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저수(御反抵手)
향이 어반저수의 결성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바로 미래의 역적 ‘The 수양대군’ 이유 때문이었다.
아장아장 걷는 유를 볼 때마다 향은 귀여움에 웃음이 나면서도 그의 미래를 어찌 바꿔야 할까 고심이 들고는 했다.
“가장 좋은 건 불량한 친구놈들을 쓸어버리는 건데.”
홍달손, 권람, 한명회 같은 잡배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성삼문, 박팽년 같은 충신들을 옆에 붙인다면 이유가 난신적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군과 친구 먹을 정도로 나름 잘나가는 집안 놈들이라 손을 쓸래야 쓸 수가 없지.’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예문관 제학이고, 홍달손은 아버지가 영중추부사, 권람은 할아버지가 찬성사에 아버지가 우찬성이다.
‘최저가 종2품에 최대 정1품이야. 쳐내려면 경화사족들을 전부 적으로 돌려야 한다.’
경화사족.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며 개경, 한성 등 수도에서 거주하는 명문 귀족들이다.
설령 왕이라 할지라도 그런 이들을 명분 없이 칠 수는 없었다.
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출사를 막는 정도가 다였다.
‘그걸로는 아무래도 불안한데..’
고민이었다.
그렇게 고심하던 와중에 향은 불현듯 한 문구를 떠올렸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하라.”
영화 ‘대부’의 명대사.
“그래, 죽이지 못할 바에 아예 옆에 두고 감시하자!”
한번 아이디어를 내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주범들이 전부 내 나이 또래의 경화사족이니까 경화사족의 자제들을 모아서 내 수족으로 키운다. 반란을 획책할 두뇌들이 사라지면 이유 곁에 잡배가 붙는데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렇게 어반저수(御反抵手)의 설립이 확정되었다.
“흐음.. 어반저수를 잘 키우면 경화사족들을 포섭할 수는 있겠는데 반대로 지방 출신들의 반발이 있을 것 같은데..”
현재의 조선은 개국한 지 30년이 조금 넘은 신생국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하면 생각나는 유교 꼰대 사대부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
대신 지방의 호족들의 힘이 아주 강하다.
고려 시절, 사병을 부리며 막대한 권력을 누리던 호족들은 지방에서만큼은 여전히 터줏대감이었다.
그래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역의 호족들에 의해 휘둘리는 일이 잦았다.
특히 지방의 통치에 깊게 관여하던 향리(鄕吏)들의 패악이 심했다.
30년 동안 해결되지 않던 이 문제는 세종에 의해 해결된다.
세종은 유향소와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두개의 카드로 향리들을 견제했다.
유향소는 중앙에서 관직을 마치고 지방으로 귀향한 관리인 품관들이 모인 자치 기구다.
이들은 지방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토착세력인향리와 기싸움을 벌였다.
조정은 유향소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향리를 억눌렀다.
그렇다고 유향소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유향소의 품관이나 향리나 전부 자신의 이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다 보니 중앙에서 보낸 관리인 수령을 무시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수령이 저지르지 않은 부정(不正)을 거짓으로 조작해 상소를 올리거나, 의도적으로 관리의 명령을 거부했다.
세종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부민고소금지법을 내놨다.
향리와 유향소의 품관같은 지방의 기득권 세력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수령의 권한을 키워준 것이다.
그 결과, 중앙 관리인 수령에 의한 중앙집권이 달성되었다.
하지만 1423년 현재, 부민고소금지법은 시행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향리의 권한은 여전히 강했다.
게다가 그중 일부는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신분을 세탁하고 있었다.
최문손과 그를 지지하던 지방 출신 관료들이 그런 이들이었다.
지방 출신 관료들은 중앙의 경화사족을 압도하기 위해 성리학을 중요시했다.
권세와 재력에서 밀리니 성리학이라는 명분을 손에 쥐려고 한 것이다.
‘최문손 같은 유교 꼰대들이 귀향해서 유향소를 장악하면 성리학적 질서가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조선의 건국이념에 따르면 굉장히 좋은 일이었으나 향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한성을 제외한 전국이 유교 꼰대 양성소가 된다니.. 그럼 지금보다 개혁이 몇 배는 어려워질 거야!”
실제로 향이 있는 시점에서 100년 뒤인 중종 시기쯤 되면 중앙의 경화사족보다 훨씬 성리학적으로 교조화(敎條化)된 지방 유림, 소위 ‘사림’이 득세하게 된다.
이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경화사족을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에 따라 조선의 유학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종교처럼 변질되고 만다.
“향리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최문손 같은 유교꼰대가 지방을 장악하는 걸 막아야 한다!”
어려운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는 든든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이왕 경화사족을 키우기로 한 거, 아예 친위대로 만들어서 지방세력과 대립하게 만든다!’
중종 시기에 일어날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을 경화사족과 지방호족의 대결 구도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두 세력 모두 상대를 꺾기 위해서는 중앙을 꽉 쥐어 잡고 있는 임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신권은 반으로 갈라지고 왕권은 절대화된다.
