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하얀 설인[1]
체구는 하늘을 덮을 듯 컸고,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한 온 몸에 눈처럼 새하얀 털이 수북했다.
움직임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날렵했고 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영락 없이 먹이에 굶주린 야수의 것이었다.
- 아르고니아 예티 보고서 121페이지에서 발췌
"예티의 족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어두컴컴한 밀실 안은 몇개의 양초만이 불을 붙인 채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원탁을 둘러싼 채 앉은 네명의 인영들은 통일되게 하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외관으로 보아 나이와 성별 또한 제각기 달라 보였다.
"위치는?"
"까마귀 부대 1소초 부근이라고 합니다."
"3년만의 출현이군요. 그동안 흔적조차 찾지 못했건만."
묵직한 저음의 중년인이 팔짱을 낀 채 턱을 짚으며 말했다. 침착해 보이지만 양팔은 미세하게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먹이가 다 떨어진 걸까요? 잠잠하다 왜 이제 나타났는지..."
"그렇겠지 아마. 단순한 짐승에 불과하니까."
30대 즈음으로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거기에 반박했다.
"그 단순한 짐승에게 속아 막심한 피해를 입고 놓치지 않았습니까? 경솔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크윽..."
반박을 당한 남성은 사실이었기에 반론을 펼치지 못하고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3년 전 예티의 습격으로 경계병 10여명이 살해당했다. 자신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놈은 도망친 뒤였다.
그 때도 놈의 족적은 발견되었지만, 그 부근만 잔뜩 경계하던 중에 엉뚱한 소초를 습격해 허를 찔렸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족적이 있는 전체에 걸쳐서 비상경계령을 내려야겠지."
"이 한겨울에 한낯 짐승과 심리전을 펼쳐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탄식을 하는 중년인에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오진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의 자료로 보면 놈도 맹추위 앞에선 활동을 안하는 것 같으니까. 추위가 차츰 가시는 2월에서 3월 사이에 습격을 하겠지."
"2월에서 3월 사이면..."
저음의 중년인이 말끝을 흐렸다. 최전방의 2,3월은 혹한의 계절처럼 극도로 춥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추운 시기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기준이었다. 예티에겐 가장 유리한 시기일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임무가 마무리 되는대로 족적이 발견된 부근을 기점으로 수색, 주둔한다. 까마귀 사단에 협조공문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단장님."
드르륵
나무의자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나갔다. 단장이라 불린 장년인이 선창했다.
"우리는 차가운 설원의 지하에서."
"하늘 위의 광명을 찾아나간다!"
****
어제보다 따뜻해진 2월의 공기에 나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따뜻하다기엔 여전히 체감온도는 만만찮았지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던 혹한의 계절도 저물었고, 쉴새없이 쌩쌩 불어대던 한파도 사그라든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정말 따뜻하다고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계급장에 화살 하나가 더 추가되어서 더 그런 기분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어이, 아르펜 일등병."
근무 전의 개인시간. 소초 앞의 벤치에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장난스러운 어조로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군모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관등성명을 유도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이라면 기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헤헤. 일등병 아르펜입니다."
"아따 입이 귀에 걸리셨네. 어째 다 승급하면 기분은 다 똑같나보네?"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만히 안젤리카 일등병을 응시했다.
12월의 집합 사건때 있었던 얼떨결의 고백. 당시 그녀는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지만, 거의 두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사자인 나 또한 구태여 그 부분을 먼저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일전에 베일 일등병이 한 말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지만 책임은 너와 안젤리카 둘 다 지는 거야.'
군내연애는 군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혈기왕성한 이십대 남녀가 부대끼고 생활하는 데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명예전역'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제동장치의 존재로 대부분은 서로간의 선 넘는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몇달 전 2소초 탈영 사건 때에도 목격했던 장면이니까.
루트와 레이라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이들은 사회적 눈총을 피하기 위해 페니아로 망명하게 되는데, 아마 대부분은 그때의 혈기를 못 참은 것을 후회할 것이다.
