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혹한의 계절[6]
***
다음 날.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오전주간의 한주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토요일 새벽. 나는 기대를 한껏 품은 채 무장검사를 끝내고 소초를 나섰다.
오늘까지만 근무하면 내일 생활관에서 모포를 덮고 꿀맛같은 단잠만 푹 잘 수 있으니깐.
"자, 오늘 하루만 하면 푹 쉬니까 열심히 버티자고."
칼라 병사장의 격려 어린 말은 사실 희망고문에 가까웠다. 내일 점심시간 이후에 또 오후주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뭐, 한숨 푹 잘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사실이긴 하다.
"가자."
차가운 새벽공기를 맡으며, 베일이 앞장섰다. 오늘의 내 사수였다.
기분 탓일까, 분위기는 새벽의 밤공기 만큼이나 냉랭했다. 으레 떠들곤 했던 샨티 일등병과의 만담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걸음은 바닥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움직여야하는 시기 치곤 빨랐다. 발걸음에 감정이 서려 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고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촉이 발달된 것 같기도 하다.
휘이이잉.
혹은 칼날 같이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날씨는 어제 이 시간보다 추웠다.
평지를 지나온 우리는 어느새 도달한 오르막 계단 앞에서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서리낀 안개는 시야조차 가리고 있었다.
끔직한 추위와 하체의 고통을 이겨내기를 수십차례, 마침내 초소에 도착한 우리는 재빨리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수고하십니다."
"여어, 잠만보 아니신가. 아니, 코흘리개놈 사수라고 해야 하나?"
특유의 불량스러운 목소리. 나는 듣는 순간 라키아 병사장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베일로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라만 일등병의 일기장에 유일하게 잔다고 언급되었고, 또 적온석을 잃어버렸을 때 하필 그의 사수였다.
적온석 때문에 칼라 병사장과 한바탕 했던 그가 시비를 걸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인수인계 할 것 있으십니까?"
베일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자세히 들으면 팔팔 끓기 직전의 물소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씨에 인수인계는 무슨. 돌이나 잘 간수해라. 또 심심하다고 쳐 집어던지지 말고."
마치 베일이 던졌다는 투로 말하는 라키아 병사장의 말투에는 공격성이 다분했다.
대외적으론 라만 일등병이 잃어버린 거지만 내막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의 입장에선 미치고 자빠질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주의하겠습니다."
알겠다고 하면 인정하는 그림이여서일까, 애매한 대답이 나왔다. 라키아 병사장은 자신의 도발을 무난히 넘기는 그를 무심히 보다가, 이내 바깥을 향해 가래침을 뱉으며 초소를 떠났다.
라키아 병사장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던 베일은 그제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쭈그려 앉았다.
"...개 같은 새끼들 진짜."
목소리 안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응어리 져 있었다. 누구까지를 포함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특정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그는 폭발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크르르'거리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베일 일등병님?"
"안 괜찮아. 보면 알다시피."
자신의 상태를 쿨하게 인정하는 그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 달리 말은 하지 않았고, 베일 또한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는 듯 침묵했다.
그렇게 초소 안에서 시간이 흘렀다.
"후. 춥다. 젠장. 괜히 빨리 올라왔나. 땀이 식으니까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베일은 손을 비비고 양팔로 몸을 휘감는 등 별의 별 짓을 다 하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는 사실상 혹한의 계절의 절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빨리 올라온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몸에서 흘러나온 땀이 식어버리는 역효과가 난 것이다.
물론 좋은 체질(?)을 가진 나는 그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지만.
"넌 춥지도 않냐."
"네. 체질이 체질이다 보니..."
"그거 하나는 부럽네. 참. 경계를 안 서면 뭐하냐,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에서 추위에 벌벌 떨어야만 한다니."
말을 마치며 한숨을 쉬는 그의 목소리엔 회한과 한탄이 서려 있었다. '여긴 어디고 난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추위 걱정 없이 따뜻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 알려드릴까요?"
"뭐? 그런 게 있다고?"
반신반의하는 베일의 목소리.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빨리 말해 봐."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의 심리상태를 감안해서 난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말하고선 덧붙였다.
"이 방법은 제가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는 방법이니깐요."
