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강철이 복사가 된다니까!(3)
최문손을 마주 본 향의 얼굴에 열기가 묻어났다.
뜨거운 분노가 최문손을 강타했다.
“너는 명의 신하인가 조선의 신하인가?”
“우문(愚問)이옵니다. 아조는 명의 번방(藩邦)으로서 성상께서 황제를 섬기니, 어느 나라의 신하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사옵니다.”
‘임금이 황제의 신하잖아? 그럼 우리도 명나라의 신하인데 뭔 구분을 하냐!’는 폭언이었다.
“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종이 작게 기함했다.
평소 최문손과 친하게 지내던 조극관도 최문손의 난언(亂言)에 할 말을 잃었다.
향은 달랐다.
“우리 백성의 조세로 거둔 녹을 먹고, 우리 임금의 은혜로 관직에 오른 놈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그렇게 명나라가 좋으면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과거를 봤어야지!”
세종과 주위의 신하들이 속이 뻥 뚫렸다는 시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최문손은 자신이 너무 세게 말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잠시.
최문손은 각오를 다졌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여기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세자를 논파해야 살길이 열린다!’
결심을 마친 최문손이 향에게 강하게 따져 물었다.
“저하께서는 지금 교언(巧言)으로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고 계시옵니다. 지금 중한 것은 그것이 아니옵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소신은 저하께서 이야기하신 무쇠와 참쇠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맞는지 의문이 드옵니다.”
“응?”
“소신이 알기로 저하께 바쳐지는 돌들은 모두 모으면 양이 상당하나 개별로 놓고 보면 1~2개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맞는 말이었다.
검은 돌이라고 올라오는 돌을 한 무더기씩 받았다면 상의원의 창고가 쓸데없는 잡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서 궁으로 바쳐진 견본은 돌덩이 2~3개로 한정해놨다.
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고작 돌덩이 두셋을 만져 보신 것만으로 돌의 원리를 파악하셨다는 말이옵니까?”
“그렇지..?”
“허면, 역청탄이 철광석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아셨으며, 강철을 만드는 법은 또 어찌 아셨사옵니까. 그것도 설마 생각만 하신 것이옵니까?”
향의 얼굴에 불쾌함이 드러났다.
‘어째 꼬치꼬치 캐묻는다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생각만 한 것으로 선철과 강철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보여줄 물증이 없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거지?”
“그렇사옵니다. 배움이 일천(日淺)해 아는 게 없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증좌를 내놓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국본이 조정에서 하는 이야기는 어떻겠사옵니까?”
‘동네 바보도 자기 말이 맞다고 떠들 때 근거를 대는데 너는 뭐냐?’는 일침이었다.
슥슥-.
[최문손의 망언은 실로 기괴하다. 그러나 말에 담긴 날카로움은 명징]
신하들 중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최문손의 언행이 불손하기는 하나 맞는 말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요. 어찌 단 한 번의 검증도 없이 정벌을 입에 담는다는 말입니까.”
최문손을 따르던 무리가 날카로운 말로 향의 심기를 어지럽히려 했다.
범부(凡夫)라면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이 있는 이라도 흠칫했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향은 범부가 아니었다.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본 전차광은 한낱 인간의 쑥덕거림에 흔들리지 않았다.
피식.
향이 최문손을 비웃었다.
그 비웃음에 웅성이던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향에게 눈길을 돌렸다.
기세등등하던 최문손 역시 향의 당당한 태도에 풀이 죽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제안.. 말이옵니까?”
“그래. 내가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 말대로 대장간에 가지 않고 시강원에 들어가서 경전에 매진하겠다. 대신, 너는 관직을 걸어라. 내가 성공하면 스스로 직을 내고 낙향해라.”
“그런.. 그건 저하께서 정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나는 아주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세종이 앞으로 나섰다.
“세자는 담대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용렬하게 도망치겠느냐. 아니면 맞서겠느냐?”
최문손이 크게 당혹했다.
‘여기서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나는 임금이 공인한 용렬한 선비가 된다. 당장이야 관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승차(陞差)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져도 낙향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받아들인다!’
