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하얀 설인[2]
시간이 흘러 근무시간이 다가왔다.
오후주간의 시간. 무장검사를 한 뒤 경계로를 나서며 하늘 위를 올려다 보았다. 산등성이는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었지만 하늘 위에 떠있는 햇빛은 따스했다.
12월의 그 끔찍했던 추위가 거짓말 같기만 했다.
"혹한의 계절을 한번 겪어보니, 이런 날씨가 천국 같지?"
"네. 정말 천국이네요."
오늘의 내 사수인 베일 일등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아직까지 겨울은 진행중이고, 따뜻한 지방에서 온 사람에게는 추운 날씨다. 하지만 손발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정말 꿈만 같은 나날이라는 생각 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긴장 풀지는 마. 날씨가 풀려서 좋은 건 우리 뿐만이 아니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몬스터의 존재. 그것은 아직까지 고참들의 표정이 풀리고 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나 지난 1월에 보았던 예티의 발자국은 이미 사단 본부에까지 보고가 올라간 상황이었기에, 사실 인근의 모든 소초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들은 바로는 몬스터들의 공격이 가장 잦아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이때라고 한다.
"놈의 발자국은 우리 소초에서만 발견됬다고 하던데, 우리쪽이 타겟일까요?"
"글쎄. 워낙 안 나타나는 놈이니까 소초장이나 얀 중사도 추상적으로만 설명했겠지. 중요한 건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네. 고생하십시오."
갈림길에서 헤어져 걷다 근무지에 도착한 베일 일등병과 나는 그전의 근무자와 인수인계를 간단히 마치고 근무를 서기 시작했다.
혹한의 계절 무렵에 근무자의 체온유지를 위해 쌓아 놓은 흙포대는 일주일 전에 치운 상태였다. 안개도 끼지 않은 맑은 날씨였기에, 창 밖으로 철책선 밖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나는 전방을 주시하였고, 베일 일등병은 후방을 감시하였다. 날씨가 풀렸기에 몬스터들도 활동하기 시작할 테지만, 또 다른 주적(?) 간부도 활발하게 순찰을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분여 동안 말없는 경계가 계속되었고, 입이 심심해진 내가 말을 꺼내었다.
"요즘은 라키아 병사장님이 뭐라고 안하십니까?"
"뭐? 이 자식 봐라. 같은 두줄 짜리 됬다고 그런 소리도 할줄 아네."
말 자체는 거칠었지만 어조는 장난스러웠다.
나는 이제 일등병 1호봉이고 그는 10호봉. 다음 달이면 상등병으로 진급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꽤나 싱글벙글해 보였다.
"떨어지는 낙엽도 꽁지 빠지게 피해야 되는 말년이잖냐. 전역빵 맞을 거 생각하면 우리한테 잘해줘야지. 요즘 웃으며 서로 안부 묻고 있다."
"하하하. 상황이 재미있네요."
라키아 병사장은 다음 달인 3월초에 정기휴가 10일에 분대장보상과 최전방보상 5일씩을 합한 20일 짜리 대형휴가를 가게 된다. 그 휴가가 끝나면 사단에서 복귀해 전역식을 치르는 것이다. 한달 도 채 안남은 상황이다.
자대 전입한 직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헤어지기 전날에는 전역의 기쁨과 더불어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한(?) 일환으로 모포를 뒤집어 쓰고 후임병들에게 두들겨 맞는 전역빵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물론 심하게 원한을 산 덕분에 거부하는 이도 몇몇 있었지만, 라키아 병사장은 생각했던 것보단 성격이 호방한지 먼저 하자는 얘기를 꺼냈었다고 한다.
"한달만 참자. 사정 없이 두들겨 패버려야지."
"연장이 허용된다면 라만 일등병님 일기장을 들고 때리시는 건 어떨까요?"
"푸하하. 그럴까?"
박장대소하는 베일 일등병을 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대전입을 해서 지나온 시간들이 알게 모르게 생각났다.
처음 경계를 시작할 때 그에게 지옥훈련을 받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이제는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고 있으니 내 자신이 이 분대에서 좀 더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할까?
힘들 땐 정말 힘들었지만 이렇게 웃으며 한가롭게 만담을 나누는 것을 보면 여기도 나름대로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티 발자국 때문에라도 라키아 병사장은 제발 아무 일 없길 바랄테지. 우리야 몇년을 더 지내야 하니 언제 오든 싸워야되지만 그 양반은 입장이 다르니까."
"그렇겠죠 아마... 응?"
대화를 나누며 전방을 주시하던 내가 이채를 띄었다. 상당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나마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눈을 한 차례 비비며 그 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른 침을 꿀꺽, 세번 삼키고 나니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고블린?!"
연두빛이 감도는 하얀 난쟁이. 고블린들이 떼거지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물경 백여마리!
"뭐, 뭐야?"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 나와 같은 풍경을 공유한 베일 일등병의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지켜보고 있던 우리. 정신을 차린 내가 소리쳤다.
"신호살 쏘십시오!"
"젠장할!"
평화로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박살나버렸다. 칼라 병사장이 위치한 초소에서 짙은 뿔피리 소리가 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베일 일등병은 전용전통에서 신호살을 꺼내며 초소 밖으로 나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빨리 숫자와 종류 파악하고 말해!"
대량의 적 출현시에 내초근무자는 신호살을 재고 외초근무자는 적의 규모파악을 하고 어떤 신호살을 쏴야 할지를 지시한다. 각양각색의 세가지 화살이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을 계속 주시하던 나는 한번 입을 쩍 벌렸다가, 주저 없이 소리쳤다.
"세 발 동시에 쏘십시오!"
퓨웅!
베일 일등병은 내 지시에 따라 화살을 쏘자마자 전방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화살 세발을 동시에 쏘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씨발 진짜냐?!"
"직접 보십시오. 그 이상입니다."
나는 양팔이 부르르 떠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며 말했다. 심장의 미칠 듯한 고동소리가 느껴져 왔다. 동공은 지진이 난 듯 떨리고 있었고 턱은 부르르 떨렸다.
도망치듯 철책선을 향해 뛰어나가는 고블린들의 뒤에는 십수마리의 트롤들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트롤보다 한참 거대한 하얀 털의 짐승이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오연히 서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쿠와아아아!
몬스터의 괴성이라기엔 너무 괴기했고, 악마의 괴성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말로만 듣던 예티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베일 일등병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구만..."
"발자국 남긴 건 결국 여기 찍어놨다는 소리였군요."
그런 그에게 담담하게 말한 나는 이 상황에서 경계병이 해야 할 행동요령을 떠올렸다.
통상적인 상황에서의 대처는 보통 사다리를 버린 뒤, 초소 위에서 농성하며 지원군이 올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선 꽤나 기묘한 상황이었다.
상위포식자인 트롤을 피해 도망쳐 오는 고블린들. 그리고 정점의 상위포식자인 예티를 피해 도망쳐 오는 트롤들의 방향은 정확히 철책선을 향하고 있었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전대미문의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런걸 생각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고블린들의 대부분 영(young)급의 오합지졸이었다. 그렇다곤 하나 저 정도 숫자라면 대부분은 철책선 꼭대기의 가시에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반수는 넘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트롤들은 힘으로 철책선을 뭉개어 버리고 넘어올 것이다.
결국 제일 뒤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예티는 힘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맞딱뜨려야 하는 상황인데, 교육 받을 때 예티의 공격에서 철책선이 버티는 최대시간이 5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은 그 귀중한 시간도 없는 셈이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은 너무도 현실성이 없어, 마치 시꺼먼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화창했고, 제손으로 꼬집고 있는 볼은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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