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혹한의 계절[4]
소초의 건물 옆켠에는 나무판자로 만든, 두 명이 겨우 앉을 정도 크기의 작은 집이 있다.
구두방이라고 불리는 그 집은 원래 휴가 가는 선후임병의 군화를 닦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것 보다는 다른 용도로도 많이 쓰인다.
"너네 날씨가 추우니까, 개념도 다 얼어붙은 거냐?"
이 추운 날에 일등병이 이등병들을 집합시켜 훈계하는 것도 또 다른 용도였다.
까마득한 고참들 앞에서 목소리를 바락 바락 높일 수는 없으니까.
나, 라만 이등병, 세레나 일등병, 안젤리카 일등병까지. 베일 일등병 아래의 분대원들이 다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아니다 싶은 상황이 벌어지면 이렇듯 베일 일등병의 이름 아래 전부 모이곤 했으니까.
신병 때에는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초 생활을 하다보니 결국 이것도 베일 일등병이 부여받은 고유의 권한이었다.
분대장인 칼라 병사장 또한 즐거운 병영생활을 추구하면서도 그에게 칼 자루는 확실하게 쥐어 주었으니깐, 그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춥냐? 난 안 추워. 오늘 일 때문에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오고 있으니깐."
...단지 이 추운 날씨에 할 말 빨리 끝내고 들어갔으며 좋겠다.
그 앞에 서 있는 우리 네 명은 추위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에도 부동자세를 한 채 칼날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베일 일등병은 정말 본인이 안 말대로 열이 뻗칠대로 뻗쳤는지 추운 기색 하나 비추지 않고 화를 토해내고 있었다.
"라만 뭐하냐. 고개 들어라.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냐?"
고개를 점차 떨구던 라만 이등병이 베일 일등병의 호통에 다급히 다시 들었다. 파리한 안색은 추워서 그런건지, 죄책감 때문에 그런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세레나 넌 뭐하길래 애새끼 관리를 이 따위로 했냐? 바로 아래 후임 아냐?"
"죄송합니다..."
분대에서 제일 새가슴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레나 일등병의 고개도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라만 이등병 한명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낀 두 후임병 마저도 그 잘못에 대한 관리부실의 죄로 질책을 받는다.
내림갈굼의 무서움이었다.
"안젤리카, 너는 후임 애들 오냐오냐 해줄 줄만 알지..."
이번엔 안젤리카 일등병의 차례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 한 베일 일등병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하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곤 이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모양이냐?"
함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젤리카 일등병에게 시선을 옮겼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깊숙히 자각하고 있어서였을까?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
아, 맞구나.
얼어 붙은 안젤리카 일등병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부들부들 떨며 베일 일등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내 시선이 베일 일등병을 향했다.
그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임 관계 제대로 해라. 지금 분대장님 정말 곤란하시니까."
"...알겠습니다."
베일 일등병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고, 안젤리카 일등병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율동 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고참들을 번갈아 곁눈질했다.
날씨가 추워서였을까. 라만 이등병과 세레나 일등병은 이런 감정의 파도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고, 베일 일등병은 싸늘한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안젤리카 일등병은 흐려진 동공으로 저 멀리 떨어지는 눈보라만 하염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야, 베일!"
누군가의 외침이 이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고개를 돌리니 샨티 일등병이 뛰어 오고 있었다. 생활복에 근무에 입는 털옷을 뒤집어 쓴 채로.
"밖에 날씨가 추우니까 얼른 들어오라셔. 적당히 끝내고 들어...젤리야?"
베일 일등병에게 말을 건네며 후임들을 들여다보던 샨티 일등병의 목소리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친한 사이여서였을까? 나처럼 안젤리카 일등병에게서 감정의 기류를 느낀 모양이다.
말을 중간에 멈춘 채 안젤리카 일등병을 한참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그녀가 이내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그저 훈계 좀 했습니다. 이상합니까?"
되려 반문하는 베일 일등병이었다. 어조가 기이했다. 이성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샨티 일등병님도 애들이랑 좀 적당히 놀아주십쇼. 군기가 쳐 빠지 있으니가 적온석이나 철책선 밖으로 잡아 던지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너 임마 아무리 그런 일이 있다고 쳐도 선 너무 넘는 거 아냐?"
