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혹한의 계절[3]
"오늘도 신세지네. 고마워 아르펜."
"신세랄 것 까지야... 대신 아프시면 안됩니다."
샨티 일등병과 대화를 주고 받던 나는 문득 여동생이 있었으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비롯한 분대원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도 기억이 났다.
하긴, 맞는 말이다. 고향을 등지고 온 이 엄동설한의 최전방 초소에서 같이 부대 끼는 선후임이 가족이 아니면 누가 가족일까?
"근데 너 정말 안 추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샨티 일등병의 한 마디였다. 그런 말을 할 법도 했다.
내 트롤 털옷과 바꿔입은 작은 털옷은 겨우 단추를 잠굴 정도였다. 거기다 적온석도 거의 만지지 않았으니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의 입장으로선 내가 신기한 동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안 춥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이야?"
그렇게 말하는 샨티 일등병의 몸이 어느새 부르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적안석의 온기가 슬슬 다 떨어져갈 즈음이었으니까. 더불어 근무시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간이기도 했다.
혹한의 계절에 접어들 무렵의 샨티 일등병은 이 시간에 제일 추위에 떨어 죽을 상을 짓곤 했다.
"아르펜. 부탁 하나만 하자."
"어떤 부탁입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말 없이 검지로 뺨을 긁고 있는 샨티 일등병이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안에 한번 들어가보자."
"네?"
"이, 이 추위에도 멀쩡한 네 체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궁금해서."
"아하..."
...생각하기에 따라선 야릇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순수하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궁금하시면 들어와 보시겠습니까?"
"그래."
고민도 하지 않고 흔쾌히 대답하는 샨티 일등병이었다. 그녀는 내가 입은 본인의 털옷에 잠겨 있던 단추를 풀더니, 그대로 내 품 속으로 들어와 팔을 뻗어 다시 단추를 잠궜다.
털옷 자체가 워낙 펑퍼짐하게 제작된데다, 단추가 이단으로 잠굴 수 있게 제작 되어 있어서 바깥쪽으로 잠궈놓으니 왜소한 샨티 일등병의 몸과 맞물려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몸이 밀착되자 샨티 일등병의 조금은 차가운 체온이 내 몸으로 그대로 전해져왔다.
내가 쓸데 없는 소릴 한 것일까. 괜시레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내가 오죽 추우면 이랬겠어."
"그런 생각 안 듭니다."
"뭐? 그 말 들으니 괜히 또 기분 나쁘네."
빈정 상한 듯 대답한 샨티 일등병이 손을 뻗어 내 팔을 꼬집었다.
아니, 그럼 어쩌라고요...
"아 근데 이러고 있으니 진짜 따뜻하긴 하네. 네 체온."
"그렇습니까?"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대꾸했다. 정말 목소리에서 편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한 상황이긴 하지만, 함께 지내며 정이 든 고참이 좋다고 하니 나도 기분은 좋다.
"따뜻하니 잠이 솔솔 오네. 시간 되면 좀 깨워."
"아니..."
심지어 잠이 올 정도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다급히 샨티 일등병을 깨우려 했다.
하지만 이내 관두었다. 이 시기에 초소에서 잠들면 영원히 깨지 못한다고 하긴 한다. 하지만 그건 결국 동사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따뜻해서 잠든 건데, 깨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나 참..."
나는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흘리다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는 샨티 일등병을 살살 토닥였다.
이러고 있으니 꼭 갓난애기를 재운 애기엄마 같구나.
혹여나 얼굴이 노출되어 있는 게 걱정되어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그녀가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시계를 바라보던 내가 샨티 일등병을 흔들며 말했다.
"시간 됬습니다."
"으응? 쓰으읍."
고개를 흔들며 입가의 침을 닦던 샨티 일등병은 놀라 자신의 뺨을 스스로 때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 얼마나 자고 있었냐?"
"음. 한 시간 정도요?"
"미쳤네, 미쳤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잠들 때에는 정말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나 보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일단은 살아 있잖아요. 꿀잠 잤으니 그걸로 된 거죠 뭐."
"뭐 그렇긴 하지. 아무튼 잘 잤어."
잠시 후 교대근무자가 도착했다. 어제처럼 수고하시란 한 마디와 함께 인수인계를 끝낸 우리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눈으로 빙판길이 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도 힘든 근무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밥 먹는 시간과 더불어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였다.
하지만 계단을 다 내려올 무렵 우리는 이변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쟤네 저기서 왜 저러고 있지?"
땅을 보며 계단을 내려가던 내가 샨티 일등병이 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먼 발치를 보았다.