그리고 향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을 뿌리째 바꿀 것이다.
*******
향이 쾌활하게 웃으며 세종에게 물었다.
“어떻사옵니까. 이 정도면 학당을 세울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겠는지요?”
“..”
세종은 서안을 찬찬히 두들기며 향의 계획에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았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문제될 게 없다.’
당연했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한 선조, 환국 정치로 왕의 위상을 크게 올린 숙종같은 미래의 임금들이 피로 쌓아 올려 만든 필승의 계책이었다.
사화의 사짜도 모를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을 상대로는 백이면 백 먹힐 전략이었다.
검토를 마친 세종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세자 시강원과 대장간을 합쳐 동궁관으로 확장하고, 시강원의 스승들이 어반저수의 학생들도 가르칠 수 있도록 하겠다. 또 필요한 게 있느냐?”
“선생이 더 필요하옵니다.”
세종이 의아해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시강원의 스승들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들이다. 부족함이 없을 텐데?"
"유학과 더불어 무학(武學)과 산학(算學), 그리고 여러 기술을 가르치고자 하옵니다. 기술은 저와 야장총제 이천, 야장별좌 장영실이 가르칠 수 있고 무학은 익위사의 무관들이 가르칠 수 있으나 산학을 가르칠 선생이 없사옵니다.”
“무학과 산학에 기술까지?”
“기술입국을 위해서는 더 많은 기술자와 산학자가 필요하옵니다.”
“그건 그렇겠구나. 그럼 빙빙 돌리지 말고 누구를 원하는지 말하라.”
“동궁관을 맡을 제학(提學)으로 정흠지를, 직제학(直提學)으로 정인지를 내어주시옵소서.”
“불가하다. 정흠지는 곧 지신사로서 왕명을 출납할 것이고 정인지는 역법을 담당하고 있다.”
지신사는 나중에 도승지로 이름이 바뀌는데 대충 왕의 비서실장이라 보면 된다.
세종으로서는 자신의 수족을 넘겨달라는 것이니 동의할 수 없었다.
“동궁관의 수장인 제학은 어차피 이름만 올릴 뿐 큰일을 하는 게 없사옵니다. 그러니 정흠지가 지신사가 되더라도 제학을 겸직케 하면 문제가 없사옵니다. 그리고 정인지의 경우 역법을 위해서라도 직제학이 되어야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별좌 장영실에게 시계와 더불어 여러 천문기구를 만들게 할 생각이옵니다. 정인지가 동궁관 직제학으로 있어야 대장간을 오고 가며 천문기구 제작에 힘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산학에 밝은 후예를 길러야 그가 없더라도 후일을 대비할 수 있사옵니다.”
“흐음.. 네 말이 옳다. 가납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됐다. 가서 시계나 제대로 만들 거라. 약속대로 시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어반저수고 동궁관이고 전부 없던 일로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
세종에게 보상을 약속받은 향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대장간으로 입성했다.
“가즈아아! 시계만 만들면 어반저수를 소집할 수 있다!”
장영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 어반저수가 무엇이옵니까?”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어서 시계를 만들어야지 당장 강철부터 뽑아야 하니 바빠!”
“지난번 시연에서 뽑은 강철이 아직 남아 있사옵니다.”
“그건 탄소.. 가 아니라 쇠의 기운이 너무 많아서 아주 강한 충격을 받으면 깨진다. 연철의 비율을 크게 늘려서 강철을 다시 불려야 해.”
강철도 종류가 있다.
도가니에 선철을 많이 넣으면 탄소함량이 높은 고탄소강이 되고, 연철의 비중이 높으면 저탄소강이 된다.
지금 만들려는 것은 중탄소강! 탄소 함량이 0.6% 정도로 질기면서 탄성이 좋다.
탄성이 좋기 때문에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검이나 갑옷을 만들기에 아주 좋다.
검은 강한 충격을 받아도 부러지거나 휘지 않으니 좋고, 갑옷은 공격을 튕겨내기에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프링 제작에 제격이지!’
탱탱 튀는 용수철이든 충격에 따라 출렁이는 판스프링이든 거의 모든 스프링은 중탄소강으로 만든다.
이번에 향이 만들려는 시계의 핵심 부품도 중탄소강으로 만들어진다.
“연철 28근, 선철 5.3근, 백운석, 석회석, 무명석을 각 0.35근, 유리 0.23근, 흑연 0.12근. 모두 넣었사옵니다!”
대장간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종 6품 야장주부(冶匠主簿)가 된 노야장이 다가와 외쳤다.
“좋아. 앞으로 중갑과 도검을 만들 때도 이와같이 만들게. 다 녹아서 철괴가 되면 내가 이른 대로 부품을 만든 뒤 부르고!”
“예!”
고개를 끄덕인 향이 대장간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에선 장영실이 시계바늘과 틀, 톱니바퀴 따위를 만들고 있었다.
“장 별좌, 일은 잘 돼 가나?”
향의 부름에 장영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아렸다.