언성이 높아졌다. 데리러 왔다 되려 싸움이 벌어지려는 모양새였다.
나를 비롯한 세 후임들은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평소 사이가 좋던 두 일등병들이 이런 상황까지 가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럼 샨티 일등병님이 애들 관리 하시던지요."
"하아. 말하는 뽄새 봐라. 벌써 견장 단 말투네?"
"아 진짜... 관둡시다. 야. 어여 들어들 가."
마치 훼방꾼이 나타나서 어쩔 수 없이 보내는 투다. 샨티 일등병은 점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앞장서서 소초를 향하는 베일 일등병의 뒤를 향했다.
라만 이등병과 세레나 일등병도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뒤를 쫓았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조용히 서 있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구두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니..."
턱이 얼어 입에서 말조차 나오지 못했다. 소초로 들어가는 고참들과, 구두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갈등하다, 이내 구두방 앞을 향했다.
그리고 닫혀 있는 문 앞에서 멈칫했다. 고작 사람 두명 겨우 들어가는 공간에 노크를 해야할지 그냥 열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다, 주먹을 말아쥐고 문을 두드렸다.
"안젤리카 일등병님. 접니다."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추운데 그냥 생활관에 들어가."
그러는 그 쪽은 왜 추운데 그런데 들어가 있냐구요... 사그러가는 듯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안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내 언성이 높아졌다.
"까마득한 고참이 안 들어가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들어갑니까?"
말 떨어지자마자 후다닥 들어간 두 고참들을 엿먹이는 소리였지만, 듣는 사람은 그녀 하나 뿐이었다.
"...들어온나."
그 말과 함께 직접 문을 열어주는 안젤리카 일등병이었다. 그녀을 얼굴을 본 내 마음은 더 착잡해졌다.
사슴처럼 큼지막한 눈망울이 촉촉해져 있었다. 한손으로 코 아래를 가리고 있었는데, 내가 문 앞에서 서성이는 동안 소리 없이 펑펑 울고 있었나보다.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고선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내밀었다.
"하, 한번도 안 쓴 거에요."
그런 말은 왜 했을까. 맞는 말이긴 했지만 말이다. 입대 전 백작부인, 아니 어머니가 선물해주신 손수건이다. 새겨놓은 꽃자수가 너무 정성스러워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말 없이 손수건을 받아든 안젤리카 일등병이 눈물을 닦고 코를 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도 안쓰고 품고 다니던 것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전혀.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그래. 한겨울에 서러워서 그런가. 좀 감정이 북받쳤는갑다."
그런 게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말했다.
"힘든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해결해 드릴 순 없지만, 최대한 들어라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뭐라도 지껄여야 될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오랜만에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이었는데 머저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 싫어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위계질서상 일개 이등병이 반년 이상 차이 나는 고참에게 이딴 소릴 하는 게 말이 안되니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떻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그녀였다.
"베일 그 개새끼 죽통을 갈길 순 없지만."
이건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마음 속에서만 되뇌이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아르펜. 그런 말은 하면 안되지. 니 미쳤나?"
감정을 갈무리한 안젤리카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잠깐. 이건 보통 갈굴 때의 억양인데?
햇병아리 이등병이 고참에게 다른 고참에 대한 험담이나 욕을 하는 건 무개념적인 행동이었다.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해야할까?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어른 앞에서 다른 어른 욕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한동안 안젤리카 일등병의 잔소리가 계속 되었다. 듣던 나는 생뚱맞으면서도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그녀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무례한 말을 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자기가 이번 상황의 최대피해자인데?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베일 일등병에게 그런 소릴 들었어도 이등병이 그런 말 하면 안된다. 마."
한참 설교를 늘어놓던 안젤리카 일등병이 불쑥 이 한 마디를 했다.
"니 내 좋아하나?"
어감 상으론 물어보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뒤이어 말하기 위해 꺼내든 말이었다.
"네."
"...어?"
나도 모르게 욱해서 내뱉은 한음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말을 던진 나조차도 순간 당황했고, 말을 꺼내려던 안젤리카 일등병도 말문이 잘린 채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