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격전. 그 직후.[3]
"여긴 도대체 어디지?"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몽환을 갓 벗어난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관찰했다.
눈을 뜬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병실 같았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하얀 바탕을 기반으로 한 붉은 십자가 자리잡힌 마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초는 아니었다. 1소초엔 따로 마련해놓은 병실조차 없을 뿐더러 따로 의무병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엔 견장에 붉은 십자마크가 달린 의무병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일등병 아르펜. 정신이 드십니까?"
온화해 보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여인의 한 마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초위 계급장을 보니 의무대장인가보다. 내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정신이 듭니다."
"다행이군요. 아무쪼록 몸조리 잘하시길."
"아, 네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경황을 찾고 있었다. 장교가 일개 병사인 나에게 왜 존대까지 하지? 심지어는 태도 또한 지극히 공손했었다.
말을 마친 의무대장은 몇명 되지 않는 좁은 의무실의 문을 열며 급하게 발걸음을 나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던 나는 이내 관심을 지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 몸에서 쏟아지는 소리 없는 비명에 신음을 흘렸다.
"크으윽."
온 몸의 뼈마디가 덜컥거리는 기분이었다. 근육이 갈가리 찢겨진 듯, 고통이 엄습했다.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눕힌 나는 끙끙거리며 내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눈을 제외한 전신이 붕대투성이였다.
예티와의 싸움에서 내가 가진 모든 힘과 잠재력을 다 쏟아낸 결과였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근처에 기절해 있던 다른 고참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적인 상황이었다. 최전방에 습격해온 예티의 첫 타겟이 된 이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하니까.
"안젤리카는 무사할까. 제발 살아 있어야 하는데..."
멍하니 다리를 덮은 모포를 바라보던 내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예티가 나타났을 때를 또 다시 되뇌었다. 로프를 타고 올라가던 안젤리카가 놈이 던진 돌의 파편에 맞고 굴러 떨어지는 광경. 그걸 본 순간 나는 미쳐버렸다. 피가 거꾸로 쏟는 기분이었고 눈알이 뒤집힌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반쯤 유령이라도 씌인 상태로 안젤리카를 구했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예티에게서 그녀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정면으로 맞붙었다. 당연하지만 그 뒤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한참을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문득 모포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20대 초반의 여인이 젖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전 까지만 해도 내가 그토록 간절히 살아있길 바라던 사람이었다.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젤리카...일..."
와락.
더듬더듬 거리던 내가 미처 말을 다 이어가기도 전이었다.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던 안젤리카는 조용히 다가와 부드럽게 나를 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어깨가 축축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보야. 왜 혼자 죽을라고 설쳤노..."
목소리가 유난히 떨려왔다. 나는 귓가로 나지막히 들려오는 안젤리카의 목소리에서 미안함과 불안함, 애정과 안도감 등등이 함께 묻어나옴을 느꼈다. 내가 대답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누군가는 죽었을 테니깐요."
"니 죽었으면, 나는 살아도 더 살아갈 용기가 없었을 거다."
몸을 일으킨 안젤리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좋아한다 말한 사람이니깐."
"..."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염없이 안젤리카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그녀도 내 눈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나에게 다가와 붕대가 감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나선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나 또한 약간 당황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풋."
"하하하."
나와 안젤리카, 둘은 동시에 웃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두 남녀가 이러고 있는 게 조금 우습게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숫기가 없어 부끄러워서였을까.
뭐, 어느 쪽이든 좋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서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녹아 내려가는 것 같았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서였을까? 안젤리카가 화제를 돌렸다.
"참. 모르고 있을테니 말해줄게. 여기는 지금 사단 본부의 병실이고, 니랑 내 그리고 라이오 상등병님 이렇게 셋이 후송되어 왔어. 그때로부터 5일이 흘렀지."
"그렇군요..."
5일이나 의식을 잃고 잠들어 있었구나. 하긴, 몸이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안젤리카가 말했다.
"그동안 사단의 높으신 분들이 전부 여기 병실에 와서 니 상태 다 확인하고 가드라? 사단장도 두어번이나 왔었구... 참! 하얀 로브를 한 아들도 왔었다."
"하얀 로브요?"
"응. 그 뭐라드라...? 언더 프로즌이라던가?"
안젤리카는 잘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다,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닫으며 놀랬다.
그들의 존재는 입대 전부터 알타바르에게서 무수히 들었다. 자신이 소영주만 아니었다면 언더 프로즌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지.
언더 프로즌이라니? 그 이름만 무성한 전설의 특수부대가 당최 왜 날 찾아왔었던 걸까?
덜컥.
그 때 우리가 있던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들어온 인물을 본 나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흔한 갈색의 머리칼임에도 구렛나루와 이어지는 정돈된 콧수염과 턱수염을 가진 그는 아르고니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상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공허해 보여 무심한 듯 해보이면서도 그 안에선 우뢰같은 기세가 폭발하듯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나름대로 안목이 늘었다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런 종류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성질이었다. 그는 이제껏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입고 있는 새하얀 로브로 인해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진즉에 인지할 수 있었다.
나와 안젤리카가 동시에 경례를 했다.
"단결!"
"그런 거 안해도 된다. 난 군인은 아니니까."
하얀 로브의 중년인은 손을 휘휘 저은 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선 이어 말했다.
"내 소개를 하지. 아르고니아 왕하 특수부대 언더 프로즌의 제2번대, 도살자(butcher)의 대장을 맡고 있는 크로서스다."
"일등병 아르펜입니다."
시선은 정확히 나를 직시하고 있었기에,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소개를 했다. 관등성명을 한 셈이지만 군인은 계급이 시작이며 끝이다. 다른 소개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네가 예티와 싸우는 것을 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마지막만 보았지만 말이지."
크로서스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상당히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하기야, 그 부분은 나도 이해가 되었다. 최전방의, 그것도 갓 일등병을 단 병사가 혼자서 상대해 쫓아낸 사건은 결코 상식적인 사건은 아니었으니깐 말이다.
"오러 테일로 예티의 눈알을 아작내는 모습은 아직도 내 눈앞에 생생하더군. 누구에게 배운거지?"
"...스스로 터득한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평정을 유지하던 크로서스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스스로 터득했다? 하... 오러운용법은 누구에게 배운 거지?"
문득 내가 죄를 짓고 감방에 들어왔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크로서스와의 대화 자체는 꽤나 심문조였다. 하지만 일개 병사에 불과한 내가 왕하 직속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리는 언더 프로즌의 대장 앞에서 반항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제가 소속된 1중대의 율라 중사에게서 배웠습니다."
"하하하. 율라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이번엔 그 말을 들은 내가 놀랐다. 율라 중사는 전직 언더 프로즌 요원이었을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말투로 보아 저런 냉혹해 보이는 중년인은 무드가 없어 꼬이는 여자도 없을 테니깐.
크로서스는 생각에 잠긴듯 잠시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침묵했다. 나와 안젤리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정자세를 한 채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짧고도 긴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들어 날 빤히 바라보던 크로서스가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는 성격은 아니니 단도진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언더 프로즌에 입단하게."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