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종교행사[2]
근무취침을 하고나니 점심즈음이었다. 분대원들과 식사를 마친 나는 잠시동안 휴식을 취한 뒤 종교행사를 위한 집합에 소집되었다.
분대별로 2명씩 모였으니 총 10명. 중대본부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알고 있었으나 절차상 간부 한명이 인솔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소초장의 인솔하에 우리는 종교행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조심해서 따라올라와라. 눈은 안와서 바닥은 미끄러우니까."
앞장서는 소초장의 주의를 들으며 우리는 열 맞춰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길은 한차례 눈이 녹아내린 뒤 급격하게 얼어붙는 바람에 마찰력이 적어 무척 미끄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이동은 무척 더뎠다.
그 과정은 지겨울 법했지만 한편으로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조심해라 아르펜, 이런 데서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라."
"...반바퀴 돌면서 자빠졌나보죠 뭐."
"푸핫, 그런가? 그러고보니 많이 들뜬 표정이네."
"안젤리카 일등병님이 동행하신 덕분에 말이죠."
말을 마친 내가 고개를 돌려 먼산을 바라보았다. 추운 날씨임에도 얼굴이 뜨뜻한 느낌이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따, 자진한 보람이 있네잉? 야야, 니 그거 빈말 아니지? 아니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쑤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나는 입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작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뭐랄까, 소풍 한번 가본적 없지만 이런 게 어떤 의미론 소풍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나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머머 우리 로랑씨, 왜 이리 침울해보여? 누가 보면 어디 도살장 가는 줄 알겠다 야."
"이등병 로랑. 괜찮습니다..."
유리젤 일등병과 오붓(?)하게 대화하고 있는 아까의 이등병이었다.
아까 생각했던 부분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동병상련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지옥 끝자락 난간에 목덜미의 옷가지만 꽂혀 있는 모양새였다. 삶은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와 눈이 마주쳤다. 썩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충 해석하자면 너만 팔자 좋게 꽃밭에 앉아있냐 정도랄까?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매정하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참, 근데 아르펜은 믿는 종교라도 있나?"
"원래 없었지만 믿을 예정인 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어제 라이오 상등병과 있었던 얘기를 설명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물었다.
"그거, 확실히 니 의지 맞나?"
"네. 맞습니다. 순수한 의도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죠."
오른팔을 수평으로 접은 채 왼손으로 툭툭 치는 시늉을 하며 이게 다 그놈의 방패때문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선사했다.
"열에 아홉은 다 안 순수하다, 이 문디야. 나도 그놈에 쵸쿄파이 때문에 라마스카 입교했구만 뭐."
"그, 그렇습니까?"
"그래. 어쨌든 이지스교면 율라 중사님이셨나? 먼 발치서 봐서 잘은 모르지만 기품있어보이시더라. 입교한다고 하면 잘 대해주실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중대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이미 20여명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은 대부분이 내 고참일 것이다. 최전방의 특성상 타 소초의 고참이 언제적 군번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루정도의 여정이지만 말실수 한번 잘못 했다간 큰일날 것만 같다.
"뭐 그래 긴장하노? 다 우리처럼 즐겁게 온 거다. 마음 좀 놔라."
안젤리카 일등병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들을 살펴본 나는 금세 납득했다. 우리처럼 고만고만한 계급이었던 2,3소초의 고참들은 모두 편한 표정들이었다.
"이야, 너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거긴 좀 어때?"
"말도 마. 숨막힌다니깐."
몇몇은 서로 동기지간인듯 재회하기가 무섭게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떨어져 있었던 기간만큼이나 서로 할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순식간에 시장통이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이 모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척 활발했다.
참, 미처 대화를 못 나누고 있었긴 하지만 동행한 1소초의 인원 중에선 내 동기 리오도 있었다.
"이제야 동기끼리의 대화를 나눠보겠네, 아르펜."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안젤리카 일등병도 어느새 동기들의 무리에 끼여 수다의 장에 들어간 탓에, 자연히 리오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항상 부럽다니깐, 1소초의 여신님과 바로 옆에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 지간이라니..."
"별게 다 부럽네. 그러는 넌 적응 다 됬냐?"
"당연하지. 말도 마. 처음엔 선임들한테 되게 혼났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거의 한달 반만인 것 같다. 동기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실 소초에 오고나서는 근무뛰랴 훈련하랴 고참 따라다니랴 하루종일 정신 없었으니깐. 개인시간이 나더라도 다른 하나가 근무를 나가 있으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정신적 휴양을 온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작은 휴가'라고 표현하던 베일 일등병의 말대로였다.
"이야, 너네 아르펜이랑 리오지?"
그 와중에 2소초와 3소초에 배치받았던 동기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나와 리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너 고생한 티가 나네. 통통하던 얼굴이 반쪽이 다 됬네 진짜."
"어쩌겠어. 힘들어서 식욕도 안 생겨. 그나저나 저번에 1소초에서 싸웠다는 분대의 신병이 아르펜 너지?"