이긴다면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엄히 훈계한 참선비가 될 것이오. 져서 관직에서 물러나더라도 최소한 세자에 맞섰다는 명성은 지킬 수 있었다.
최문손으로서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세자가 실패하길 빌 수밖에 없었다.
조말생이 향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로구나! 나를 겁박할 때도 느꼈으나 어린 나이임에도 저리 심계가 깊다니.. 과연 대왕의 아들답다.’
“하겠사옵니다.”
최문손이 사뭇 당당한 자세로 세종에게 고개를 숙였다.
“좋다. 나와 여기 있는 모든 신하가 증인이 될 것이다. 세자는 언제까지 강철을 뽑아낼 수 있겠느냐?”
세종의 질문에 향이 아담한 손을 쫙 펴 날짜를 세어보았다.
“그 정도라면.. 넉 달이면 충분하옵니다.”
“좋다. 넉 달 안에 세자가 강철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좌정언 최문손을 파직하겠다!”
******
“후후..”
아늑한 보금자리인 자선당으로 돌아온 향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좌정언 최문손. 사람 꼴받게 하는 재주가 아주 지랄 맞았는데 드디어 목을 칠 기회가 왔군.”
쿡쿡.
향이 사악하게 웃으며 이불로 다이빙했다.
“오늘은 맘편히 푹 잘 수 있겠어. 아, 그전에..”
상태창을 켰다.
‘치지야. 도가니 공법으로 강철을 생산하고 싶은데 도가니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도가니 공법(Crucible Process)에 쓰일 도가니는 고온을 견딜 수 있는 강한 내열 소재로 제작돼야 합니다. 주로 쓰이는 소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알루미나, 실리카, 마그네시아, 그래파이트..
‘어렵게 말하지 말고 15세기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물질로 알려줘.’
-고령토, 흑연, 백운석을 사용하여 도가니를 만들 수 있습니다. 비중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령토 60%, 백운석 10%, 흑연 30%
‘백운석? 백운석이 뭐야.’
-백운석 또는 돌로마이트라 불리는 칼슘 마그네슘 탄산염으로 마그네슘, 시멘트의 원료나 철강 공정에서 염기성 슬래그를 생성하거나 내화물로 쓰입니다.
‘아, 돌로마이트!’
향이 인공지능을 얻자마자 가장 처음 만들려고 했던 마법의 항아리, 토마스 전로를 만들 때 꼭 필요한 물건이 바로 돌로마이트였다.
“도가니 제강에도 쓰이는구나..”
꼭 확보해야 할 물건이 하나 더 늘었다.
‘치지야 그럼 백운석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향의 얼굴이 구겨졌다.
“꼴받게 할래? 한반도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몰루?(사회과학 레벨0)
“..”
짜증이 샘솟으나 풀 데가 없었다.
조용히 남은 포인트를 모두 때려 박아 사회과학 레벨을 2로 만들었다.
탈곡기 등 농기구를 만들며 얻은 포인트가 싹 날아갔다.
남은 포인트는 50.
“이래서야 설계도도 못 뽑겠네.”
그래도 백운석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야 아깝지는 않았다.
한숨을 내쉰 향이 다시 물었다.
‘백운석, 어디서 구할 수 있어?’
-충주, 단양, 제천, 영월 어드매에 있습니다.(사회과학 레벨2)
“아잇 싯팔!”
포인트를 부어 넣은 것에 비하면 실망스런 결과가 나왔다.
어딘가라니?
대충 지역을 특정한 것을 제외하면 얻은 게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 포인트!”
향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포인트가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제자리에 멈춰선 향이 조용히 일어났다.
“대략적인 위치라도 알았으니.. 상급(賞給)을 걸면 어찌저찌 구할 수 있겠지..”
나름의 행복회로를 돌리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향은 곧바로 새로운 공문을 돌렸다.
-새하얀 돌 중 가치가 있는 돌을 찾은 자에게 백미 300섬을 내리겠다! 단, 광산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산지에서 찾은 돌이어야 한다!
석탄 광산이 거의 다 발견되면서 사그라들기 시작하던 탐광(探鑛)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대탐광 시대의 시작이었다.
