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격전. 그 직후.[1]
언더 프로즌의 비밀요원, 파이로는 이곳에 출격한 요원들 중 가장 먼저 예티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패밀리어인 매의 시야를 공유해서였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쉴틈없이 계단을 타며 2경5 초소의 상황을 확인하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왜 그러나, 파이로?"
대장의 자격으로 파견된 창술의 중년인, 크로서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무릎까지 달하는 계단을 올라오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병사 하나가 예티를 상대로 일대일로 혼자 싸우고 있는데요?"
"대단한 용기로군. 푸른장미 훈장감이야."
평소에 칭찬에 인색한 그의 입에서 호의적인 대답이 나왔다. 푸른장미 훈장은 아르고니아 군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병사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그 말에는 금방 죽을 거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짐작한 파이로가 고개를 저었다.
"벌써 3분이 넘게 싸우고 있는데요? 놈의 공격을 막으면서 몸에 생체기도 내고 있군요."
"뭐라고?"
반쯤 잠겨 있던 크로서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예전에 예티와 교전한 적이 있었다.
천하의 오러 유저라면 모를까, 일개 경계병이 혼자서 예티와 3분이 넘도록 싸운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크로서스의 발이 더욱 더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2경5 초소에 도착해 막 전경을 확인할 무렵이었다.
푸욱!
크로서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파이로가 말한 그 병사는 예티의 손아귀에 잡혀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엉덩이 뒤편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푸른빛의 오러가 솟아져 나오더니, 끝에 감아쥔 화살을 쏜살같이 날리며 예티의 눈알을 찌른 것이다.
키이이아아아아아!
온 산등덩이를 뒤덮는,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을 터져 나왔다. 화살이 눈에 꽂힌 예티는 쥐고 있던 병사도 놓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표정 풍부한 얼굴은 흡사 유령을 본 어린아이같았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크라서스는 입을 떡 벌린 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오러 테일? 맙소사."
그는 그 병사의 뒤에서 나온 실같은 오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수없이 들어왔다.
오러 테일. 그것은 아르고니아 역사상 최초의 오러 유저이자 무예의 시조. 최고의 전사였던 전설 카이안 콴타의 수많은 절기 중 하나였다.
키에엑 키에에에!
예티는 화살이 꽂힌 눈을 감싸쥔 채 한참을 난리치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본 크로서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살은 분명 놈의 동공 정중앙에 박혔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병사에게로 갔다. 말도 안되는 신위를 떨친 병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예티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떨어진 자신의 무구들을 주워나갔다.
부들부들 떠는 몸으로 부서진 방패을 앞으로 들이밀고, 그 위로 피가 얼어붙은 제식 쇼트소드을 얹인 채 예티를 향해 내뻗고 있었다. 일견 보기엔 볼품 없어 보였지만 언더프로즌의 어느 누구도 예티를 상대로 혼자서 저렇게 싸울 수 없다.
"최전방에서 보물을 찾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참, 이렇게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가자, 파이로."
"네."
일개 병사의 활약에 놀란 나머지 너무 시간을 뺏겨버렸다. 크로서스와 파이로는 각자의 무기를 갈무리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륵!
간신히 고통이 멎은 듯 자리에서 일어선 예티가 병사에게 한 차례 포효했다. 병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예티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언더프로즌 요원들은 놈이 도망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쿵쿵!
"아니, 뭐야!?"
이후 예티가 벌인 뜻밖의 행동에 두 남자는 일순간 당황했다. 몸을 돌리더니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미친듯이 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전까지의 기록에 도망친 기록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을 잡아먹거나 포획해 자신의 모든 목적을 완수한 뒤 돌아간 기록이었다. 지금 놈은 이제까지 있었던 습격의 역사상 유래없이 승자가 아닌 패자의 자격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쪼, 쫓아야 돼!"
자신의 발밑에 있는 경계로를 밟으며 빠르게 뛰어내려가는 예티를 본 크로서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오늘에야말로 저 악명 높은 설인을 처치할 절호의 기회였다.
알려진 바로는 예티의 수명은 200여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전방에서 50여년 동안 벌어진 28건의 예티 습격에서 목격된 놈의 특징은 대부분 일치했다. 동일한 놈의 소행이라는 소리다.
지금 놓친다면 훗날 또 다시 이런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펑펑!
