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0번 척살병[2]
"..."
나는 단 한 마디 대꾸 조차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숨을 고르기도 바빴으니깐.
그 뒤로도 나는 할로이와 수십 합을 벌이며 검과 방패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얻어터졌다. 예티를 상대하면서 붙었던 나름대로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박살나기에 충분했다.
"허억, 허억..."
"캬하. 상태를 보아하니 대련은 이쯤까지 해야겠구만. 고생했어, 일등병 애송이."
자신의 클럽을 가볍에 척 짊어든 할로이가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그는 비밀요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자 치고는 무척 거만하고, 무례했다. 하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너무 일방적으로 밀려서 분함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가고 나서 나는 며칠간 멍투성이의 몸을 회복시키며 대련 때를 되새김질했고, 내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했다.
"이번에 너와 대련할 사람은 언더 프로즌 요원은 아니야."
"네?"
소초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0번 척살병으로 만든 장본인인 그들이 아니라니?
"율라 중사야. 그녀쯤 되면 너도 대련상대로 충분하겠지?"
"차고도 남으시죠."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내게 길을 열어준 장본인이면서, 예티의 손에서 우리를 살게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내 입장에선 스승과도 다름 없는 분이었기에, 오히려 기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의문이 있을뿐.
"저는 좋습니다만, 언더 프로즌에선 별 말이 없던가요? 대련은 그들 주관일텐데."
"그건 아니야. 어찌 되었든 너는 아직 이 까마귀 사단에 소속된 '병사'니깐 말이지. 그들의 영향력이 강하다고 해도 아르고니아 군과 언더 프로즌은 별개의 조직이거든."
"잘 알겠습니다."
소초장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직이 바뀌었어도, 결국 나에 대한 최종결정권은 사단장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전해야 할 내용은 다 전했고... 음, 하나 알려줄 것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 생각나면 알려 줄 테니 어서 가봐."
말을 마친 소초장은 손을 흔들었고, 나는 한 차례 경례와 함께 소초장실을 나왔다. 그리곤 곧장 우리 분대의 생활관을 향했다.
이미 정이 많이 들어서였을까, 분명히 힘들고 고단한 최전방의 소초생활이었건만, 잠깐 안봤을 뿐인데 분대원들이 무척 보고싶었다.
"뭘 이렇게 챙겨주셨대."
나는 쑥쓰러움에 목덜미를 살짝 긁적거렸다. 어깨에 멘 짐가방은 터질 듯 가득 차 있었다.
전부 다 헤임달 백작부인, 그러니까 어머님이 든든하게 생활하라고 바리바리 싸주신 것들이었다. 대부분은 육포을 비롯해 장기보존이 되는 음식들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고참들이 부탁한 물건들이었다.
이거 참. 벌써부터 샨티 상등병의 입가에 침이 고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칼라 병사장이 전역한 직후, 저 아래에 있는 페바부대에서 주기적으로 2인의 지원병들이 경계지원을 오는 탓에 내가 빠져도 비번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경계는 고달픈 임무다. 이런 것들로 다들 웃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철컥.
"단결. 일등병 아르펜,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어젖힌 내가 가볍게 이마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거의 모든 고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와아아! 드디어 왔냐 아르펜!"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야."
"네가 없던 10여일이 10년처럼 느껴졌어."
"하하. 그렇습니까."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씩 하는 고참들에게 말했다. 유난히 환호가 과하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잠시 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가방에 든 거, 다 먹을 거야?!"
"거의 다 먹을 거긴 합니다. 샨티 상등병님."
"우와아아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샨티 상등병의 몽롱한 눈빛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뒤에서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안젤리카가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아르펜, 내가 부탁한 거는?"
"아아. 담뱃잎 말씀이시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푸른 견장의 분대장. 프레카를 향해 나는 가방 한쪽에 넣어 두었던 가죽꾸러미를 꺼내어 내밀었다. 받아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던 그녀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냄새가 장난 아니네? 라이칼산은 처음인걸."
"뭐, 맛 자체가 특출난 건 아니라 유명한 편은 아니라더군요."
"그래도 이게 어디야, 군대에서... 헤헤."
프레카 병사장은 즐거워하며 가죽꾸러미를 소중히 안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소초에서 잘 안피는 편이라 잘 몰랐었는데, 그녀는 상당한 애연가라고 한다. 아마 칼라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
"내 꺼도 가져왔겠지?"
"너네 영지 근력포션이 그렇게 싸다면서."
"물론 가져왔지요. 좀 기다려 주십시오."
선물 받는 거도 짬순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보기 드물게 좁은 눈매를 억지로 부릅 뜨고 있는 메이아와 라이오 두 상등병을 보고선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며, 가죽에 곱게 쌓인 포션 두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 뒤론 베일 상등병과 세레나 일등병, 라만 일등병에게 각자의 선물을 건네주었다. 샨티 상등병의 경우엔 '다 필요없고 먹을 거나 잔뜩 가져와'라는 주문을 이미 수용한 상태였다.
"고마워 아르펜."
"별말씀을요."
가볍게 감사인사를 하는 세 고참들에게 웃으며 대답한 내가 안젤리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딱히 선물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몸 성하게 돌아오라고만 했었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엄지를 옆으로 세우다, 엄지와 검지로 원을 그렸다. 잇다 따로 보자는 우리만의 수신호였다. 안젤리카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육포야?"
"네, 소금 간을 적당히 해놨으니까 짭짤한거 좋아하는 샨티 상등병님한텐 딱일껄요."
"우물우물... 햐.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나네."
"푸하하하."
나는 이미 육포를 입에 가져가 씹고 있는 샨티 상등병을 보곤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뒤, 침상 위에 올라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낀 이상한 위화감에, 눈꺼풀을 몇번 깜빡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만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생활관의 한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경황이 없어서 처음엔 몰랐다.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침상 끝의 구석을 보니 처음 보는 병사 하나가 앉아 있었다. 곧게 세운 허리에 팔은 일자로 쭉 펴져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꾸욱 쥔 두 주먹은 무릎 위에 다소곳이 얹어져 있는 모습이 꼭 내가 처음 전입올 때의 모습 같았다.
휴가 가기 전에는 못보던 얼굴이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고참들이 당연한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누구긴 누구야? 신병이지."
- 작가의말
분량이 들쑥날쑥하네요 ㅜㅜ
이번주엔 최대한 편수를 늘려보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어쩌면 이번 편이 2019년의 마지막 편이 될지 모르겠네요 ㅎㅎ
다들 한해 마무리 잘하시구 즐겁게 해돋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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