빅아울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빅아울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공중에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손님맞이를 어떻게 하는지 보실까. 꼬마예티, 앞장서라."
"나, 너보다 나이 많다."
꼬마예티라는 말의 뜻을 알았는지, 뇽이 불만 섞인 말을 어눌한 투로 내뱉고선 예티마을의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목책 위에 앉아 경계를 보고 있던 마을의 예티들이 뇽을 알아보고선, 문을 열으라는 듯 무언가를 소리쳤다.
잠시 후, 나무문이 열렸고, 일단의 예티들이 다가왔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뇽과 같이 헐벗고 있는 것은 비슷했지만, 입고 있는 견갑과 굵은 허리띠에 달린 갖가지 무기들은 그들이 마을을 지키는 전사임을 알 수 있었다. 도끼와 창 등이 주무기였는데, 등에 돌주머니를 메고 있는 슬링어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선두에 선 예티였다. 얼굴에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무척 늙은 예티였는데,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그가 이 마을을 책임지는 지도자인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우라캬!"
뇽이 무언가를 말하며 다가가 절을 하였다. 공손함이 물씬 풍기는 것이, 늙은 예티의 지위를 증명시켜 주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선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몇 걸음 다가왔다.
묘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티를 공포스러운 적이자 척살의 대상으로 여겨왔으니까.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기쁨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던 찰나, 늙은 예티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갸리코프 쿠리엘입니다. 드루이드 예티 일족의 21대 족장이지요."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