"도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부탁 들어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려운 건 아닙니다."
"...뭐, 그래. 들어줄게."
밑져야 본전이겠지라는 듯한 말투였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털옷의 앞을 잠그고 있던 단추를 풀었다.
이 트롤 가죽 털옷은 단추가 이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안쪽을 잠궈도 제법 여유공간이 있을 정도로 큰 편이었다. 그런데 바깥쪽을 잠그면 안의 여유공간 무척 넓어진다. 한 사람의 상체를 억지로 끼워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두꺼운 털옷을 벗어야만 들어올 수 있다.
"털옷 상의를 벗어서 다리에 감아버리시죠."
"벗으라고? 그 털옷, 확실히 따뜻하냐?"
그나마 추위를 막고 있는 자신의 털옷을 벗으면 무지하게 춥기에, 조심스러운 베일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입어보니, 여기서 트롤 털옷만큼 끝내주는 옷은 없더군요."
"그러냐? 그래. 한번 해보자."
아랫입술을 깨물던 베일은 이내 털옷을 벗었다. 그리고 나는 내 트롤 털옷을 벗어 단추가 등쪽으로 오게 거꾸로 입었다. 그리곤 말했다.
"저랑 등을 맞대고 단추 잠구시면 아마 딱 맞을 겁니다."
"어라, 그러네?"
내 등뒤로 등을 붙이고선 단추를 잠군 베일이 뒤이어 자신의 털옷으로 다리를 칭칭 감았다. 털옷의 기장이 긴 덕분에 발끝까지 덮을 수 있었다.
"햐, 너 자식, 등 되게 뜨끈한데?"
"조만간 여기가 초소인지 불가마인지 헷갈리게 될 겁니다."
담담하게 말한 나는 순환의 호흡법을 연공하기 시작했다.
율라 중사에게서 배운 이 호흡법을 시간 날때마다 사용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오러 유저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이 호흡법은 추운 날에도 무척 효율적이었다.
내 몸 안의 모든 피와 기운들이 막힘없이 돌고 돌아서일까. 안그래도 높은 내 체온은 이 미친 날씨 앞에서도 정상치 이상을 웃돌았다. 그 체온은 베일과 함께 덮고 있는 트롤 털옷 안 전체에 퍼졌으니 등을 맞대고 있는 베일에게도 고스란히 퍼질 것이다.
"와아. 어째서 생활관보다 더 따뜻하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불가마가 될거라고."
"하하하. 오랜만에 추위를 잊었네. 고맙다."
요 며칠 내내 냉랭하기만 하던 베일의 목소리가 어느새 누그러졌다. 단순한 한 마디였을 뿐이지만, 나에겐 차갑게 식어있기만 하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천국이 따로 없네."
"그렇습니까."
의미없는 중얼거림에 의미없는 대답을 던졌다. 담담히 그의 어조를 듣던 나는 이제야 이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싶어, 입을 떼었다.
"이제야 좀 마음이 가라앉으셨습니까?"
"음, 마음이라니?"
"다른 분들과 계속 냉전중이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혹시 부탁이 화해하라는 거였냐?"
"네."
"안그래도 언제 말을 꺼낼까 생각중이었어. 아직도 화가 안 풀리긴 했지만 이 날씨에 이런 분위기로 계속 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
반쯤은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안심했다. 이제껏 봐온 그는 적어도 약속받은 일에 대해선 해결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사실상 일이등병 사이에선 칼라 병사장의 역할을 부여받은 그였기에 이 분위기를 해결하려면 그가 직접 화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응? 뭐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베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젤리카 일등병에겐 왜 그런 식으로 말씀 하셨습니까?"
"뭐?"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라고 말했습니까?"
-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계속 변명의 말씀을 드리게 되네요.
항상 술술 잘 적히면 참 좋을텐데,
글빨이 변비마냥 막혀서 안써지다가 또 술술 쓰이고 하네요.
아직까지 제가 많이 미숙한가 봅니다 ㅜㅜ
마음은 성실연재하고 싶은데 쉽게 되지 않네요.
그래도 이 글은 최소한 1부는 끝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최전방 소재란게 은근히 힘드네요 ㅎㅎ;
잡설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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