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탈영병[3]
"아..."
"헉."
"..."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입을 쩌억 벌렸다. 칼라 병사장을 비롯한 우리 분대원은 물론이고 2소초원들까지. 심지어는 여기서 가장 냉철하던 율라 중사마저도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워낙 힘이 쎄서였을까, 루트 병사장은 바닥에 엎어졌는데 바로 그 위에 올라탄 안젤리카 일등병이 멱살을 잡고 흔들며 분노를 토해냈다.
"자기 여자도 책임 안질 새끼면 명예도 필요 없다! 책임감도 없이 얻을 그딴 명예, 똥칠해서 갖다 버리라 그래라. 이 미친 새끼야. 그게 니 아랑 여자보다도 더 중요하나?!"
일순간 뿜어져 나온 한 일등병의 미칠 듯한 기백.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그제서야 부리나케 뛰어와서 그녀를 말려야만 했다.
"그만 해 안젤리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안젤리카 일등병님!"
"놔라, 이 쌔끼 두개골 뽀사버리기 전엔 안되겠다!"
"정신 차려 안젤리카!"
결국 모두가 달려들어 사지를 붙들고 난 다음에야 안젤리카 일등병은 '씨익 씨익'하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몸부림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루트 병사장을 죽일 듯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괜찮냐?"
전혀 괜찮을 리가 없지만 마지못해 던지는 빈말이었다. 쥐어 터진 쌍코피를 한손으로 막은 채 율라 중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루트 병사장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레이라 일등병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루트 오빠!"
가마득한 계급차이에도 말투가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같이 근무 설땐 저렇게 불렀나보다. 그녀는 루트 병사장을 꽉 끌어앉은 채 마주보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아아, 이 잘생긴 코가 다 주저앉았네... 어떡해."
그 말에 분노해서 날뛰었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괜히 나쁜사람이 되는 것 같아 내 기분이 괜히 언짢았다.
"아니야. 나, 나는 괜찮아 레이라..."
"오빠!"
조용히 밀어내려던 루트 병사장을 레이라 일등병이 다시금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까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아서 탈영했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요. 오빠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어요. 내가 사랑하니까. 깜깜한 뒤주안 같던 신병시절에 오빠는 유일한 제 빛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아르고니아가 아님 페니아로 가면 되잖아요? 전 배 안의 이 아이와 오빠 말고는 잃을 게 없어요."
"레이라..."
"이 말 한 마디만 해줘요. 네?"
"그래. 결혼하자 우리."
체념하며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하는 루트 병사장의 중얼거림은 정말 마지못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대답 하나만으로도 레이라 일등병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고, 고마워요. 사랑해요 오빠."
쪼오옥
입맞춤 소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양팔에 닭살이 돋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무심코 세레나 일등병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감동해서 닭똥같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아... 올해 경극 다 봤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율라 중사장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루트 병사장과 레이라 일등병에게 경고했다.
"너네 둘이 나가서 살림을 차리고 자시고는 알아서 할 일인데, 오늘 밤까진 군인이니까 낯간지러운 살소리 그만 내고 따라와라."
"아, 알겠습니다 율라 중사님."
"여기는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곳이야. 레이라 네 희망사항이 희망고문이 될수도 있어."
튜우우우!
율라 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울려퍼졌다. 아까 희미하게 들렸던 정체모를 괴수의 소리. 먹이를 찾는 탐욕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키케케케케.
또 다른 소리의 주인공은 고블린이었다. 두 가지 소리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나고 있었다.
"후. 트롤에 고블린이 동시에 온다니, 어떻게 된 동네야?"
"죄송합니다."
아까 고래고래 소리지른 당사자인 안젤리카 일등병이 고개를 푹 숙일뿐이었다. 괜스레 그런 모습이 보기 싫었던 내가 한 마디했다.
"아닙니다, 안젤리카 일등병님. 우리가 할 말을 대신 하셨을 뿐이니까요."
"잘못이라면 애초에 말문을 열게 한 내 잘못이지. 호기심 때문에 야간에 기도비닉을 깨버리다니, 간부실격이야 참."
지켜보던 율라 중사가 우리 모두의 잘못을 끌어안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뒤이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한 엄마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 아이를 데리고 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된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금세 진정되고 싸워 이기기 위한 의지가 들끓었다.
아이는 미래다.
아르고니아인의 정신을 관통하는 격언이었다. 빈민들은 피한방울 안섞인 고아에게 자신의 한끼를 기꺼이 내주었고, 영주는 곳간이 비어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식량을 베풀었다.
태어나자마자 한살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 죽지 말라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절대 질 수가 없다.
"걸어!"
궁수들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시스에서 검을 뽑아 든 율라 중사가 하늘 높이 검을 치켜세웠다. 동공이 시계추가 움직이듯 왼쪽의 고블린무리와 오른쪽의 트롤을 규칙적으로 왔다갔다했다.
공교롭게도 달려오는 거리는 비슷했고 궁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두 무리 방향의 중앙에서 아직 타겟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병사들의 시선이 율라 중사의 칼끝을 향했다.
이럴 때는 지휘관의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녀의 검 끝은 고블린을 향했다.
"쏴!"
번개같은 고함성과 함께 십수발의 화살이 허공을 날아 연두빛이 감도는 하얀 난쟁이들을 때려눕혔다. 기괴한 비명성이 울려퍼졌다.
"칼라! 재량껏 지휘해서 고블린 따위를 박살내도록."
덧붙인 '따위'라는 의존명사를 들은 칼라 병사장의 눈빛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단결!"
"아르펜은 나를 따라 트롤을 잡는다."
"네!"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을 때, 사전에 언질은 받았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율라 중사와 함께 지척까지 다가온 트롤을 맞이하러 빠르게 걸었다.
애초에 율라 중사는 고블린과 트롤이 함께 덤벼들 경우를 상정했다. 고블린이 40마리 이상에 트롤이 두 마리 이상이라면 타 부대 합류 전까지 줄행랑. 그 이하면 교전.
먹이사슬의 상하관계에 놓여있는 두 무리가 함께 올리가 없었기에 다수가 고블린을 잡는 사이 소수가 트롤을 상대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 소수는 율라 중사와 순발력 있는 노련한 병사 한명. 통상적인 경우라면 지휘권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무장이 좋으며, 가장 경험 많은 루트 병사장을 뽑았을 것이다.
내가 종교행사에서 율라 중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긴장 풀고 내 지시에만 따라라. 나와 대척점 잘 잡으면서."
"네, 중사님."
튜어어어!
그러는 사이 트롤의 울음소리가 땅을 울렸다. 어두워서 시꺼먼 형상만 보였는데, 소리로 보아 지근거리였다. 율라 중사가 왼팔을 들어 손목 언저리에 달려있는 팔찌를 오른손으로 탁탁, 두번 쳤다. 순간적으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트롤의 안광을 관통했다. 트롤이 눈이 부신듯 괴로운 소리를 내었다.
펜타그래프산 팔찌형 랜턴이라고 한다. 군용품은 아니고 율라 중사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장비였는데, 경계용으로 지급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편의성과 밝기였다.
"쏴."
피융!
율라 중사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장전을 마친 내 화살이 트롤의 눈을 향해 날아갔다. 기대도 안했는데 정확히 맞추었다. 성공이다.
"잘했어 이등병. 받아."
그리곤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타원형의 그것은 알게모르고 일렁이고 있던 마음속 불안함의 불씨를 단숨에 사그라뜨려버렸다.
"이등병 아르펜, 방패 받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관등성명이었겠지만, 왠지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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