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하얀 설인[3]
"비상! 비상!"
"모두 완전무장 하고 집합!"
"예티가 나타났다!"
"출현 위치는 어디냐?!"
항상 조용하고 한산하기만 하던 까마귀 사단의 본부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막사 안에서 연거푸 울려퍼지더니, 이내 갖가지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연병장에 차례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단상을 향해 오와 열을 맞춰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고, 단상 위에는 까마귀 사단의 주인인 사단장을 중심으로 소속간부들과 무언가를 등에 짊어진 하얀 로브의 인물들이 병사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통신장! 빠르게 상황보고 하도록!"
사단장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중위계급의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1소초에서 온 마법전문입니다. 유도몰이로 추정되는 백여마리의 영급 고블린과 십수마리의 트롤이 철책선으로 쐐도. 그 뒤로 예티가 접근중이라고 합니다."
"출현시간은?"
심각해진 표정의 사단장이 물었다.
최초 발견자는 해당시간의 경계병들일 것이다. 소초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경계병 하나가 발견 즉시 정확한 보고를 위해 소초로 뛰어갔을 것이고, 소초에선 보고 즉시 상부에 직통으로 마법전문을 보낸다.
마법전문에는 최초 발견후 보고까지의 시간과 적 규모와 상황만 짤막하게 적게 되는데, 이 때 경계병이 초소를 이탈해 소초로 얼마나 빨리 복귀해 보고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2시 5분. 지금으로부터 10분 전입니다."
"다행이군."
사단에 최초 보고가 온 것이 5분 전이니 최초 발견 후 5분 만에 소초에 도착해 전문을 보낸 것이다. 그 정도면 사단에서도 가장 날랜 경계병이다.
"2년 만에 우리 사단에 예티가 나타났다.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의 적을 섬멸한다!"
"단결!"
시간을 다투는 일인만큼 훈시는 짧았다. 속보로 행군을 시작하는 병사들 사이로 하얀 로브의 인물들이 선두의 사단장에게 다가갔다.
"저희는 최대한 빨리 도착해 놈을 잡겠습니다."
"그러게. 그대들만 믿겠다."
사단장의 목소리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그들은 아르고니아군 위에 군림하는 국왕직속의 실력자들. 도착 전에 소초가 버티기만 한다면 예티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리막길인 3소초까지 스키를 타고 그 뒤 도보로 1소초까지 간다."
리더로 보이는 인물의 짤막한 지시가 끝나자마자 하얀 로브의 인물들은 순식간에 스키판을 신고 두개의 폴을 땅에 찍으며 눈 덮인 보급로를 빠르게 직활강했다. 실로 귀신 같은 속도였다.
***
"2경5로 올라가서 라이오 상등병네와 합류하자."
"네."
나와 베일 일등병은 신호살을 쏜 즉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경계로의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우리가 잡고 있던 1경89 근무지는 일전에 있었던 고블린과의 전투 때 싸웠던 격전지다. 그때 당시에는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기에 근무자들이 사다리를 버리고 초소를 사수하는 선택을 하였지만, 지금 그런 선택을 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실 2경5로 가서 합류하는 것조차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는 행위에 가까웠다. 예전부터 예티가 출현하면 적어도 10명 안팎의 병사들이 죽어나갔으니깐.
그리고 그 대부분은 그 시각에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었다.
쿵쿵! 키아아아!
뒤에서 울리는 괴이쩍은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쫓아오는 포식자들에게서 도망치는 고블린들이 철책선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놈들도 정신이 나간 상태인지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무릎 높이의 계단을 달리듯이 뛰어 올라갔다.
"하악 하악... 라이오 상등병님!"
"빨리 올라와!"
