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하얀 설인[8]
"후웁, 하아-."
예티와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하던 내가 가볍게 들숨을 쉬고 날숨을 내뱉었다. 탁한 노폐물이 빠져나간 뒤 신선한 무언가가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겨울임에도 등은 땀으로 적셔져 있었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지친 몸은 허기와 졸음을 갈구했지만, 사지의 감각은 끊임없이 움직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땀이 식으면 손과 발이 얼어붙는다.
그럼 둔해진다.
둔해지면? 끝장이다. 나는 다시 움직였다.
콰우우우
예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고개를 들어 놈의 얼굴을 살폈다. 반쯤 이성을 상실한 상태. '한낯 인간 따위가 날 이렇게 애먹이다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놈을 도발하기 위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놈이 더더욱 광분했다.
말로만 듣다가 오늘 처음 맞딱뜨린 예티다. 처음에는 안젤리카의 안위와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해 여유가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패를 쥐고 일대일의 국면으로 가게 되니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놈의 특징을 여실히 체감할 수가 있었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 하나. 자존심이다. 예티족의 특성인지 저 놈 개인의 개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풍부한 표정은 심리를 읽기가 무척 쉬웠다. 물론 여유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말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놈의 자존심이 나로 인해 무척 상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기야, 자신의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조그만 인간 병사들을 한 하나도 잡아먹지 못하고 되려 단 한명한테 반격까지 당하며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의 놈은 아까에 비해 매우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또 다른 하나. 생각보다 낮은 체력이다. 놈의 움직임은 나와 일대일로 교전을 처음 시작할 때에 비하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물론 아까 라이오 상등병이 놈의 뒤꿈치를 벤 것이 주효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걸 감안하더라도 놈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놈의 체형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예티의 이미지에 비하면 꽤나 왜소한 편이었다. 신장은 분명 트롤도 압도할 정도로 컸지만 덩치 자체는 의아할 정도로 작았던 것이다.
탕탕.
"덤벼 봐. 털복숭이 새끼야."
내가 쇼트소드의 폼멜로 방패를 치며 놈을 도발했다.
지친건 나도 마찬가지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부턴 정신력 싸움이다.
상황은 나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선공은 하지 않는다. 시간만 번다. 어차피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까마귀 사단의 정예들이 속속 도착해 놈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놈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휘이익.
이윽고 놈의 주먹이 나에게로 찍어내려왔다. 내 속도를 알고 있으니 높게 들어올리지도 않고 단숨에 떨어졌다.
쿵!
실낱같은 여유를 두고 피한 내 인영이 놈의 손등 앞에 섰다. 샨티 상등병의 키만했다. 쇼트소드를 양손으로 잡은 채 말아쥔 손가락의 첫마디들을 수직으로 내리그으려는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놈이 손목을 살짝 꺾으며 엄지와 중지가 내 방향으로 모아졌다. 앞장 선 엄지 뒤로 중지가 지렛대를 세우고 있었다.
젠장, 어쩐지 바닥을 치는 소리가 약하더라니!
퍼억!
"크윽."
미처 대비를 못한 내 몸이 3미터나 튕겨져 날아가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별이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일어서는데 현기증이 났다. 손등으로 인중을 쓸어보니 코피가 묻어나왔다.
놈의 손가락을 튕기기 전, 방패를 들어 막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경계병은 털옷이 곧 갑옷이다. 맞으면 즉사가 아니더라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달려든 놈의 후속타를 피해낸 나는 주위를 빠르게 곁눈질했다. 날아가면서 쇼트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글렀군."
쇼트소드는 놈의 오른쪽 뒤편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우러 가는 것은 불가능. 결국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야만 했다.
사실상 없는 무기라고 봐야 무방했다. 날길이가 60cm에 이르는 쇼트소드로도 가죽을 뚫고 생체기를 겨우 내는 것에 그쳐야만 했으니 말이다.
반격할 무기가 사라지자 놈은 신이 났는지 거침없이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쾅! 쾅!
