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싱그러운 봄의 급수장에서.[3]
"죽일 거냐고 임마. 응급처치를 배우다 졸았냐? 입에다 숨 넣어야지."
그러거나 말거나, 이 상황에 몰입한 메이아 상등병의 표정은 마치 전쟁을 앞둔 장군의 모습처럼 진지했다.
"알겠습니다."
메이아 상등병의 꾸중(?)에 묵묵히 대답한 세레나 일등병은 이내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선 라만 일등병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소리 없는 입술을 들썩였는데, 입모양으로 보아 '하 씨발'인 듯했다.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안젤리카였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모습에 나도 따라 웃었다.
"후우웁."
입술을 붙인 세레나 일등병이 굳은 표정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내쉬고 다시 불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러길 수차례. 콜록 콜록 헛기침을 하던 라만 일등병이 드디어 의식을 차리게 되었다.
"야, 라만!"
"이... 이일등병 라...만입니다아..."
원래의 말투가 있어선지 저게 멀쩡한 상태인지 오락가락하는 상태인지 헷갈렸다. 칼라 병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너 멀쩡한 거지?"
"괜...찮습니다..."
대답은 억지로 하고 있지만 눈은 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칼라 병사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분대원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뭐, 어쨌든 의식은 차린 거 같으니 너넨 다시 가서 좀 놀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좀 정신 차리겠지."
"네."
대답한 우리는 다시 발길을 돌려 못다한 물놀이을 마저 즐기기 위해 움직였다.
용기 있게 라만 일등병을 구해준 이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캬. 오늘 세레나 다시 봤어."
"다소곳하기만 하던 애가 물 속에선 아주 날아다니네 진짜. 다시 봤어."
"별 말씀을요. 이런 잔재주로 제 후임을 구할 수 있다니 다행일 뿐이지요."
칭찬에 약한 세레나 일등병은 어깨동무를 하며 등을 두드려주는 메이아 상등병에게 낯부끄럽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는 다시 계곡물에 몸을 담그려는 분대원들과, 숨소리를 내며 조용히 누워 있는 라만 일등병을 번갈아 보며 슬슬 따라가려는 찰나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하려고 시선을 던졌는데, 살짝 벌리고 있는 그의 실눈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
"..."
나와 2초 정도 눈을 마주치던 라만 일등병이 다시 눈을 감았는데, 그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복부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터지려는 폭소를 가까스로 갈무리하며 발길을 돌려세웠다.
보아하니 흉부압박이 될 때에 이미 정신을 차렸는데 기절한 척 한 듯했다. 슬며시 승천한 광대가 그것을 증명했다.
"왜 그러는데, 아르펜?"
안젤리카가 어깨동무를 하며 물어왔다. 내 표정을 유심히 본 모양이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손을 대고 속닥거렸다.
"큭. 푸하하하."
듣자마자 자지러지게 웃는 안젤리카였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본 세레나 일등병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왜, 세레나야."
"저 그게... 왜 그리 웃으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꽤나 요상한 질문이었지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모습이 정상적인 멘탈은 아니어 보였다. 그 부분을 짐작한 안젤리카는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야가 웃긴 소리를 한 거 뿐이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치는 안젤리카였다.
그렇게 자그마한 헤프닝이 지나가고, 맑은 땡볕에서 한참 물놀이를 즐기던 우리는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칼라 병사장의 부름을 받고 어기적거리며 자리에 모였다.
뻗어 있던 라만 일등병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끄러미 무언의 시선을 보냈는데, 얼굴에 체인메일을 덮었는지 모른 채 하며 먹을 것에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실컷 놀았더니 배고프지?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먹어라."
"차린 게 없다뇨."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우리는 황당함 반, 황홀함 반의 반응을 보이며 칼라 병사장이 펼쳐놓은 점심거리에 탄성을 질렀다.
발골한 짬멧돼지의 고기는 큼직하면서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꼬치에 꿰어놨는데, 바닥에 깔아놓은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노릇노릇하게 굽혀져 가고 있었다.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소초에서 부식으로 챙겨온 갖가지 음식들도 나무접시 위에 담겨 우르르 깔려 있었으니, 당최 뭐부터 먹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만찬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아아..."
소초에서 가장 날렵하다는 평가와 함께 최고의 대식가라는 평가가 함께 하는 샨티 상등병이 입가에 입을 주륵 주륵 흘리며 황홀한 눈빛을 보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던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메이아 상등병이 머리에 손을 얹으며 진정시켰다.
"누구 뺏어가는 사람 없으니깐,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어 꼬맹아. 이등병 때처럼 무식하게 입에 쑤셔박다가 다 토해내지 말고."
"그, 그 얘기는 제발 꺼내주지 말아주세요!"
