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한밤의 추격자[1]
"중령 카논, 들어가겠습니다."
을씨년스러운 문소리와 함께, 한명의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두개의 눈꽃이 수놓아진 군모를 쓴 남자는 장대한 체구를 가진 엄숙한 표정의 중년인이었다. 자로 잰 듯 절도있게 옮기며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뭐야? 또 순찰 나가셨나 보군."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자 표정을 푼 그는 뒷짐을 쥔 채 고개를 까닥이며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돌아다니는 폼이 빌린 돈 받으러 온 동네 불량배 같았으니, 이 곳이 까마귀사단의 지배자인 코갈 레이븐 중장의 거처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참 겁 없는 행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나이 지긋한 영감 아니랄까봐 여전히 볼 거 참 없네."
집무실을 한바퀴 돈 카논 중령의 감상평이었다. 정말 군에 뼈를 묻은 인물답게 사단장의 집무실엔 군과 관련된 물건밖에 없었다. 고위급 간부라면 한두개정도는 있는 취미물품조차 한개도 없었다.
"음? 오호라."
두리번거리던 카논 중령이 무언가를 발견한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책상 밑에 엎드린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었다.
"뭐야, 이 촌스러운 포장은."
두주먹만한 크기의 그것은 선물인듯 리본으로 조잡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씌워져 있는 종이엔 눈꽃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꼭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것 같았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카논 중령의 눈에 호기심의 불꽃이 타올랐다.
만지작거리면서 흔들어도 보는 모양새가 안의 내용물을 무척 궁금해 하는 듯했다. 잠시 골똘히 고민하던 그는, 피식 웃으며 사단장의 집무실을 나갔다.
"하아, 참 이게 뭐라고..."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가는 카논 중령의 시야에 경례를 하는 병사가 보였다. 순찰 때마다 데리고 다니던 사단장 보좌병이었다.
"사단장님 어디 계시냐?"
"그, 급한 용무를 보고 계십니다."
변소를 돌려말한 것이었다. 카논 중령은 턱을 짚었다. 사단장은 변비가 있었다.
"언제 가셨냐?"
"네? 그, 그게...5분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왼손에 들려있는 선물에 시선을 두고 있는 보좌병의 어깨에 손을 얹인채 나지막히 말했다.
"너, 오늘 나 못본거다."
"그, 그것이..."
당황해하는 보좌병을 뒤로 한채 카논 중령이 유유히 사라졌다. 점차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면서.
그러부터 20분뒤, 까마귀사단의 사단본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카논 이 찢어죽일 새끼가!"
...
"전반야 2경5 근무자 일등병 샨티!"
"부사수 이등병 아르펜!"
무장검사시간. 나는 사수 샨티 일등병의 외침에 뒤이어 군기 있게 소리쳤다.
고블린과의 첫 실전을 벌인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3일 동안 앓아누워있던 나는 체력이 더 회복되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흘을 더 쉬었다. 원래는 일주일 정도 쉬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더는 쉴 수 없다고 요청한 끝에 오늘에야 첫 전반야 근무를 서게 되었다.
근무에 투입되는 인원수는 정해져 있게 때문에, 내가 쉬는 만큼 선임들의 비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몸상태는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다.
"투입."
짧은 얀 중사의 한 마디와 함께 우리 분대는 산기슭으로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경계로를 나섰다. 묵묵히 앞을 걷는 내 시야에는 어깨까지밖에 안오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 확실히 괜찮은거지? 확 맛 가버려도 책임 못진다."
"네, 저 확실히 멀쩡합니다."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샨티 일등병에게 자신감있게 말하는 나였다.
"무리 안해도 되니깐 거리 벌어져도 되니깐 천천히 와 임마."
"네 샨티 일등병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오기가 있어서 그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우측 경계로의 내리막이 시작되자 샨티 일등병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신병이라는 핑계로, 환자라는 핑계로 뒤쳐지기엔 자존심히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죽었다는 그 병사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정말 멀쩡하다.
"후우, 후우..."
내리막이 끝나고 잠깐동안의 평지가 나오자 나는 숨을 골랐다. 같은 동선임에도 베일 일등병을 따라갈 때보다 체감상 1.5배는 빠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소초 최고의 순찰병답게 샨티 일병은 가볍고 빨랐다.
