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혹한의 계절[7]
"아니..."
흐리는 말 끝에 당황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내 목소리가 생각치도 않게 격하게 흘러나와서였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성대를 통해 나오는 소리는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러갔다. 베일 일등병이 생각을 정리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뜻밖의 얘기를 해서 당황스럽네. 그거 혹시 나한테 따지는 거냐?"
"그때 구두방 안에서 우셨습니다."
"...아. 그랬냐?"
질문에는 대답도 안하고 딴 소리만 하는 나였지만, 베일은 구태여 그것을 따지지 않고 내 흐름을 따라갔다. 묘한 자책감이 느껴졌다.
사실 내 질문은 묘한 질책과 함께 과거를 캐묻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 전입 올 때부터 두 고참 사이에는 뭔가 있는 듯이 느껴졌으니까.
아예 어중간한 사이라면 모를까, 나는 이미 그녀를 깊이 좋아한다. 그래서 가까득한 고참 앞에서 이런 저돌적인 말이 나올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너, 나랑 안젤리카 사이의 과거를 알고 싶은 거지?"
"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베일은 고개를 돌려 나를 한참 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서로 공공연하게 남에겐 얘기 안했었는데, 너한테는 얘기해줄게. 뭐,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
말을 마치고 시작한 베일의 과거사는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아르고니아에선 흔한 이야기.
베일은 몰락한 귀족가 출신으로 평민처럼 지내다 대장장이로 새로이 일어선 아버지를 도우던 평범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안젤리카 일등병의 가문도 비슷했다. 그녀의 경우엔 부모님 대에 몰락해서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만 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베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대장간, 같은 몰락귀족 출신이라는 동병상련 속에 두 부모님들은 친해졌고, 자연히 동갑내기였던 베일과 안젤리카 일등병은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처럼 지냈다.
을의 관계였던 안젤리카의 가문에선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게 위해 그녀와 베일이 약혼하기를 바랬고, 베일의 부모님 또한 흔쾌히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몰락 귀족이란 게 완전한 귀족도 아니었지만 또 평민은 아니었다. 신분의 고하가 상대적으로 옅은 아르고니아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말이 급이 맞는 가문지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베일만 찬성했다면 흔한 소꿉친구들 간의 결혼이 치러졌을 것이다.
"안젤리카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난 그 상황 자체가 싫었지. 당연하다는 듯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혼식을 하는 것 자체가 싫었거든."
"그렇군요."
"아예 귀족이라면 모를까, 몰락귀족은 까놓고 말해서 잘하는 평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고니아의 생계가 걸리는 주력산업이라곤 하지만 대장장이는 사실상 평민이 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약혼식조차도 차일피일 미루던 베일은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뒤따라 입대한 안젤리카도 이 소초에 들어와 하필이면 같은 분대의 맞선임관계가 되버린 것이다.
"첫 직후임이 안젤리카라니, 그 때만 생각하면 정말 놀랄 일이었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챙겨줄 건 챙겨주지만 거리는 두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베일 일등병님은, 안젤리카 일등병님과 결혼하는 게 싫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잠자코 날 바라보고 있던 베일이 반문했다.
"너라면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짜여진 결혼식을 하고 싶겠냐?"
"저라면, 안젤리카 일등병이 소꿉친구다? 아무것도 안 따질 겁니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웃음이었다.
"너, 좋아하는구나?"
"예쁘고 착하시잖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나를 계속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베일이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이거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인데? 너 평민이냐, 귀족이냐?"
"둘 다요."
"둘 다는 또 뭐야?"
"음... 귀족이 된 평민이죠."
살짝 대답을 미루다, 결국 끄집어 내기로 했다.
뒤이은 대답에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는 베일이었다.
"이야, 고아병 귀족? 가문이 어디길래?"
"라이칼의 하임달 가문이요."
"이제보니 대단한 분이셨구만. 안젤리카를 맡겨도 되겠어."
베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은 안한다고 해놓고, 맡겨도 되겠다니요?"
"결혼이 싫은거지 그 녀석이 싫은 게 아냐. 아니, 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야."
"그런데도 울리셨습니까?"
"아나, 이 자식이 진짜..."
내 도발에 발끈하는 베일이었지만, 이내 목소리가 다시 잦아들었다.
"아 그래. 네가 나한테 그렇게 시비 걸 만해. 좋아하는 사람을 울렸으니까."
"이해하시니 다행입니다."
