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가즈아!
“덥다아..”
향은 동궁의 사무실인 비현각에 앉아 창 너머로 주륵주륵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굵은 빗줄기가 와락 쏟아지고 있으니 시원해야 할 텐데, 습기가 차서 그런가?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갑진년이라 그런가 더위가 아주 살인적이야.”
박 내관과 사관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향을 봤다.
“그게 무슨 상관..”
“아~ 갑진년이라 그런가? 게장이 너무 땡기네..”
“저하, 이런 날씨에 게장을 드시면 반드시 탈이 날 것이옵니다. 늦가을까지는 참으시지요.”
“그래도 게장은 맛있는 걸.. 달달한 감이랑 먹으면 참 맛있을 것 같아.”
향은 앞으로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 관측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과학 군주 영조를 떠올리는 것으로 21세기를 추억했다.
빙의한 것에 큰 불만도 없고, 오히려 고마운 점도 많지만 그래도 가끔은 감상에 젖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저하, 소신이 알기로 감은 속을 차게 하는 음식이옵니다. 거기에 탈이 나기 쉬운 게장을 같이 먹으면 위험하지 않을런지요?”
박 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향을 만류했다.
“아잇! 내가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계속 꼴 받게 하면 뒤주에 넣어버리는 수가 있어!”
모처럼의 추억 회상이 깨지자 향이 성질을 냈다.
“뒤주에 사람을 왜 넣사옵니까..?”
박 내관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본 향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됐다. 그보다 공판이랑 호판은 언제 오는 거야?! 새 강선 선반을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동북면으로 세종이 강무를 떠나는 게 확정되자 향은 무기개선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말이 강무지 언제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실상의 원정이니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로 만든 강선 선반은 그 노력의 핵심이었다.
AI에게 묻고 또 물어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으면서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강선 선반을 찾아냈다.
그 이름하여 1853 로빈스 & 로렌스 라이플링 머신!
설계도를 얻는 데만 500포인트를 쓴 이 선반은 손으로 잡고 돌리는 핸드 크랭크를 이용해 강선을 팔 수 있다.
이 강선 선반이 강선을 파는 속도는 향이 처음 도입한 18세기형 강선 선반에 비하면 압도적이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하나 파는데 6~7일 걸리던 강선을 하루에 둘이나 팔 수 있게 됐다.
생산효율이 단숨에 10배 가까이 향상된 것이다.
똑같이 손으로 파는 것임에도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고탄소강으로 만들어진 공구강으로 된 절삭날 때문이다.
공구강은 탄소 함량을 높여 강도를 강화한 강철이다.
단단한 대신 강한 충격을 받으면 주철처럼 깨진다는 문제가 있지만, 같은 강철도 깎을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높기에 연철로 만들어진 승자총 따위야 쉽게 깎아낼 수 있다.
향은 후원에 강선 제작을 위한 전각을 새로 짓고 5대를 배치할 생각이었다.
5대가 하루 10정씩 365일 동안 가동된다면, 1년에 3,650정의 강선총이 만들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꽤 많은 분량이지만 조선군을 전부 강선총으로 무장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향은 라이플링 머신의 개조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증기기관과의 연결.
장영실이 시제품을 만든 뉴커먼 증기기관은 크기가 너무 커서 연결하지 못하겠지만, 포인트를 벌어 만들 와트식 증기기관이라면 선반에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크랭크를 사람이 아니라 증기기관이 돌리게 되니 더 빠르게, 그리고 꾸준히 대량의 강선총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아마 해마다 만단위의 강선총을 뽑을 수 있겠지.’
그럼 2~3년이면 중앙의 모든 군사가 무장할 강선총을 확보할 수 있다.
뭐, 어떻게든 화약을 확보하지 않으면 총이 많다고 해도 쓸모는 없겠지만.
일단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은 첫 강선 선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볼트나 나사 같은 부품의 규격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손으로 깎아 만들다 보니 아귀가 맞지 않는 부품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향은 야장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다.
