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그래 치료 중에 최고는 금융치료지
002. 그래 치료 중에 최고는 금융치료지
자, 그럼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이 도약 스킬을 신화급으로 업그레이드 해 주는 것이 끝이냐.
그건 또 아니거든.
이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데, 그건 바로 보조 직업 즉 생산직업에 적용하는 거다.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은 일종의 선택에서 도움을 주는데, 생산직의 레시피를 찾아내는데 큰 효과가 있다.
보통 여러 재료를 섞어서 하나의 제작 방법을 만드는데,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은 그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을 많이 줄여준다.
그렇다고 무조건 레시피에 알맞은 재료를 골라주는 것은 아니지만, 준비한 재료 중에서 합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구별해 준다.
그러니 약제사 같은 보조 직업이 약을 만드는 레시피를 찾는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과거에 남은혜가 바로 이걸로 대박을 쳤다.
트래져 헌터로 유적이나 던전을 다닐 때에는 나를 데려다가 일꾼으로 써먹었고, 약을 만들 때에는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의 도움으로 좋은 레시피를 많이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겠지. 못된 년.”
어쨌건 보상을 챙겼으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귀환을 타자.
귀환은 지정해 둔 마을의 이동 지점으로 단번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마법 스크롤과 그것을 사용하는 행위를 말하는 거다.
간단하게 『귀환 주문서』다.
* * *
아, 좋다.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 이건 봐도 봐도 좋다.
귀속이면서 인벤토리에 보관만 해도 효과가 적용되는 개꿀 아이템.
내가 다른 누구에게 빌려줄 일도 없을 테니, 이제 인벤토리에서 꺼낼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거다.
아니 죽어도 귀속 아이템은 인벤토리에서 나오지 않으니 빼앗길 일도 없다.
“좋네. 좋아.”
나도 모르게 자꾸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자, 이제 부직업인 생산직도 약제사로 바꿨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했다.
이젠 여관에 가서 좀 쉬자.
원래 내 부직업은 약초꾼이었다.
마누라, 아니 전처의 부직업이 약제사라고 이혼 전부터 내가 약초꾼이 되어서 외조를 했던 거다.
그런데 그런 나를 두고, 그 년이 외도를 한 거다.
나는 외조를 했는데, 그 년은 외도를 한 거지.
아, 씨발,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살이나 어린 새끼랑 그러고 싶었을까?
그것도 빤히 서로 아는 처지에?
아, 생각하니 또 열이 오르네.
과거엔 이런 뭣 같은 상황에서 그년에게 뒤통수 맞고 『운명의 갈림길 나침반』까지 빼앗겼었다.
그러니 그 때, 내가 미쳐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했던 거다.
“어서 오세요.”
여관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주인이 반긴다.
“방 하나 주십시오.”
“숙박인가요?”
여관에서 방은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잠을 자서 피로를 떨어뜨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니, 안전 로그아웃이요.”
안전 로그아웃.
말 그대로 이 게임에서 안전하게 로그아웃을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알겠습니다. 50골드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네, 여기 열쇠 가지고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계단을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간다.
여관은 계단 끝에 있는 2층에 오르는 순간 각각의 캐릭터에게 독립 공간을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동일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함께 2층 계단을 올라도 2층에 도착하는 순간, 각기 다른 공간에 놓이게 되는 거다.
뭐, 어차피 나는 혼자니까 동행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여관 주인도 따로 열쇠를 더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고.
이젠 방 하나를 잡아서 침대에 누워 로그아웃을 하면 된다.
그러니까······.
치지지지직! 치지지직!
“뭐지?”
이 게임에서 이런 식의 노이즈나 그래픽 깨짐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데?
이건 말 그대로 가상현실이라고.
지금 이게 무슨 일이······.
* * *
“최영우 씨? 정신이 드십니까?”
“끄응.”
아, 딱 느낌이 온다.
병원이네.
특유의 냄새만으로도 알겠다.