내 말투는 시종일관 도발조였다.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는데, 오늘 대화에서 폭주한 느낌이다. 안젤리카 일등병의 우는 모습을 떠올리니 시나브로 감성이 이성을 잡아먹어버렸나보다.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던 베일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잠시 후, 양손바닥을 붙이며 내게 사과했다.
"그래. 미안하다. 나도 친구한테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많이 화났었나보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고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
"그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앙금은 없는 거지?"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베일 일등병님."
"큭. 그런데 전역할 때까지 많이 참아야 될거야, 이등병씨."
베일 일등병이 내 계급을 딱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야 이를 말인가? 사랑 앞에서 3년은 우습다.
그러던 중, 궁금증이 생긴 내가 물었다.
"그런데 같은 지방 출신인데 사투리는 왜 안젤리카 일등병님만 쓰시죠?"
"걔가 어릴 적에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그 분이 사투리가 억쎈 지방 출신이셨거든. 지금은 많이 고쳐진 편이야."
"아. 그렇군요."
저게 많이 고쳐진 거였구나.
***
근무가 끝난 뒤, 베일 일등병은 샨티 일등병을 비롯해 일일이 한명씩 독대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었다.
사실 일이등병 라인은 그를 제외하면 다 성격이 순한 편이었기에 오히려 다행이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나와 베일 일등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지만 말이다.
"미안해 안젤리카."
나는 구두방 뒤에 숨은 채,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보고싶다고 한 내 부탁에 의해서였다.
"미안할 거 뭐 있습니까. 어쩔 수 없죠."
이런 상황은 어색한 모양인지 제대로 눈을 못 마주치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베일 일등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넌 밖에 나가면 내 소중한 친구잖아. 여기서 만났으니 잘해줘서 모자랄 판에 심한 소리를 했던 것 같아."
"베일 일등병님..."
안젤리카 일등병의 목소리가 꽤나 복잡미묘했다. 아마도 갈등은 풀렸는데 소중한 친구란 부분에서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둘 사이가 정확하게 관계정립이 안되었던 상황이었기에. 이번에 확실해진 셈이다.
"넌 전역하고 정말 좋은 사람과 이어질 거야. 이건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먼 소립니까. 베일 일등병님 친구는 내 친구기도 한데? 다 또라이 쉐끼들밖에..."
"아니, 아무튼! 딴지 걸지 말고 좀 들어! 너 땡 잡을 거라고 자식아."
"아야. 갑자기 꿀밤은 왜 때립니까!"
갑자기 발끈한 그에게 이마를 쥐어박힌 안젤리카 일등병이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혔다.
그래도 연신 실실 웃는 모습이 평소의 그녀와 다름 없었다.
지켜보던 나는 웃으며 미련없이 고개를 돌렸다. 관계가 정리된 둘 사이는 전보다 더 홀가분해 보였다.
사소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베일 일등병의 행동으로 분대의 무겁던 분위기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마음의 짐이 사라진 우리는 다음 주의 오후 주간도 무난히 치렀고, 그 다음 주가 되니 날씨가 점차 따뜻해졌다.
혹한의 계절이 드디어 지나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영하의 날씨였지만 큰 고비를 넘겼기에 분대원들의 기분은 더 없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드디어 705년이 저물고 706년의 첫 날이 밝았다.
"자, 오늘도 근무를 서보실까."
1월의 어느 날. 베일 일등병과 함께 경계로를 걷고 있던 나는 산등성이의 뒤로 떠오르는 햇빛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인간의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걸까, 지금도 라이칼 영지보다 한참은 추운 날씨지만 혹한의 계절을 거치고나니 햇빛만 봐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낮에도 자욱하던 서리안개가 걷히고 난 하얀 산기슭의 모습은 항상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고보니 철책선 바깥의 눈도 많이 녹은 것 같네."
"그러네요."
안젤리카 일등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서일까. 베일 일등병은 그 전보다 더 나에게 사근하게 대해주는 모습이었다. 함께 경계로를 걸어가며 철책선 바깥에 쌓인 눈을 감상했다.
허리 이상을 덮고 있던 눈은 어느새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날씨는 따뜻해지고, 갈등은 없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좋은 일만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베, 베일 일등병님!"
"무슨 일이야?"
"저, 저거...!"
놀라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베일 일등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철책선 바로 앞을 왔다가 돌아간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직경만 1미터에 달하는 그 발자국은 트롤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컸다.
"설마...?"
"예티의 발자국이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베일 일등병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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