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성적
도장에 들어간 지 한 달 즘, 대오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성준은 이미 태권도 선수출신이라 들어오자마자 상비군 대련 파트너가 된 반면, 자신은 오후 내내 반 토막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들과 섞여, 한 달째 구령에 맞춰 손발을 내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경훈이 합류하면 창피함은 덜했지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는 게 고역이었다.
게다가 훈련 내내 담배조차 피울 수 없었다.
하루는 잠깐 짬을 내 담배를 피우고 왔는데, 신성한 도장에 담배냄새를 풍기고,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며 냄새가 빠질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며, 도복을 입은 채로 밖으로 쫓겨났었던 것이다.
그 길로 나올까하다 꾹 참았던 일이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저, 사범님!... 저도 이제 대련 좀 하면 안 될까요?" 결국 참지 못하고 대오가 사범에게 부탁했다.
"안 돼. 관장님 말씀 기억 안나? 관장님 허락 없이는 안 되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가서 테크닉이나 더 연습해."
그랬다. 들어온 첫날, 관장의 입회하에 성준과 대오, 경훈의 전체적 역량을 보기 위해 일반성인 회원과 대련을 시킨 일이 있었다.
성준이 출전해 가볍게 일반회원을 요리하듯 제압했다. 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은 대오 차례였다. 근데 그게 모두의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도복에 호구를 착용한 대오가 갑자기 대련 시작과 함께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리며 복싱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게다가 복싱의 위빙동작(상체를 좌우로 흔드는 동작)을 하며 상대에게 다가서는 폼이, 이곳이 태권도장이란 걸 의문스럽게 만든 것이다.
모두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황한 일반회원이 주춤하며 뒤로 살짝 물러나는 순간, 대오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킥복싱의 로우킥으로 상대의 허벅지를 그대로 가격한 것이었다.
상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뒤로 그 회원은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더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았다.
관장은 바로 대오와 사범을 관장실로 따로 불러 '태권도 기본기술이 완전히 연마될 때까지 대련 금지'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사범님! 제가 한번 겨뤄 보면 어떨까요?" 예비상비군 출신 고준우가 나섰다.
어려서부터 이 도장에서 연마를 했고, 이제 중학교 3학년이지만 체격이 좋아서 대오와도 체급 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내년에는 명문태권도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이 내정되어 있는 실력자였다.
'음! 준우라면 괜찮겠지!? 워낙 실력 차가 날 테니!" 사범이 생각했다.
하지만 고준우의 생각은 달랐다. 평소 대오의 행실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마에 진지하지 않은 태도나, 친구들에게 하는 것이지만 신성한 도장에서 욕을 해대는 태도가 무도인으로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버릇을 제대로 고쳐주겠어!"
두 사람이 보호구를 착용하고 매트 가운데로 나왔다.
"자, 1회 전만 할 거야. 가볍게 자신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마음으로... 김대오 알겠어?"
"예!" 사범의 말에 대오가 크게 대답했다.
"선수 차렷! 경례!... 시작!!"
대오의 자세가 처음과 달리 제법 태권도의 품세를 보이고 있었다. 상대의 스텝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스텝도 좌우로 가볍게 뛰며 자세변화를 주었다.
상대의 자세 변화에 따라 대오의 스텝이 따라가는 찰나였다.
고준우의 오른발이 스텝을 밟는 척하다, 그대로 대오의 몸통보호구로 짓쳐들어왔다.
대오가 놀라 얼른 몸을 뒤로 물렸다. 순간 몸통으로 들어오던 발이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속았다!' 대오가 속으로 외쳤다.
몸통으로 들어가던 발은 사실 허수였다. 고준우는 한방으로 녀석의 콧대를 꺽어 놓을 심산으로 대오의 정수리를 향해 자신이 평소 자신있어하던 오른발 찍어 차기를 시전한 것이었다.
발 뒷꿈치가 막 정수리에 닿을 찰나, 대오의 몸이 상대의 발을 피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상체가 반대 방향 아래로 쏠리며, 대오의 오른발이 큰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욱!- 대오의 오른발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의 위력이 도장 전체에 울렸다.
-핏!- 대오의 오른발이 궤적을 따라 회전하며 고준우의 머리보호구를 스쳤다. 순간 보호구가 돌아가며 고준우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스치기만 했는데도 보호구가 돌아 얼굴 전체를 가려버린 것이다.
고준우가 당황하여 두 세 걸음 물러나며 얼른 보호구를 손으로 정비하던 때였다.
'지금이다!' 대오가 쏜살같이 고준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지금 뭐하는 거야!?" 어느새 관장이 입구에 서서 도장이 쩌렁! 울리게 큰소리를 쳤다. 그 기세에 중지시키려는 사범도, 달려들던 대오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씨팔! 한 방이면 끝나는 거였는데......' 대오는 관장실에 불려갔다 나와 도장 구석에 쭈그려 앉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관장은 그렇게 남을 쓰러트릴 운동을 하고 싶다면 다른 운동을 하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맞은편에서 경훈이 언제 왔는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발차기 자세를 잡고 있었다.
성준이 풀이 죽은 듯 앉아 있는 대오의 옆으로 와 앉으며 땀을 닦았다.