뿐만아니라 정인지가 만든 수학 교과서로 산학도 가르쳤다.
장기적으로 각 부품을 만드는 야장들을 부품회사의 사장으로 키워 전문화된 생산체계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아, 강선 선반을 확인한 다음에는 똥판서랑 산학 교과도 만들고, 단련도 가야하는데..”
향은 정인지에게 수학기호를 가르쳤다. ‘+’ 나 ‘=’ 같은 기호는 그대로 쓰고, 알파벳과 관련된 기호는 한글 기호로 대체했다.
그렇다고 한글을 완벽히 도입한 것은 아니다.
인문학 레벨이 부족해 훈민정음해례본을 완벽히 출력할 수 없어 비교적 원리가 간단한 자음과 모음 몇 개만 기호로 사용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세종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
향이 음운학을 이용해 한글을 부분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을 알게 된 세종은 단련이 끝나면 향을 쪼아 음운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향과 함께 새로운 한글 기호를 만들었다.
원 역사보다 수십년 일찍 한글의 창제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향은 대장간의 사업 전반을 관리하면서 새 기물을 개발하고 세종과 함께 단련과 한글 창제를 병행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지하게 바빴다.
그러니 깜깜무소식인 두 판서를 기다리는 것이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이리 안 와!”
향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드러낼 무렵, 입구를 지키던 내관이 소식을 전했다.
“저하, 호조판서 이지강과 공조판서 이맹균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빨리 들어오라 그래!”
향의 호통치자 내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 두 판서를 데려왔다.
비를 맞아 홀딱 젖은 두 판서가 뻘줌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송구하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내가 만든 쇄석 도로는 보고 왔습니까?”
공조판서 이맹균이 끄덕였다.
“예, 비가 쏟아져도 굳건하니 훌륭한 길로 보였사옵니다.”
그러나 호조판서 이지강의 반응은 달랐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다만.. 도로를 만드는 데 들어갈 품이 클 것으로 보였사옵니다.”
“그거야 그렇소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요. 나는 이 도로를 전국에 깔 생각이오.”
이맹균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하, 전국에 이런 쇄석 도로를 깔려면 많은 백성을 동원해야 합니다. 허나 수해 동안 각지의 작황이 나빴사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한다면 원성이 클 것이옵니다.”
조선에서 나라의 공사에 참여하는 부역(負役)은 세금의 일종이었다.
당연히 부역에 나설 때는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일은 고되고, 얻는 것은 없으니 백성들은 부역을 아주 싫어했다.
이맹균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나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할 생각이 없소.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에게는 하루에 백미 3근(kg)을 일당으로 줄 생각이오. 이만하면, 백성들이 도로를 닦겠다며 스스로 찾아오지 않겠소?”
이맹균이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긴 할 것 같사옵니다. 허나 국용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사옵니다.”
호조판서 이지강이 앞으로 나섰다.
“공판의 말이 옳사옵니다. 백미 3근(kg)을 준다면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겠으나, 국용으로는 그리 많은 곡식을 구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흉년이 이어진지라 곡가가 비싸니 뜻이 있다 하더라도 실현키 어렵사옵니다.”
‘인건비 빠방하게 챙겨준다는 말은 좋은데.. 감당은 안 됨.’이라는 단언이었다.
이지강이 독설을 이어갔다.
“쇄석도로는 공임이 많이 들고 유지에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사신이 다니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사행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편함에 대한 논란이 인 적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쇄석 도로를 깔기 전에 각 군현의 작은 도로를 넓히는 작업을 먼저 하소서.”
‘멀쩡한 길이 있는데 괜히 오버해서 포장하는데 돈쓰지 말자. 정 도로 건설이 하고 싶으면 지방에 있는 작은 도로를 넓히는 것 정도만 하자.’는 이야기였다.