그런데 누구?
“평원서의 고형사라고 합니다. 여기 신분증.”
“아니······.”
대뜸, 서에서 나온 경찰?
신분증?
경찰이 왜?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최영우 씨는 코쿤 안에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코쿤은 가상현실접속기의 애칭이다.
생긴 것이 무슨 알처럼 생겼다고.
“사, 사고라니요?”
와, 내 목소리 잠긴 거 봐라.
이거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냐?
설마 회귀 선물로 몇 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는 그런 고구마 클리셰는 아니겠지?
“남은혜 씨, 아시죠?”
“남은혜?”
“남은혜 씨에 관해서 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 년이 왜······.”
“아, 이혼을 하셨다더니 감정이 안 좋으신 모양이군요. 아무튼, 남은혜 씨는 지난 밤 9시 경, 최영우 씨의 오피스텔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다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년이 내 오피스텔에 들어왔다고요?”
“몇 가지 비밀번호 조합을 시도해서 문을 여는 모습이 CCTV 화면에 저장되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남은혜 씨는 최영우 씨의 코쿤에 물을 부었습니다. 정확히는 코쿤의 비상 배터리 쪽입니다만.”
“어디에 뭘 어떻게 해요?”
코쿤의 비상 배터리에 물을?
뭐하러?
“원래 배터리에도 안전장치가 되어 있더군요. 그러니 누전이나 전기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하는데······.”
“사고가 났군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배터리에서 순간적인 과전류가 발생해서 코쿤 외면이 녹아내렸는데, 남은혜 씨의 증언으로는 엄청난 스파크가 일어나 코쿤 전체를 휘감았다고 하더군요.”
“하아, 결국 그 년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죠?”
“그냥 접속을 끊으려고만 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만, 배터리에 의도적으로 물을 부었다는 행위가 아무래도 살해는 아니어도 상해의 의도는 있었다고 볼 수밖에······.”
“거기에 가택 침입까지 넣어야죠. 혹시 들고 다니는 백에서 흉기는 안 나왔나요?”
그 년, 호신 용품을 좀 많이 가지고 다니는 편인데, 그 중에 압권은 날 길이가 20센티미터에 가까운 회칼이다.
그걸 호신용이라고 들고 다니는 걸 알고 예전에 내가 얼마나 놀랐던가.
그게 아직도 그 년의 백에 들어 있었다면 살인 도구를 미리 준비했다고 몰아붙이기 좋을 텐데.
그럼 그 년을 확실히 보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아, 그건 좀 억진가?
그래도 괜히 얽혀 봐야 좋을 것도 없는 년이니 콩밥이나 몇 년 먹게 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백에서 회칼이 나와서 사건 연관성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캬, 좋다.
아주 이참에 푸욱 썩게 해 버리면 좋겠다.
이건 절대로 그 어린놈과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음, 음!
* * *
형사가 왔다 간 다음 날.
남은혜가 병실로 찾아왔다.
“뭐냐? 니가 어떻게 여길 와? 구치소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뭐래? 내가 왜?”
“무단 침입에 살인 미수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뭔 소리야? 무단 침입은 뭐고 살인 미수는 또 뭐야?”
“니가 우리 집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왔다며?”
“그랬지.”
“그게 무단 침입 아니냐?”
“나는 안에서 타는 냄새가 나서 불이 났나 하고 급하게 들어가 본 것뿐인데?”
“뭐?”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릴까?
형사가 분명 그랬는데?
이 년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코쿤의 비상 배터리에 물을 부었다고?
“왜? 뭐?”
뻔뻔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이 년.
이거 뭔가 찔리는 게 있을 때 하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 뭔가 야료가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니가 나를 구하기 위해서 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거네?”
“그렇지!”
“그럼 니가 문 딴 시간하고, 내 코쿤에 문제가 생긴 시간하고 따져보면 되겠네?”
“그, 그렇겠지?”
