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0번 척살병[4]
다음 날, 내 하루 일과는 점호가 끝나는 동시에 바쁘게 돌아간다.
"고생들 하십시오."
오전주간의 근무를 위해 출발하는 분대원들에게 인사를 보낸 나는 생활관으로 돌아가 완전무장을 준비했다.
침상 위에 올라가 내 관물함 옆 구석 한켠으로 시선을 옮겼다. 1인분의 무장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척살병이 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개인 무기함이다. 모든 무기를 한곳에 모아 놓는 다른 분대원들과는 대비되었다.
상체만 덮는 메일을 입고 그 위에 아르고니아군의 하얀 삼산 문장이 들어간 천옷을 뒤집어썼다. 왼쪽만 가리는 견갑을 찼다. 무릎을 방호하는 니캅(kneecop)을 채웠다. 그 뒤엔 질긴 트롤 가죽 벨트를 허리에 찼다.
벨트엔 두 자루의 단검과 쇼트 소드를 찼다. 투구를 쓴 뒤엔 동일한 문장이 들어간 직경 50cm의 라운드 실드를 차는 것으로 무장이 끝났다.
"최전방에서 이런 무장이라니."
항상 느끼는 바였지만, 아르고니아의 최전방에서 이 정도로 과한 무장을 하는 것은 나뿐일 것이다. 블리저드 가드는 빠른 기동력과 사격을 중시하니깐. 뒤집어 말하면 그 아무것도 없던 무장으로 예티를 1:1로 싸웠던 내 능력을 아르고니아 군이나 언더 프로즌에서 높게 쳐주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금속이 풍부한 나라라도 일개 병사에게 흑철로 도배된 무기를 지급할 리 없었을 테니깐.
철그럭 철그럭
소초장에게 가볍게 보고한 나는 쇳소리를 내며 막사 밖을 나섰다.
이제 이렇게 완성된 무장으로 뭘 하냐고?
뭐하긴, 구보를 뛴다.
"같이 뛰어 줄까?"
비번인 샨티 상등병이 깡총깡총 뛰며 따라나왔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같이 가주셔야죠."
"헤헤. 그래."
그녀는 가벼운 군복 안에 어제 선물한 육포로 무장(?)한 상태였다. 쇳덩이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는 누구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라 쓴웃음이 나왔지만 어쩌랴. 그녀는 손님인 것을.
어차피 비번으로 혼자 있어봐야 할 것도 없을 테고, 여차하면 주간분대와 같이 작업이나 해야 할 처지였다. 그녀로선 이인일조 행동이라는 명분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최상이었다.
계단을 밟으며 소초에서 보급로로 내려간 우리는 빠르게 걸으며 천천히 속도를 올리다, 이내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척살병이 되면서부터 시작한 아침구보는 사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예티를 상대하기 위해선 몸과 마음 모두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목적지는 중대본부였다. 걸어서 한시간 거리 즈음 되는 그곳을 찍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후우, 후우."
거의 다 도착할 때 쯤 숨이 차츰 가빠져왔다. 맨몸이라면 모를까, 확실히 무장상태로 뛰니 땀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점점 느려진다 0번 척살병? 빨리 뛰지 못합니까?"
샨티 상등병은 옆에서 산보를 하며 훈련소 조교 마냥 훈수를 두고 있었다. 챙겨온 육포를 우물거리면서 말이다. 심지어는 옆에서 뒷걸음질까지 치면서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약이 오른 내가 느려진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하아... 항상 좋은 자극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웃는,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검집에 손을 턱, 얹었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뜨끔했는지, 뜬금없는 칭찬치레까지 했다.
"그나저나 네가 사온 육포 진짜 맛있다. 항상 고마워 아르펜."
"별말씀을요."
"근데 초콜렛 나도 사주지 그랬냐?"
"육포가 그렇게 먹고싶다면서요. 먹고싶음 말하시지."
우리는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다시 소초로 복귀했다. 내리막이라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편했다.
잠시 휴식을 위하며 다음 일과를 기다렸다. 하루 중 가장 길면서 중요한 시간인, 대련의 시간이었다.
"단결!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에 보네 아르펜."
율라 중사였다. 완전무장한 차림의 그녀는 눈에 띄게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언더 프로즌의 요원들과 치렀던 다른 대련보다 더 기다려왔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나에게 스승이자, 은인이나 다름 없는 분이었으니까.
예티와의 전투 이후로도 율라 중사와는 몇번 만났었다. 사단본부에서 입원해 있을 때에도 한번 병문안을 왔었고 그 뒤로도 한두번 정도 만났었다.
"더 말이 필요하겠냐, 한판 붙어 봐야지."
물론 대련을 벌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벼운 경장에 검이 박힌 방패, 시스에서 짧은 검을 꺼내는 율라 중사를 보며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자세를 잡았다.
무장 자체는 내가 월등했지만 나는 아직까진 반쪽 짜리 오러 유저였고, 율라 중사는 완숙한 오러 유저였다. 물론 이번 대련에서 오러는 쓰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창! 창!
시작하자마자 뛰어든 내가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방패를 들어 막아낸 율라 중사가 반격을 했고, 나 또한 방패를 몸에 단단히 붙이며 막아내었다.