예티를 향해 뻗은 파이로의 완드에서 시동어도 없이 튀어 나간 불꽃의 화살 두발이 예티에게 빠르게 작렬했다. 하얀 털로 뒤덮인 등판에 두개의 시꺼먼 그을음이 생겼다.
아르고니아에서 구상중인 마궁사 프로젝트의 프로토 타입, 일명 '매지컬 슈터'라 불리는 파이로의 불꽃 화살은 빠르고 매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티는 잠시 휘청거릴 뿐, 지축을 뒤흔들며 도망쳤다. 비탈진 내리막이라 속도는 더더욱 빨랐다. 크로서스와 파이로, 두 남자는 추격에 속도를 더더욱 붙였다.
이제 곧 뒤따라 오는 나머지 요원들이 놈과 조우할 것이다.
"할로이! 밀리아!"
예티의 뒤를 빠르게 따라붙던 크로서스가 너머에 있는 인영들을 확인하고선 소리쳤다. 계단을 박차며 올라가던 두 요원들은 금세 각자의 무기를 거머쥐고 미친듯이 내려오는 예티를 향해 공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의 뒤에는 칼라가 쇠뇌를 겨눈 채 자세를 잡고 있었다.
"어이 병사장. 심경은 알겠는데 몸 사리라구."
등 뒤의 칼라에게 특유의 껄렁껄렁한 말투로 한 마디하는 할로이. 예티를 목전에 둔 앞에서도 그는 태연했다.
"하압!"
먼저 움직인 것은 밀리아라 불린 네이비색 단발의 여검사였다. 오른손엔 40cm 길이의 쿠크리, 왼손엔 시미터를 쥔 특이한 무장의 그녀는 예티의 왼발이 지면에 박히며 하중이 실리는 때에 맞춰 쏜살같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촥! 촤아아악!
그 짧은 순간 쿠크리로 한 차례 사선으로 베어낸 뒤, 몸을 반바퀴 돌며 시미터로 벤 부위를 똑같이 베어버리는 그녀의 검술은 기예에 가까웠다. 예티의 종아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할로이의 보라색 클럽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지면에서 살짝 떠 있는 예티의 정강이에서 굉음이 났다.
칼라의 쇠뇌도 볼트를 뿜었다. 얼굴을 겨냥해 날린 볼트가 예티의 오른쪽 광대뼈에 박혔다.
캬아아아!
하체를 공격당해 몸의 신체균형을 잃은 예티가 괴성과 함께 덤블링을 하며 엎어져 경계로의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올라왔던 길로 굴러떨어지는 예티를 보는 할로이와 밀리아의 얼굴에 알수 없는 희열이 감돌았다.
최초로 예티를 잡는다. 드디어 아르고니아 역사에 길이 남는 사냥이 성공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이내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어 버렸다.
크랴랴략!
쥐어짜듯 뿜어지는 괴성이었다. 한참을 구르던 예티가 경계로 옆의 바위를 발로 차더니, 철책선 밖으로 뛰어 오른 것이다. 거대한 예티의 체구가 철책선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오르며 허공을 날았다.
"저런 미친놈!"
할로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여기는 산중턱이다. 철책선을 뛰어넘은 놈에겐 끝없는 비탈진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나마 놈이 살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기도 하다. 경계로 내리막 끝의 평지에는 이미 고블린과 트롤들을 정리한 1소초 병력과 각 소초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도착해 즐비하게 깔려 있는 상태였으니까.
"영리한 놈으로 정정해야 맞겠지. 파이로!"
"네, 단장님."
"매로 놈의 위치를 파악한다. 모두 철책선을 넘어 끝까지 놈을 추격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크로서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싸우려는 예티를 잡는 것보다 마음 먹고 도망치는 예티를 잡는 것이 몇배는 어려웠으니까. 그는 문득 아까 쇠뇌를 쏘았던 견장의 병사가 생각나, 뒤로 고래를 돌렸다. 어느새 그는 계단을 타며 저만치 올라가 있었다.
예티와 일대일 혈전을 벌었던 병사의 안위가 생각난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아까 그 괴물같은 병사 녀석을 살피러 가겠다. 먼저 출발하도록."
"네!"
말을 마친 세 요원들은 철책선을 가볍게 뛰어 넘으며 산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크로서스는, 시선을 돌려 이제는 무너진 2경5 초소를 향해 가볍지만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주말에 틈틈이 쓴 비축분을 풀며 평일에 최대한 많이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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