갑자기 나온 화제에 난 순간 놀랬다. 그게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다 났나?
"뭘 그렇게 놀래. 소문이란건 원래 금방 도는 거야. 간부들이 다 대단한 활약했다고 난리야."
"그, 그러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행운이 겹쳐진 결과였지만 말이다.
잠깐, 거기까지 들었으면 중독된 사실도 알텐데?
"독에 당한 건 어때, 지금은 괜찮냐?"
"그래. 며칠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하더라. 죽을뻔했지."
나는 고블린들과의 전투 때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참 아찔했지 그때는.
"주목!"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을 박차고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자자, 잡담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어서 오와 열을 맞춰서 집합하도록."
중대장이었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공터에 서있는 일이등병들을 통제했다.
'저번이랑은 참 딴판이네.'
샨티 일등병과 있었던 근무지에서 한차례 단막극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군대란 참 재미있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와 동기들은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열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소초별로 삼열종대로 선다. 실시."
사실 인솔해 온 각 소초 별 간부가 뻔히 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한 마디만으로도 오와 열을 맞추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군기가 바짝 든 일이등병이라는 사실도 컸고.
덕분에 중대장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훌륭하군. 이렇게만 통제에 따라 주면 즐겁게 보내다 가는 거다."
이렇게 운을 뗀 중대장은 연설을 시작했다.
"입대전에 종교를 믿는 녀석도 있지만, 안 믿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설명하지. 우리 아르고니아에는 종교가 크게 두 가지 있다. 식량의 신 라마스칸을 신봉하는 라마스칸 교, 수호신 이지스를 믿는 이지스교가 있지."
"수호신 이지스?"
순간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다. 라이오 상등병의 말에 따르면 카이안 콴타가 언급되어야 정상일텐데?
"라마스칸교인은 왼쪽. 이시스 교인은 오른쪽에 서면 될 것이야."
나는 중대장이 말을 마친 이후의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잠시 웅성웅성하더니 왼쪽으로 쭉 줄을 섰다. 30명 중 거의 대부분이었다.
"뭐해, 아르펜. 안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흔드는 동기들이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라마스칸 교에 가면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쵸쿄파이를 주기 때문이다. 반면 이지스 교에 가면 이상한 호흡법만 가르친다는 소리가 파다했다.
문득 묘한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웃으며 내 어깨를 짚고 있었다.
"소신껏 골라라. 어딜 가든 니 선택 아니가."
"네."
찰나의 당황스러움도 잠시, 나는 홀로 오른쪽을 향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왼쪽줄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그런 날 지켜보던 안젤리카 일등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내 뒤를 따랐다. 어라, 안젤리카 일등병님?
"음. 한번쯤은 이지스 교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안젤리카 일등병님..."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조금 감격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후임인 내가 혹시나 기죽을까봐 함께한 것이리라.
"호오. 이번엔 의외로군. 율라 중사가 좋아하겠어. 자, 라마스카 교인들은 카이란 중위를 따라가도록. 너희 둘은 곧 율라 중사가 데리러 올 것이야."
이채를 띄는 중대장을 보니 이지스 교가 정말 인기가 없긴 없나보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내 등을 탕탕 치며 으름장을 놨다.
"아르펜 니 감동했재? 의리로 치면 둘째로 서럽다고. 앞으로 잘해라잉."
"앞으로 안젤리카 일등병님의 뒤만 따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익살스러운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고고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내 귀를 간질었다.
"너네가 우리 이지스교 종교행사에 올 아이들이니?"
"단결! 이등병 아르펜입니다!"
"일등병 안젤리카입니다."
조건반사로 경례가 올라갔고, 끝나고나서야 육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순간 숨이 멎을뻔했다.
율라라는 이름으로 보아 여간부일거라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예쁜 말상이라고 해야할까? 위아래론 조금 길었지만 전반적으론 작은 얼굴형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각져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얼굴과, 거기에 너무 어울리는 블론드색 단발은 탁월한 조화를 이루었다. 거기에 맞물려 도무지 아무나 어울릴 수 없는 하얀 제복은 그녀의 마르면서도 육감적인 몸매와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았음에도 팔등신은 될 것같은 신체비율과 군모에 새겨진 두자루 검 덕분에 올려다봐야 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중사 율라다. 중대본부 순찰자고, 중대 이지스교 주관자이기도 하지."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는 묘하게 절제되어 있어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뭘 시키면 1초내로 해야될 것만 같았다.
율라 중사는 살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내 군모를 손으로 집어 허공에 툭툭 털었다.
"후. 파리만 날리던 우리 이지스에 오랜만에 귀여운 신도들이 오셨군 그래. 아니면 그저 호기심으로 왔나? 아무튼 따라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조건반사로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안젤리카...일등병님?"
"뒤만 따르겠다는 사람이 10초만에 바꼈네?"
내 등을 꼬집으며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하는 그 말.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다시 쏘아붙였다.
"니 침흘리드라?"
"아..."
이제야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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