초소가 시야에 들어오자 위에서 손짓하는 라이오 상등병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나와 베일 일등병은 누가 뭐라 할 필요도 없이 뛰어가 정신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숨을 헐떡이던 나와 베일 일등병이 호흡을 진정시키는 사이, 라이오 상등병이 우리가 궁금해 할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샨티가 소초로 들어갔어. 지금쯤 인근에 위치한 병사들이 모두 출동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답하는 베일 일등병이었다. 예티 발자국에 대한 보고 이후 사단에서는 근무자 중 가장 빠른 병사를 소초에서 가까운 초소에 우선배치하라는 지시사항을 내렸었다. 소초에서도 가장 빠른 샨티 상등병이었기에 보고는 무척 빠른 편이었다.
물론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들의 목숨이 멀쩡할 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겨울임에도 흐르는 땀을 쉴 새 없이 닦던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라이오 상등병의 부사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근무지에선 오랜만에 보네, 아르펜."
안젤리카 일등병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 또한 반가웠지만, 상황이 상황이여서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인사를 뒤로 하고 우린 시선을 내려 저 아래 철책선쪽의 상황을 살폈다.
철책선의 날카로운 가시 철조망을 넘어가려던 고블린들 상당수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운좋게 넘어온 놈들이 반수였는데, 미처 올라가지도 못한 놈들은 동족들에게 몸싸움으로 서로 치이다가 뒤이어 뛰어온 트롤들의 육탄공세에 피떡이 되어 죽어나갔다.
트롤들의 경우에도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다. 연신 뒤를 돌아보며 공포에 떨던 놈들은 이내 합심하여 철책선을 함께 몸으로 밀어붙이며 넘어뜨리려고 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라이오 상등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번 몇차례의 육탄공세로 조금씩 철책선의 철항을 우그러뜨리던 놈들은, 결국 완전히 넘어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던 놈들은 자축할 겨를도 없이
하얀 설원의 괴수, 예티가 코앞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캬라라라라.
예티가 처음의 괴성과는 다른 소리를 내었다. 웃음소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소리는 마치 지하 아래에 잠들어 있다는 대악마의 울부짖음 같았으니,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심령이 흔들리고 온몸이 공포에 잠식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소리가 아니다.
덥썩.
도망치던 트롤들 중 제일 뒤에 쳐져 있던 한 마리가 다가오던 예티의 손아귀에 머리를 잡혔다. 트롤도 덩치로 따지면 몬스터들 중 손꼽힐 정도였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보다 한참은 더 큰 예티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만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꾸워어어!
고개가 뒤로 꺾인 트롤이 비명을 지르듯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졌다. 우리는 입가에서 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경계병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위험종이라 불리는 트롤이 저런 꼴이 되는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예티의 축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퍼엉!
예티의 손아귀에 잡혀 바둥거리던 트롤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이내 시체가 된 트롤의 피가 하얀 설원을 붉게 뒤덮었다. 그럼에도 평온한 모습의 예티는 죽은 트롤의 몸뚱이를 와그작 와그작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하얀 털에 피를 묻힌 채 한참 먹어대던 예티가 전방을 바라보며 난데없이 코를 킁킁거리며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어느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있는 방향이다.
"미친."
몸이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지금보다 더 적절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초소 위의 모두가 놈과 눈을 마주쳤다.
"웃...었다."
베일 일등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예티가 있는 곳까지는 꽤나 거리와 고저차가 꽤 있었지만 적어도 육안확인까지는 되는 거리였다.
기록에 전해내려지는 예티의 특징은 매우 특이했다.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여 있으면서도 얼굴은 말끔해 털옷을 입은 인간과 흡사하게 생긴 이 괴수들은 지능이 높아서인지 다른 몬스터들보다 표정이 무척 풍부하다고 한다.
웃는 표정에 대한 이유 또한 명확히 적혀 있다.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을 때 가장 진하게 웃는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 맛있다는 건가."
라이오 상등병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놈은 자신의 표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가 있는 방향의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명백한 거짓말은 없을 것이다.
"다 틀렸다..."
먼저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은 것은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눈시울마저 붉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다, 깨달았다. 나는 호흡법으로 몸 안의 마나를 순환시키며 내 안의 두려움을 떨쳐내었다. 그리곤 담담하게 안젤리카 일등병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격하게 안으며 말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까봐 말하겠습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안젤리카 일등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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