내려막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인 그 곳에는 두 근무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베일, 라만. 너네 뭐하냐?"
처음에는 의아한 목소리였던 샨티 일등병이었지만, 가까워 질수록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라만 이등병은 입은 옷 전체가 눈범벅이 되어 있었고, 베일 일등병은 철책선을 장갑 낀 손으로 잡은 채 그 너머만 하염 없이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우리는 그 광경이 무엇을 뜻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너 혹시 철책선 너머로 뭐 떨어뜨렸냐?"
"네."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는 베일 일등병이었기만, 목소리 안에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샨티 일등병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혹시 무기 날렸냐?"
"아뇨. 적안석이요."
"맙소사."
샨티 일등병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기보단 다행인 사실이지만, 그건 그거 나름 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깐 말이다.
"라만. 빨리 눈 털고 일어나 새끼야."
"이, 이등병 라만입니다..."
"지랄 하지 말고 정신 차려. 하, 씨발 진짜, 멍청한 짓도 한두번이여야지!"
베일 일등병은 눈에 띄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샨티 일등병이 그런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복귀 해서 보고라고 해야지."
"알고 있습니다."
흥분해서였을까. 목소리에는 유난히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격이 유한 샨티 일등병 조차도 표정이 살짝 굳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던 내가 이내 일어나 옷에 묻은 눈을 털고 있던 라만 이등병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의 말로는, 교대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눈의 쿠션과 털옷 덕분인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넘어지는 와중에 쥐고 있던 적안석을 자기도 모르게 하늘로 던졌다고 한다.
철책선 너머로 저 멀리.
"어, 어디에... 떨어졌는 지도 모르겠어..."
문제는 멀리 던지기도 던졌거니와, 철책선 너머로 쌓인 눈은 평범한 성인 남성의 가슴께까지 쌓여 있기 때문에 바닥에 박혀 버린 적안석은 눈이 다 녹기 전까지는 찾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
애초에 철책선 밖은 중대장 이상 가는 간부의 허가가 없으면 군법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영역이었다.
결론은 손망실이다.
"이걸 분대장님께 어떻게 말해야 되냐. 미치겠네..."
"한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일단 돌아가자고. 두번 말하는 거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두 고참 사이의 감정이 격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소초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갑자기 급격하게 무거워 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네 왜 이렇게 늦었어? 너무 조심해서 온 거 아냐?"
갈림길에 도달하자 칼라 병사장 이하 근무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베일 일등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적안석 잃어버렸습니다."
"뭐?"
나는 무의식적으로 칼라 병사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활기 넘치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잃어버린 과정을 말해 봐."
소초로 복귀하면서 베일 일등병은 묵묵하게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칼라 병사장은 처음에는 묵묵. 들으면서는 한숨. 마지막에 가서는 체념하며 오늘의 사태를 결론지었다.
"소초장님한테 보고하고, 분대 차원에서 처벌을 받든가 하자."
"죄, 죄송합니다..."
라만 이등병이 닭똥같은 눈물이 떨어질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칼라 병사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투구를 두드렸다.
"괜찮아 임마. 뭐,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소초에서 우리는 다 한 가족 아니냐. 응?"
기죽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아무리 짬 비린 나라도 앞으로의 상황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애초에 우리만 쓰는 비품이 아니라, 소초원 전체가 근무지에 교대로 사용하는 공용품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칼라 병사장이 명망 있는 소초의 투고란 점? 다른 분대원들은 대놓고 비난은 못할 것이다.
라키아 병사장을 제외하면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무장검사를 마치고 들어서자 안젤리카 일등병과 세레나 일등병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오늘의 비번들이다.
"그래. 난 소초장님이랑 잠깐 얘기좀 할 테니 너희 먼저 밥 먹고 있어."
그간 지켜봐 온 칼라 병사장은 활기차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목소리 차이가 꽤 크다. 이번의 목소리는 후자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두 일등병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좋아졌다.
"무슨 일인데?"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라만 이등병이었는데, 그는 대답 대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연거푸 해댈 뿐이었다.
내가 봐도 멘탈이 아작이 나 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던 안젤리카 일등병의 표정이 나를 향했다.
"적안석이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아까의 칼라 병사장처럼 얼굴이 구겨졌다.
주어만 말했을 뿐이지만 정황만 봐도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기 때문에.
"오후엔 눈 쓸어야 되니깐, 저녁식사 끝나고 내 밑으로 다 모여라."
생활관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 선 베일 일등병이 뒤를 돌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기랄. 오랜만의 집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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