"너무 서두르지 마. 아까 발차기는 정말 좋았어! 니가 기술을 제대로 익혔다면... 예를 들어 거기서 감아차기가 들어갔어도, 저 녀석 아직도 꿈나라 헤매고 있었을 거다!" 성준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됐어 마! 지금 잘났다고 훈계하는 거냐?"
"무슨 얘기 해?" 경훈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궁금한 얼굴로 둘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넌 왜 그렇게 열심인 거냐!?" 대오가 비꼬듯 경훈을 보며 말했다.
"... 나는 너희들처럼 타고난 재능이 없잖아!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리고 철묵이한테 미안해서라도... 어쨌든 남의 돈으로 배우는 거니까!" 경훈의 대답이었다.
경훈의 말에 셋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대오의 태도가 달라진 건.
대오는 그날부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타지 않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경훈과 성준은 왜 저러나? 했지만 다음 날부턴 같이 뛰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타고난 통뼈라 이렇게라도 체중을 빼려는 거지만, 이 녀석들은 왜 뛰는 거야?'
대오가 뒤따라 뛰어오는 둘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 * *
전국모의고사 성적이 나왔다. 성적표를 펼쳐든 우민과 지숙은 충격에 빠졌다. 전국등수는 둘 째 치고, 학년등수가 30등 밑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정읍에서는 한손가락 안에서 빠져 본 적이 없던 그들이었다. 어느 정도 격차를 예상했기에 그나마 노력을 한 결과가 이 정도였다.
그에 비해 학교대자보엔 학년 10위권과 그들의 전국등수가 함께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엔 김산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학년순위 5등, 전국등수 98등-
'철묵이 친하다는 이유로 시기파 애들을 합류 시킨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우민과 지숙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우종과 경훈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지만, 수철은 40위 권 밖에서 그들을 바짝 쫒아오고 있었다.
그것보다 의외인 건 철묵의 성적 역시 하위권이라는 거였다.
장학혜택까지 줘가며 자신들을 모아 서울로 상경시킨 장본인인 자신은 정작 성적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함이 모두를 더욱 의아스럽게 하였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한 것이, 지숙이 최근 봐온 철묵은 수업시간에도 졸기가 일수고,
쉬는 시간에도 엎드려 자기 바빴고, 잠깐 뭔가를 하는 것 같아 보면 프린트된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공학계산기까지 올려놓고 열심히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지숙이 궁금하여 들여다 본 적이 있는데, 숫자와 기호가 복잡하게 나열되고 얽혀있는 게, 과학이론을 풀어놓은 것도 같은, 도통 자신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공식 같은 것들이었다.
"철묵이 또 자냐?" 우종이 다가오는 지숙을 향해 물었다.
이젠 어느 정도 친숙해져서 점심시간이면 이렇게 매점에 모여 다 같이 점심을 먹거나, 학교 밖 일반식당으로 몰려가곤 했다.
지숙이 우종의 물음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도대체 녀석 요즘 뭐하고 다니는 거야? 보충수업도 빠진다면서?" 이번엔 우민의 물음에 우유팩을 뜯던 지숙이 여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지숙이 너는 같은 반이니까... 뭔가 느껴지는 거라도 없는 거야?" 수철이었다.
"글세... 그게 무슨 공식 같은 걸 들여다보기는 하더라고." 지숙이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응. 나도 우연히 봤어! 그런데 일반적인 공식이 아냐. 알 수는 없지만 생물학적 기호, 수학, 물리 등이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는 게... 아무튼 과학계에서 통용되는 전문가들이나 쓸 법한 이론 같은 거였어." 산호가 당시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 산호를 보며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여간 알 수가 없어! 우리를 이렇게 여기까지 데려다 놓고 정작 자신은 딴 짓을 하고 있잖아!?"
"그러게 경훈이나 나처럼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녀석들까지 데려다 놓고는......" 수철의 말에 우종이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동조했다.
"야, 그런 말이 어딨어! 이제 시작이잖아, 같이 학원도 다니고, 오히려 이제부턴 너희 점수가 팍팍 올라갈 거야. 걱정하지 마!" 우민이 우종을 위로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우종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철묵이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아?" 경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경훈의 말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우민과 친구들이 점심을 마치고 막 철묵이 있는 3반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철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철묵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강철묵 어디 간지 모르냐?" 우민이 옆자리에게 물었다.
"아까 2학년 선도부가 와서 같이 나가던데." 저번 우민의 활약을 본 녀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어디로?"
"글세... 아! 선도부들은 옥상에서 모인다고 하던데, 거기가 아닐까!?" 옆자리가 우민의 놀란 표정에 덩달아 놀라며 말했다.
"언제?"
"한... 오 분 정도 됐나......!"
"젠장!" 우민이 뒤 돌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친구들이 같이 뛰어나갔다.
'두여워하지 말자! 두려워하는 순간 이미 지는 것이다!'
철묵이 옥상에 따라 올라가자 이미 세 명의 선도부가 경직된 자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선도부장이 할 말이 있다는 건, 그저 핑계일 거라는 생각이 굳혀지고 있었다.
"니가 1학년 강철묵이냐?" 키는 180센티 가량, 몸무게가 족히 90킬로는 넘을 것 같은 녀석이, 2학년 선도부를 따라 가까이 오자 썩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예. 무슨 일로 보시자고......?" 철묵이 가슴에 선도부장이란 패찰을 건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2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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