“예. 순조롭게 만들고 있사옵니다. 헌데..”
“응?”
“진자를 움직일 힘을 어떻게 하실 셈이신지요?”
“아, 동력원(動力源)? 두 가지 방법이 있네. 먼저 추를 이용한 방법이 있지.”
“추요?”
“별것 없네. 추에 긴 줄을 매달고 진자가 연결된 톱니와 연결된 통에 감아주면..”
“아! 진자가 움직일 때마다 추가 천천히 떨어지면서 계속 힘을 더해주겠사옵니다!”
말로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구조임에도 장영실은 쉽게 구조를 이해했다. 그리고 단점도 파악했다.
“하지만 추의 힘으로 시계를 돌리려면 시계가 아주 높아야 하옵니다. 그래야 추를 오래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요.”
“맞네. 그래서 나는 두번째 방법을 쓸 생각이네.”
장영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태엽(胎葉)이라는 물건이네.”
“태엽이요? 그게 무엇이옵니까.”
“얇게 편 철판을 구부려서 둘둘 만 것일세. 이걸 세게 조였다 놓으면 아주 강한 힘이 생기지!”
장영실이 반신반신반의한 기색을 보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겠사온데.. 그냥 놓으면 순식간에 풀려버리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래도 그려줘야겠군. 어디보자..”
향이 작업실 구석에 있던 종이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철판이 튀지 않도록 통 안에 가두고, 태엽이 천천히 풀리도록 이렇게 생긴 특수한 도르래를 연결하면 태엽이 찬찬히 풀리도록 할 수 있네. 나는 이 도르래를 균력차(均力锥)라고 부를 생각이야.”
태엽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특수 장치인 Fusee를 그렸다.
문돌이 주제에 어떻게 그렸냐고?
당연히 AI로 설계도를 뽑았다.
도가니로를 완성하면서 2,000 포인트, 등사기를 완성하면서 500 포인트를 번 덕에 설계도에 100포인트를 썼음에도 2,450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요즘은 포인트를 쓸 일이 없었으니까 되도록 아껴둬야지.’
어떤 상황에 부딪힐지 모르니 포인트를 최대한 절약해야 했다.
“오오! 그림만 봐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사옵니다!”
향이 자전거에 쓰이는 체인을 그렸다.
“그지? 도르래에 쓸 쇠사슬을 요렇게 만들면 더 균일하게 감기게 할 수 있네. 내 생각에는 이를 새 이동수단에도 쓸 수 있을 거야.”
“당장 만들어보고 싶사옵니다.”
“부품들이 정밀하니까 다 만들려면 몇 주는 걸릴 걸세. 찬찬히 만들어보자고!”
“예, 저하!”
******
향이 시계 제작에 매진하는 사이, 조정에서는 모련위 정벌에 대한 본격적인 토의가 시작됐다.
“신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뢰옵니다. 벌시온에 도호부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만강 이남의 땅을 완전히 점령해야 하옵니다. 선대왕께서 경원 도호부를 설치하셨던 회질가(會叱家)에 도호부를 다시 설치하시고,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수주(愁州)로 옮겨야 하옵니다.”
“신 병조참판 최사강이 아뢰옵니다. 회질가와 수주 사이에는 간격이 너무 넓사옵니다. 다온평(多溫平)에 군진을 하나 더 두셔야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동맹가첩목아를 견제하려면 아목하(阿木河)에도 군진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벌시온에 도호부를 차리려면 최소 네개의 진이 필요하다는 건가.”
“신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 이화영이 아뢰옵니다. 동북면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석막(石幕)과 공주(孔州)에 진이 더 있어야 하옵니다.”
“흠.. 동북면 출신인 경의 이야기이니 맞는 말이겠지. 그럼 적어도 ‘6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벌시온까지 합하면 7진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쉽지가 않군.”
이화영이 정전(正殿)의 가운데로 나아가 부복했다.
‘이 싸움은 막아야 한다!’
태조 대왕의 의형제 이지란의 차남으로서 동북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그였기에 벌시온에 도호부를 설치하는 게 어떤 일이 될지 훤히 예측되었다.
“진을 쌓으면 동북면의 모든 여진족이 봉기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럼 그 규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화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적어도..”
- 작가의말
0. 시계에 대한 설명은 아래 영상과 자료로 매우 간단하고 확실하게 이해하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추 낙하식 진자시계
(Youtube) Glen Bull, ‘Galileo Pendulum Clock’
2.퓨즈 설명
영문위키, ‘Fusee (horology)’이며 균력차(均力锥)는 fusee를 중국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3. 퓨즈를 쓴 진자시계의 내부구조
(Youtube) james beck, ‘fusee clock movement’
4. 퓨즈의 작동
(Youtube) James Swift, ‘Fusee Clock Unwinding’
5.동북면의 여러 지명들
작중에서 신하들이 언급한 지명들은 4군 6진 중 두만강에 설치된 6진이 설치된 지역입니다. 벌시온을 제외한 나머지 6곳이 경원, 경흥, 부령, 온성, 종성, 회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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