막고, 피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예티가 지친만큼 나도 많이 지친데다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기에 아까 가지고 있던 실낱같던 여유는 이미 박탈당한 상태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맥박은 요동쳤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시야는 흐려지다 말다를 반복했다.
오로지 하나. 불꽃같은 정신력만이 버팀목처럼 쓰러지려는 나를 지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덥썩.
그러던 중이었다. 또 한 차례 이어진 예티의 공격에 내가 바닥을 구르는 중이었다. 손에 무언가가 잡혀 집어보았다. 화살이었다. 기존의 화살과는 조금 다른 아주 이질적인 감촉.
"아예 죽으란 법은 없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화살은 바로 내 전통에 있던 마지막 한발의 유령살이었기 때문이다. 안젤리카를 구하는 와중에 정신없이 집어던진 전통에서 빠져 나온 그것이 우연찮게 손에 잡혔다.
물론 그것이 이 난관에 대한 완벽한 해법은 아니었다. 화살을 쏠 활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도박을 베팅할 최소한의 쩐은 확보한 셈이다.
유령살을 바지 옆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달리던 내가 고개를 돌려 예티를 올려다보았다.
쿠르르르.
지금 이러고 있는 것조차 자신에게 아깝다는 듯, 놈은 핏발 선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뛰는 와중에 단검 두자루를 뽑았다. 그와 동시에 입고 있던 두꺼운 트롤 털옷을 벗고, 장구류를 집어던졌다. 몸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한겨울에 딱 얼어죽기 좋은 행동이었지만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지금의 몸상태론 1분도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까앙!
한쪽무릎을 꿇으며 휘두른 주먹을 내가 비껴막았다. 내구력이 다한 방패가 반쯤 부서져 나갔다. 얼얼한 왼팔의 고통을 참으며 주저없이 방패를 버린 내가 세우고 있는 다리를 향해 힘껏 뛰어 올라 제식 단검을 힘껏 박아넣었다.
푸욱.
깊게 들어간 단검에서 실낱같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립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솟아 올라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리곤 놈의 어깨를 향해 뛰어올라 단 한 자루 남은 흑철단검을 박아 올라섰다. 놈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뒤늦게 내 의도를 눈치챈 놈의 왼손이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엎드려 손바닥을 피한 내가 주머니에서 유령살을 꺼내들고 뛰어들려는 찰나였다.
덥썩.
빌어먹을! 방심한 사이에 뒤로 날아든 오른손에 잡혀버렸다. 나는 금세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버렸다. 나를 붙잡은 손을 눈앞에 두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예티. 마치 '어떻게하면 잔인하게 찢어줄까'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까전 있었던 전투에서의 냉정함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붙잡혀 있었지만 유령살은 내 오른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고, 체내의 오러도 실낱처럼 남아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살아서 안젤리카를 보고 싶다.
스스스
생존에 대한 나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을까? 나는 허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뜻밖의 이질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확히는 꼬리뼈 부근이었다. 거기서 꼬리같은 무언가가 내 손아귀에 있는 유령살을 가져가려고 했다. 감각이 느껴지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기묘한 느낌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손을 놓았다.
오러로 만들어 진 것일까? 그것의 존재감이 강력해질수록 내 몸 안에 남아있던 실낱같은 오러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유령살을 가져간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아아악- 푸욱!
내 뒷편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든 유령살은 놈의 눈을 꿰뚫었다. 동공 한복판에 정확히.
- 작가의말
연재가 너무 지연되어 죄송한 마음에 따로 작가의 말을 생략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올리겠습니다^^;
본업이 따로 있어 마음같아선 주5일로 연재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주 2,3회가 제일 현실적인것 같네요 ㅜ 그것조차 막히면 쉽게 안써지기도 하더라구요.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를 쪼개서 최대한 써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예티파트는 1부 1막의 클라이막스인데, 시놉을 짜놓고도 여기까지 올수는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었지요...
독자님들의 따뜻한 댓글과 관심 덕분에 아직까지 연중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ps. 불량회사원님, 후원 감사합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