쇼트 소드와 방패. 똑같은 무장을 한 우리의 대련은 싸우는 스타일 마저 닮아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며 휘두르면서도 왼팔에 든 방패는 본능 마냥 어김없이 서로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퍽!
"윽."
하지만 방어라면 모를까, 공격의 날카로움은 율라 중사가 우위였다. 한참 합을 겨루던 중 빈틈을 타 율라 중사가 발끝으로 내 정강이를 걷어 찼다. 금세 고통에 자세가 무너진 나에게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검격이 무수히 날아 들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막기에 급급하던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봐주고 있었던 거구나.
하지만 나도 여기서 무너지기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거북이처럼 움츠린 채 방패를 붙이며 율라 중사의 공세를 막아내던 내 두 눈이 조용히 그녀를 관찰했다. 그러다, 무게 중심이 약할 때를 노려 단숨에 뛰어 들어 내 방패로 그녀의 방패를 후려쳤다.
까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율라 중사의 방패가 저만치 날아갔다. 내 팔도 저려왔지만 꾹 참으며 전신의 힘으로 밀어붙었다. 뒤로 몰리던 율라 중사와 검을 교차하며 맞대던 내가 사선으로 비틀며, 그 틈을 타 박치기를 먹였다.
"큭."
투구와 투구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성을 낸 율라 중사가 바닥에 몸을 뉘었다. 나는 검과 방패까지 버려가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율라 중사의 몸 위에 올라타면서, 마지막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단검을 뽑아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율라 중사.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됬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미처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율라 중사 위에 올라탄 모양새는 보기에 따라서 지나치게 외설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뜬금없는 고민이 결국 패착이 되버렸다.
퍼억.
"허억...!"
단 한방에 희비가 갈렸다. 율라 중사의 니킥이 내 사타구니를 치는 순간 사고가 마비되었다. 나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고통에 부르르 떨었다.
"그러게 누가 멈칫하랬냐? 이길 걸 졌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율라 중사가 투구를 벗으며 약올리 듯, 말했다. 나는 아직도 고통이 가시지 않은 채 내 소중한 곳(?)을 조용히 부여잡으며 울부짖듯 말했다.
"...이거 반칙 아닙니까?"
"전장에서 반칙이 어딨냐, 이긴 놈이 장땡이지."
"아무튼 잘 배웠습니다."
"잘 배웠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많이 아프냐?"
그제서야 율라 중사가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아 10초 즈음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내가 툴툴거렸다.
"안 달려 있는 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평생 이해 못할 테니 상관은 없겠네. 박치기 맞은 거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 임마."
이마에 난 혹을 가리키며 내뱉은 율라 중사의 그 말에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거랑 그게 어떻게 똑같냐구요...
"목 마르실텐데 드시지요."
그때였다. 취사병 신병이 우리에게 다가와 물이 든 나무컵 두개를 내밀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율라 중사는 그 컵을 받아 든 채 근처의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 내가 갓 스무살 먹은 일등병에게 대련으로 질뻔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운이 좋았죠 뭐."
"단순히 운만 좋았다면 예티랑 일대일로 붙어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지. 넌 타고났어."
조금은 가벼워 보이던 율라 중사의 음성이 어느새 진지해졌다. 그녀는 나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블리저드 가드라고 치켜세우지만, 결국 여기는 일개 경계부대에 불과해. 이런 곳에 있기엔 네 재능이 아깝다."
"그래서 척살병이라는 없던 보직까지 받고 이렇게 대련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들어보니 언더 프로즌의 제안을 거절한 이후에 나온 차선책이라면서? 이유가 뭐야?"
율라 중사는 내 생각보다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크로서스가 그녀를 한번 언급했었지. 나는 안젤리카와의 관계를 제외하고, 대략적인 이유를 말했다. 이유를 들은 율라 중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후임관계도 결국 여기 있는 3년에 한정되는 일이야. 반면 언더 프로즌은 왕하 특수부대지. 더군다나 너 귀족이라면서? 상황에 따라선 정계의 실세로 올라갈 수도 있는 기회야."
"정계라, 참 생소한 단어네요. 일단은 이 곳을 노리고 있는 예티를 반드시 잡는 것이 제 최선입니다."
"생긴 거 만큼 고집이 쎄네. 그래. 네 생각은 잘 알겠다."
"그런데... 율라 중사님도 언더 프로즌 소속이셨습니까?"
내가 살짝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보았다. 그 말에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군의 부사관으로 왔긴 하지. 이유는 묻지 마. 복잡하니깐."
"아 네..."
대화가 끝난 직후 잠시 침묵이 머물렀다. 율라 중사는 손으로 턱을 짚은 채 나만 유심히 바라보았다. 꾸미진 않았지만 상당한 미녀인데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었기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르펜."
"네."
"너, 네가 이지스 교의 일원인 거는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카이안 콴타를 모시는 종교 아닙니까. 이래뵈도 전 지조 있는 놈이랍니다."
"그럼 다행이야.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말도록 해."
"알겠습니다."
조용히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며 웃는 율라 중사였다. 털털하면서도 뇌쇄적인 그 모습에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안도의 표정. 나는 아직까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