대번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샨티 상등병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우리가 주변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는 웃음을 멈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뜨거운 모닥불 아래로 둥글게 둘러 앉은 분대원들이 식욕이 당겼는지 한손에 그릇을 들고 열심히 식사를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밤에 이렇게 불을 피우며 안젤리카만을 옆에 두고 오붓이 있었더라면 정말 낭만적이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과욕이지만. 나중에 전역하면 그런 자리를 한번 마련해 봐야겠다.
"아르펜, 뭐해? 어서 안먹고."
"네. 잘 먹겠습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적당한 크기로 썰어진 구운 고기의 튀어 나온 뼈를 손잡이 삼아 단숨에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골되어진 멧돼지고기는, 씹는 순간 누린내 하나 없이 적당한 소금간과 육즙의 하모니가 펼쳐지며 내 혀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와. 너무 맛있어 말이 안나오네요. 분대장님 원래 요리사셨습니까?"
"어릴 적부터 아버지 따라 사냥을 많이 갔을 뿐이야. 입맛이 까다로워서 요리하는 건 항상 내 몫이었지."
"그랬었군요. 정말 감사히 먹겠습니다."
한 조각을 금세 없애버린 나는 또 다시 앞에 질서정연(?)하게 사열되어 있는 고기 조각에 손을 가져갔다.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귀족 하임달 가문 사람들과 한 만찬이 가장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그땐 워낙에 긴장해서 식도에 뭐가 넘어가는지도 인지 못할 정도였지.
식탐이 있는 편도 아니었건만 혀는 다음 고기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르펜. 니 좀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이 자식 이제 보니 샨티 맞먹는 대식가였네."
옆에 앉은 안젤리카의 걱정과 라이오 상등병의 웃음 어린 한마디가 들려왔다. 4개 째 구운 고기를 말 없이 집어먹는 데 집중하던 나는 다 씹어삼키고 나서야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입대하고나서 제일 행복합니다."
"푸하하. 그러냐? 하긴 나도 그렇긴 해. 이 분위기 자체가 말이지."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는 라이오 상등병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다섯번째 구운 고기를 입에 문 나는 내가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거 진심이가?"
안젤리카가 웃는 낯으로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뿔싸.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살짝 화난 어조다. 슬며시 고기를 입에서 뗀 내가 방금 한 말을 정정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네요."
"맞재? 어서 먹어라. 잘 묵네."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살짝 꼬집어 주는 안젤리카였다. 아야야. 살갗의 따가움을 느끼고나서야 내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많던 짬멧돼지의 고기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천천히 고기를 먹으며 사주경계를 서던 칼라 병사장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나. 남으면 훈제로 만드려고 했더니만. 그 많은 양을 다 쓸어버렸냐?"
"여기 두 대식가들의 공이 크죠."
프레카 상등병이 말하는 둘은 나와 샨티 상등병이었다. 다른 분대원들이 다 부른 배를 잡고 자리에서 나온 것과 달리, 나와 샨티 상등병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구운 고기를 씹어먹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지나가던 이들이 린델로프 출신 푸드 파이터들이 경합을 벌이는 걸로 오해했을 것이다.
팍.
마지막 하나 남은 고기를 가져가려던 나와 샨티 상등병의 팔이 허공에서 동시에 부딪혔다. 순간 우리 둘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는데, 그것도 잠시. 금세 당황해 구운 고기를 향해 양손바닥을 깔며 서로에게 권했다.
"샨티 상등병님 드시지요."
"아, 아냐! 아르펜 네가 먹어야지."
"원래 마지막 하나는 고참 몫 아닙니까?"
"뭐래? 원래 막내가 먹는 거지."
"풉."
서로 치열하게 먹다 마지막에 꼬리를 내리며 권하는 모습은 참 콩트에 가까웠다. 지켜보던 다른 분대원들이 폭소를 하였다.
결국 갑론을박(?)이 벌어지게 된 그 마지막 남은 하나는 안젤리카가 직접 와서, 반조각을 내어준 덕분에 사이좋게 나눠 먹긴 했다.
"하하... 참 재밌는 녀석들이라니깐. 맛있게들 먹었냐?"
칼라 병사장이 웃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래. 마지막이 즐거웠으니 다행이다. 오늘은 이 견장을 벗는 날이니까. 프레카."
"상등병 프레카."
아까 전까지만해도 깔깔거리며 웃던 프레카 상등병은, 사뭇 진지한 모습을 보이며 관등성명과 함께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무기를 갈무리한 칼라 병사장이 어깨의 견장을 탈착해 자신의 앞에 마주 선 프레카 상등병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부착해 주었다.
분대원들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함께 보고 있던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견장이 없는 칼라 병사장과, 푸른 견장이 생긴 프레카 상등병.
뭐랄까, 세상이 바뀌어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 작가의말
다음 편이 되어서야 1부 1막이 완결 될 것 같네요.
n6021_donguk312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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