페니아는 우리처럼 철책선의 존재로 계급의 구분이 모호한 나라가 아니니깐 말이다. 하급귀족과 평민들이 같이 욕하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게 아르고니아면, 평민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귀족에게 모가지가 날아가는 동네가 페니아다.
"니 멀 그래 계속 빤히 보고 있노?"
"네? 아아. 잠시 다른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안젤리카 일등병을 보고 화들짝 놀란 내가 딴청을 피우며 대답했다.
그 다른 생각이란 게 뭔지 느꼈을까. 그녀 또한 움찔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 참! 호흡법은 요즘 어떤데? 마나가 느껴지는 것 같나?"
"전보단 진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난처한 분위기를 피하려는 배려에 속으며 박수를 친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온 몸에 마나를 운영하는 수준은 된 거 같더라구요."
"벌써? 햐. 대단하다. 난 이제 상체 쪽만 돌아가는데."
"운이 좋았죠. 근데 이걸 비기너 단계라고 했었죠 아마?"
"어. 그 다음이 율라 중사가 다다른 오러 유저라고 하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 단계라곤 해도 대부분은 오러 유저가 되지도 못하고 끝난다고 한다. 마나를 무기에 씌워 오러화하는 '오러 슬러그'를 터득하는 것은 전적으로 노력과 재능, 운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된다고 하니깐 말이다.
사실 수련할 시간 내기도 힘든 경계병인 내가 불과 몇달만에 이 정도 경지에 이른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뭐, 경계 설 때도 짬짬이 호흡법을 수련했지만 말이다.
"뭐하냐 너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한 고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작은 키에 비쩍 마른 체구. 하지만 민첩함과 식탐 하나만큼은 소초 제일인 인물이었다.
"샨티 상등병님 오셨습니까."
"춥다고 오전 내내 모포만 뒤집어 쓰고 있으시더니만, 그새 심심하셨나 봅니다?"
안젤리카 일등병이 놀림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샨티 상등병은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생활관 안에서 잠만 잤었다.
사실 근무, 제설, 수면이 겨울철 경계병의 통상적인 일과 쳇바퀴였긴 했지만 말이다.
"너네는 한참 뛰어다닐 일이등병 아니냐. 난 이제 세줄이니까 몸 좀 사려야지."
"풉."
나와 안젤리카 일등병이 동시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제일 어려보이고 애같은 고참이 세줄 됬다고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 말투로 말하고 있는 걸 보자니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본인도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한 샨티 상등병은 평소대로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아까 분대장님이 전달했었는데, 너네가 나가 있어서 전달하러 온 거야."
"갑자기 전달이라뇨?"
우리 둘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날이 조금 풀렸다곤 하지만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고, 이 일상에서 변한 건 없었다. 쉬는 도중에 전달해야할 정도로 급한 부분이 있었나?
"예티 건 때문에 그래."
"아!"
딱 한 가지 있었구나. 샨티 상등병이 말을 이었다.
"신호살 쏘는 법 확실히 숙지하고 있으라는 상급부대 지시사항이 내려왔어. 아마 저번 달에 베일이랑 아르펜 네가 발견한 예티 발자국 때문에 그런가봐."
"군 내부에서 이번엔 잡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겠네요."
안젤리카 일등병이 말했다.
예티가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데, 그 당시 큰 사상자 없이 무난히 격퇴시켰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자료를 본 게 아니라 고참들에게 듣기만 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발자국은 여기서 발견되었지만, 언제 어디서 습격해올지 모르니 경계 철저히 하고 발견 즉시 해당 신호살 쏘라더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조치였지만 쳇바퀴같은 일상에 젖어 살다 갑자기 발견하면 경황이 없이 마련이라 특별히 당부사항으로 내려온 듯했다.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은연중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두 고참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의 밝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순식간에 어두워져 있었다.
그 정도로 예티라는 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컸다.
어린 시절부터 옛날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짐승이었으니까.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