“그래, 내가 확실하게 게임에서 문제가 된 시간하고, 니가 내 집 문을 따고 들어온 시간을 따져 볼 테니까, 경찰서에서 보자. 그러니까 그만 가 봐.”
“자기!”
“자기는 니미, 우리 이혼한 지 한 달이야. 아, 씨발 그 생각 하니까 고환장애 올 거 같네. 꺼져!”
“어머, 상쓰럽게 고환장애는 뭐야? 그런 게 재밌어?”
“응, 다른 놈하고 붙어먹은 전처를 보면 문득문득 고환장애가 떠올라.”
“정말 걱정 돼서 문병 온 사람한테 매너 없이 이럴래?!”
“됐으니까 꺼지라고.”
어디서 버럭질이야?
니가 지금 나한테 큰소리 칠 상황이니?
경찰서에서 보자는 말이 농담으로 들려?
“그러지 말고 자기야······.”
“니가 무슨 수작을 부려서 구치소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분명히 확인해 볼 거다. 도대체 코쿤 배터리에 어떻게 물이 들어가게 된 건지도 따져 볼 거고.”
“아, 씨발.”
“그래, 그게 니 모습이지. 내숭이 가당키나 하냐?”
“그래서 뭘 원해?”
“뭐?!”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냥 이대로 날 빵에 보내서 자기한데 좋을 게 뭐가 있어?”
“있지! 니 얼굴 안 보는 거. 너랑 인생에서 엮이지 않는 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래? 차라리 그냥 보상금 좀 받고 끝내자 응?”
“보상금? 사람 죽이려고 해 놓고 보상금?”
“아, 씨발. 왜 자꾸 죽인다고 그래? 내가 설마 자기를 정말 죽이려고 했겠어? 내가 그렇게 멍청한 년으로 보여?”
그래 아닌 건 나도 안다.
그동안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년이 작정하고 나를 죽일 의도는 없었을 거다.
아마도 엿이나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장난삼이 물을 부었겠지.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가상현실 접속기는 어쨌건 안전성 하나는 갑으로 만드는 물건이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게임에서 강제 로그아웃이 되면서 끔찍한 두통을 겪게 되는 정도가 끝이었을 거다.
그것도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런데 설마하니 코쿤 전체가 녹아내릴 정도로 문제가 생길 줄은 남은혜 저것도 몰랐겠지.
“그거야 나랑 상관없지. 어쨌거나 살인의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니가 나를 죽일 뻔 했다는 건 사실이잖아. 이런 걸 과실치사라고 하지?”
“안 죽었으니까 과실치사는 아니지!”
“그래, 안 죽었으니까. 그런데 죽었으면?”
“아, 씨발. 그건 미안해. 정말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러니까 미안하면 죗값을 받으라니까? 난 그거면 된다고.”
“아, 쫌!”
쫌은 무슨!
내가 쫌이다.
그냥 가라, 응?
쫌.
“3억 줄게.”
“뭐?!”
와, 이건 정말 깜놀이다.
3억?
3억이라고?
“역시! 3억 하니까 벌떡 일어나네.”
“장난이면 괘씸죄가 추가될 거다.”
“걱정하지 마. 이번 일, 없던 걸로 해 준다고 여기 사인하면, 그대로 3억 쏴 줄 테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뭐냐? 각서까지 준비를 해 온 거냐?”
빠르게 눈으로 훑어보니 각서 내용에 장난질을 친 건 없다.
그냥 이번 일 자체를 없던 걸로 하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는 조건이다.
음, 그런데 서류 끝에 적혀 있는 게 대형 로펌이다.
저 서류를 만든 곳이 대형 로펌이란 소리다.
남은혜 저게 어떻게 이런 로펌의 서류를 가지고 온 거지?
아, 그래.
이즈음에 그럴 일이 있긴 했네.
그럼 돈 좀 있겠는데?
좋군.
이러면 내가 금융치료 좀 제대로 받아 봐야하는 거 아니겠어?
크크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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