향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지강의 이야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대로들이 생각보다 잘 정비되어 있기는 해.’
향은 군사에 관심이 많은 밀덕이었으나 그에 비해 역사에 대한 지식은 모자랐다.
그래서 처음 포장도로를 도입하려 했을 때, 조선은 도로를 까는 것에 부정적인 한심하고 구태의연한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비록 흙길이기는 했으나, 한성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의 상태가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AI를 통해 조사해 봤다.
‘치지야. 15세기 전반 조선의 도로 체계는 어떻게 되어 있어.’
-검색할 수 있는 자료 중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에는 10대로 라 불리는 대로가 있었으며, 이 대로는 수레 3대가 연달아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한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자마자 향은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엘리트이자 기록과 관련되서는 조선 제일인 인물을 찾았다.
“사관 치지.. 아니 사관아. 10대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도로체계에 대해 말해줘.”
“예, 저하. 아조에 있는 10개의 대로는 사신이 왕래하는 1로를 시작으로..”
그 결과, 10개의 대로뿐 아니라 주요 지역을 잇는 중간 규모의 도로들 역시 잘 관리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상업을 중시하던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지 3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멀쩡하던 도로가 사라질 리가 없지.’
아니,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조선이 도로의 관리를 등한시 할 리는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쾌진격이다.
왜군은 사전에 조사한 조선의 대로들을 따라 빠르게 진격해 단 한달 만에 한성을 함락한다.
조선의 도로가 대군이 움직여도 큰 탈이 없을 만큼 크고 훌륭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도로 사정은 15세기를 기준으로 할 때 나름 훌륭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이지강과 같은 조선인이 바라보기에 도로를 포장하자는 향의 주장은 너무 과격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향이 아니었다.
“낙타와 말이 끄는 수레의 통행이 늘면 지금의 도로는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오. 그러니 적어도 폭이 8미도(m)는 되는 포장도로를 깔고, 그 양옆에 폭 2.5미도(m)짜리 인도 둘을 둘 생각이오. 그래야 내가 만든 큰 수레 2~3 대가 오고 가면서 그 옆에서 사람이 통행할 수 있겠지.”
이지강이 향의 완고한 태도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하, 그럼 13미도(m)입니다! 그 정도면 들에 깔린 대로의 크기보다 거의 갑절은 크옵니다! 지금의 국용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기존의 도로를 유지하면서 전국에 있는 소로의 폭을 수레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는 것이 현재의 국용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옵니다.”
향이 단호히 외쳤다.
“불가! 동북면의 벌시온에서 나는 역청탄, 강원도에서 나는 강철에 들어갈 고품질 석회, 도성과 가까운 석회 산지인 충청도, 그리고 황해도의 흑연과 철까지. 도성으로 빠르게 공급돼야 할 물자들이 이리 많소. 그러니 최소한 내가 방금 이야기한 지역까지 이어지는 길은 국용이 얼마나 들든 8미도 쇄석 도로를 반드시 깔아야 하오.”
“하오나 국용이..”
“이번 도로 사업은 국용만으로 짓지 않을 것이오.”
이지강과 이맹균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어떻게..?”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재물을 모아 도로를 지을 생각이오.”
- 작가의말
1. 로빈스&로렌스 라이플링 머신
3D로 구현된 상세한 설명영상입니다. (Youtube) American Precision Museum, ‘Robbins & Lawrence Rifling Machine’
2. 도로 공사의 일당.
영조 때 공사에 투입된 인력에게 지급했던 일당을 참조해 일당을 짰습니다.
3. 조선시대 도로의 폭
세종 8년 4월 5일의 기사에 따르면 한성 안의 대로는 일곱 수레바퀴가 연달아 다닐 수 있는 폭(약 17m)이며, 들에서는 세 수레바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했을 때, 조선시대 10대로의 폭은 대략 7.3~7.5m 정도가 됐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소설 속 쇄석 도로의 폭을 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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