******
“옘병, 이 짓도 이제는 못 해 먹겠구만!”
단양군의 평민 춘삼이는 약초를 채집하는 심마니였다.
그의 아버지는 약초꾼이고 그의 어머니는 사냥꾼의 딸이었다.
그래서 춘식에게 산은 벗이자 집이었다.
춘식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습격한 범에 당해 부모를 잃었음에도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춘식의 삶은 언제나 같았다.
산에서 나는 약초들을 모아 내다 파는 것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약초를 거의 캐지 못했다.
단양군을 다스리는 지군사(知郡事)가 눈이 벌게져서 인근의 약초꾼과 사냥꾼들에게 하얀돌을 찾으라는 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향이 충주목, 단양군, 영월군, 제천현의 수령들에게 향이 별도로 내린 지령 때문이었다.
-좋은 광물을 찾은 고을의 수령에게는 백미 100섬을 별도로 하사하겠다.
백미 100섬은 관아에 앉아 언제 한성으로 돌아가 경관(京官)이 되나 하며 시간을 때우던 관리들을 벌떡 일어나게 했다.
“돌을 찾아라! 탐광에 성공하면 너희도 부자, 나도 부자다!”
“와아아-!”
단양군의 백성들도 백미 300섬에 열광하며 산에 올랐다.
춘식도 처음엔 열심히 산을 헤맸다.
심마니로서 산을 뒤지던 가락이라면 남들보다 먼저 찾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백미 300섬이면 지긋지긋한 심마니 노릇을 하지 않아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하지만 기운을 내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석 달 내내 온 산을 뒤져도 개울가에 있는 하얀 조약돌 몇 개밖에 줍지 못했다.
광산으로 쓸 만큼 하얀 돌이 많은 곳은 찾지 못했다.
‘괜히 약초만 못 캐고, 몸만 축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춘식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춘식 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의욕 넘쳤던 수령과 짬을 내 산을 헤매던 군민들 역시 하나둘 산행을 포기했다.
사흘 전, 무리해서 산을 뒤지던 사냥꾼이 범에 물려 죽은 뒤로는 산으로 오르는 발길이 거의 끊겼다.
사실상 산에 오르는 게 생업이던 춘식만이 산에 남았다.
“그냥 접고 약초나 캐야 하나..”
기운이 쭉 빠졌다.
한 많은 인생을 뒤바꿀 천금 같은 기회라 생각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오히려 손해만 봤다는 좌절감이 그를 지배했다.
그탓일까?
수십 년을 산을 헤매던 심마니답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으악-!”
춘식이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렀다.
군데군데 솟아있는 돌부리와 나뭇가지들이 춘식을 할퀴었다.
“으어-.”
춘식이 통증에 신음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뾰쪽한 나뭇가지가 창처럼 겨눠져 있었다.
매우 놀란 춘식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더 세게 굴렀으면 나뭇가지가 눈을 뚫고 들어갔으리라.
“으..”
기가 죽은 춘식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쓸리고 베여 아팠으나 다행히 부러지는 등의 중상은 없었다.
“개젓같은 돌을 찾겠다고 나대다 이게 무슨 고생이냐..”
문득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처량해진 춘식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줄기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춘식의 볼을 적셨다.
눈물방울이 눈물줄기가 되고 이내 폭포수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이래 살아서 뭣하냐!”
으아아-!
춘식이 울부짖으며 주저 앉았다.
모든 게 짜증났고, 모든 게 싫었다.
그렇게 춘식은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화가 풀린 춘식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얼어 죽든 범에 물려 죽든 죽는다!’
생존본능이 깨어난 춘식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멈췄다.
“어?”
노을을 맞아 붉게 타올랐지만 본질은 하얀 돌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아, 조약돌 좀 그만 보고 싶다!”
내기 이후, 향은 대장간을 점검하고 새로운 인재를 들이며 백운석이 상의원에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백운석은커녕, 쓸만한 돌 조차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하루가 흘러갈수록 향은 점차 초조해졌다.
어딘가 짜증을 풀 곳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향이 고대하던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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