금세 오르막을 오르는 샨티 일등병을 안간힘을 다해 쫓아갔다. 적응이 되서였을까, 오르막을 오를 때에는 생각보다 쫓아가기 쉬웠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던 우리는 해가 다 떨어질 즈음에야 초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휴, 고집은 정말. 천천히 안 올라왔으면 어쩔 뻔했냐."
샨티 일등병의 핀잔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날 배려해줬다는 것을. 숨을 고르느라 말할 여유도 없었기에 나는 희미하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피식 웃은 샨티 일등병은 이내 초소에 올라 주간 근무자들과 인수인계를 거치고 외초로 나갔다.
"안에서 좀 쉬어. 그리고 인원은 충분하니깐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
활을 등에 멘 채 전방을 주시하며 나한테 말을 늘어놓는 샨티 일등병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외초서겠습...윽."
깜짝 놀란 내가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샨티 일등병이 코앞에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한마디했다.
"고참 내려다보게 돼있냐? 살짝 숙여."
"네? 아 네."
난 얼떨결에 쭈그려 앉아 샨티 일등병과 눈높이를 맞추게 되었다. 그녀는 내 이마에 살짝 박치기를 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얘기를 안해서 그렇지 너 엄청 큰 활약 한거야. 한줄만 아니었어도 포상휴가 나왔을 거다. 분대장님한테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랑 안젤리카가 상대한 고블린 녀석들 악명높은 애들이었어. 얀 중사님도 '앓던 이가 다 빠졌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지."
쉴새없이 나오는 말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단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꼬마고참(?)이 이렇게 박력있는 모습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고참은 고참인가보다.
"그러니까 며칠 쉰걸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고. 너한테는 우리가 더 미안하니까. 너 아니면 안젤리카를 영영 못 볼 뻔했어."
묘하게 떠는 듯한 마지막 말을 끝으로 샨티 일등병은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조용히 그녀가 한 말을 곱씹어보던 나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샨티 일등병님에게 안젤리카 일등병은 어떤 분입니까?"
"이 자식이 독이 뇌수로 퍼졌나, 별걸 다 물어보네..."
하지만 어조는 아까와 달리 진지하진 않았다. 피식 웃는 모습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몸매가 쓸데없이 좋아서 짜증나는 친자매같은 년이지 뭐."
"아아, 그렇군요!"
뭔가 샨티 일등병이 안젤리카 일등병을 괴롭히는 궁극적인 이유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뭐야 그 감탄사는?"
"하하, 아닙니다. 그럼 베일 일등병은요?"
"히죽거리는 꼬락서니 볼때마다 허리를 꺾어버리고 싶은 싸가지없는 남동생 놈이지."
"세레나 이등병은..."
"자기 할말 못하는 게 답답해서 잔소리 실컷 하고싶은 막내동생."
어쩌다보니 대화가 분대원 이야기로 흘러갔다. 어느새 샨티 일등병도 이 주제를 즐기고 있는건지 다음 차례는 본인이 먼저 꺼내었다.
"라만은 뭐 그냥 옹알이 하는 늦둥이? 뭐 그래."
"푸하하...읍, 죄송합니다."
아차 싶어 급하게 입을 막는 나였다. 그런데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신경쓰지 마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샨티 일등병이었다.
"아르펜 넌 좀 듬직한 셋째오빠같긴 하네."
"음, 어째 실제 남매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아인 전 잘 모르겠지만요."
전방을 바라보고 있던 샨티 일등병이 고개를 돌려 내쪽을 향했다. 한참 날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남매 얘기 맞아. 아르펜 너 고아라고 했지?"
"네."
"난 입양아야."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시감이 느껴지는건 왜였을까? 안젤리카 일등병과의 일처럼 얘기하지 말아야 할걸 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 그런 기분을 느껴서였을까, 샨티 일등병이 손을 흔들며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북서부 샤리아 지방에선 먹을 입 줄이려고 타 지방에 입양 보내는 건 흔한 일이니깐. 덕분에 굶진 않게 됬지만, 한번씩 생이별한 가족들 생각 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옅게 웃으며 말하는 샨티 일등병이었지만, 어조는 알게모르게 구슬퍼보였다.
"지금은 분대원들이 내 가족이고 형제자매지 뭐. 그런데 아예 고아인 넌 좀 이해 못할 수도 있겠다."
샨티 일등병의 말에 고개를 들어 골똘히 생각하던 내 기억 속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고아병으로 어린시절을 보낸 내 기억 속에 유일하게 자리잡은 남자. 알타바르. 흐르는 피는 다르지만 그는 내 형이었다.
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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